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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청년아, 다시 일어나라 (눅 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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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아, 다시 일어나라 (눅 7:11~17) 

  
세상을 살다보면, 누구나 고통과 슬픔을 당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어려움이 있다. 풍랑이 있다. 무거운 짐이 있다. 찌르는 가시가 있다. 말 못 할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고통과 슬픔, 더 나아가 절망적인 나인성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나인성의 분위기는 3가지 면에서, 절망적이다. 


(1) 장례행렬이다. 누군가 죽었다. 

죽음은 인간의 최고 한계상황이다. 죽음을 극복하고 넘어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데려가신 에녹과 엘리야, 그리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 정도다. 그 외에는 다 죽었다. 

지금도 죽고 앞으로도 죽는다. 죽음이 있는 곳에는, 우울함이 있다. 호상이라는 장례식에도 웃음과 기쁨보다는, 슬픔과 눈물, 안타까움이 있다. 죽음은 사람에게 있어서 우울한 문제이며, 넘어설 수 없는 한계를 느끼게 하는 힘겨운 문제이다. 죽음은 사람에게 절망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2) 죽은 자는 과부의 외아들이다. 

죽은 자는 애꿎게도, 혼자된 여인의 외아들이었다. 그래서 절망감을 더욱 느끼게 한다. 비록 남편은 없지만, 그래도 아들은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이 아들 하나만 믿고 살아왔는데, 그 아들이 죽었다. 부모와 남편의 죽음은 땅에 묻어도, 자식의 죽음은 땅이 아니라 가슴에 묻는다고 한다. 이제 이 여인은 누구를 믿고 살고, 무엇을 위해 일하고, 외롭고 힘들 때, 누구와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가?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3) 죽은 자는 청년이다. 

죽은 자는 남편을 잃은 여인의, 외아들 일뿐 아니라 청년이었다. 만일 어머니가 90세이고, 그 아들이 70세라면, 그 죽음은 안 됐지만, 그렇게 비극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죽은 자는 새파란 청년이었다. 

청년 시기는, 생명이 가장 왕성한 시기다. 청년의 시기는, 무한한 미래를 기대하면서, 소망을 품고 성장해 가는 시기이다. 그는 청년이기에, 얼마나 위대한 일들을 이루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런 청년이 시체가 되어 누워있으니, 그에게 더 이상의 미래는 없다는 말이다. 

이 장례행렬은, 절망의 행진이었다. 그런데 이 절망의 행진이 한 순간에 멈추고, 부활의 행진으로, 소망의 행진으로 바뀐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예수님이 죽은 이 청년을, 다시 살리셨다. (13) “울지 말라.”위로하시고, (14) “일어나라.”고 하심으로, 다시 살아나 일어서게 하셨다. 

절망가운데 있는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러면 도대체 예수님의 무엇이, 죽어서 절망에 처한 청년을, 다시 일어서게 하셨나? 이 시대에 죽음에 이르는, 절망에 처한 자들을 예수님은 어떻게 다시 일어서게 하실까? 도대체 예수님의 무엇이 그들을 일으킬까? 


1. 주님의 사랑이다. 

미움은 사람을 죽이고, 사랑은 사람을 살린다. 주님은 형제를 미워함이, 곧 살인이라고 가르치셨다. 크리스천 유머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성도들에게, 미워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은, 손들어 보라고 했다. 어떤 할아버지가, 혼자 손을 드셨다. 그래서 목사님이 다시 “아니 할아버지는 정말, 미워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까?” 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옛날에는 많았는데, 미워하니까 다들 죽었어!” 

할아버지가 미움으로 이웃을 죽였다는 유모다. 그러나 이 유머가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고, 지나쳐버리는 교훈이 하나 있다. 미움은 이웃을 죽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동시에 죽인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미움으로, 자신과 이웃들을 파괴해 왔는가? 미움은 독이다. 

미움의 독이 우리 안에 퍼지기 시작하면, 우리 신경체계를 파괴해 버린다. 분노와 미움에 마음을 빼앗기면 이성을 잃게 되고, 결국 자신을 망친다. 한화그룹의 김승현 회장을 보라. 그렇지만 사랑은 살린다. 본문에 나타난 죽은 청년을, 무엇이 살려냈을까? 주님의 사랑이다.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불쌍히 여기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말로, 창자까지 뒤틀렸다는 말이다. 우리 정서로 표현하면 ‘가슴이 미어졌다’는 말이다.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느꼈다는 말이다. 

혼자 된 여인의 외아들이 죽어서, 그 장례 행렬이 나갈 때, 예수님은 그녀의 고통과 아픔을 보셨다. 외아들을 잃은 여인의 슬픔을 목격한 예수님은, 내장까지 뒤틀리는 비통함을 느끼셨다. 예수님은 혼자된 여인이, 지금 겪고 있는 뼈저린 슬픔, 그 감정을 그대로 느끼셨다. 

혼자된 여인의 슬픔과 아픔을, 자신의 슬픔과 아픔으로 동일시했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슬퍼했다. 그가 살아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느꼈다. 그래서 살리셨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이었다.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함께 할 사람이 없으면, 정말 견디기 힘들다. 

나 혼자 그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정말 예수님을 영접했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그런 생각을 버려라. 우리는 절대 혼자가 아니다. 지금 주님은 우리와 함께, 그 일을 겪고 있다. 주님은 고통을 함께 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누구도, 나를 이해 못한다.”고 말하지 말라. 예수님은 아신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나의 딸아! 나도 안다. 내 마음도 너처럼 아프단다. 너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란다. 네 아들이 살기 원한다.” 예수님은 혼자된 이 여인을, 긍휼의 눈, 사랑의 눈으로 보셨다. 

어떤 심리학자가 2개의 같은 종류의 화초를, 같은 조건에서 하나에게는 사랑의 눈길을 주고, 또 하나에게는 미움의 눈길을 주면서, 변화를 관찰한 적이 있었다. 사랑의 눈길을 받은 화초는, 사랑을 받지 않은 화초보다, 4배나 더 긴 시간동안 생명을 지속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인간의 사랑의 힘이, 이렇게 생명을 지속할 수 있다면, 주님의 사랑이 힘은 어떨까? 무엇이 오늘 죽어 가는 이 땅의 청년들을 다시 살려낼 수 있을까? 주님의 사랑뿐이다. 무엇이 우리의 가족, 자녀, 이웃들을 살려 낼 수 있는가? 주님의 사랑뿐이다. 주님의 사랑만이 유일한 소망이요, 구원이다. 

인간의 사랑도 큰일을 할 수 있지만, 인간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다. 십자가의 사랑이 필요하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사랑이, 바로 해답이다. 

1960년대에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당시에 미국 청년들은, 허무주의에 사로잡혀 죽어가던, 마약 세대, 히피 세대들이었는데, 갑자기 그들 가운데 누구도 시키지 않은, 영적 부흥이 일어났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자,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삶의 허무를 노래하던 기타반주에, 새 가사를 붙여서, 거리에서 비치에서 일어나 노래하기 시작했다. (Pass it on) “작은 불꽃 하나가 큰불을 일으키어, 곧 주의 사람들 그 불에 몸 녹이듯이, 주님의 사랑 이같이 한번 경험하면, 그의 사랑 모두에게 전하고 싶으리, 

새싹이 돋아나면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 화창한 봄날이라네, 주님의 사랑 놀라와 한번 경험하면, 봄과 같은 새 희망을 전하고 싶으리, 친구여 당신께 이 기쁨 전하고 싶소, 내 주는 당신의 의지할 구세주라오, 산 위에 올라가서 세상에 외치리, 내게 임한 주의 사랑 전하기 원하네. 

산 위에 올라가서 세상에 외치리, 내게 임한 주의 사랑 전하기 원하네.” 이것이 당시 미국을 깨운, 예수 운동의 불길이었다. 주님의 사랑이 그들을 살렸다. 주님의 사랑이 이 땅의 청년들을 살릴 수 있고, 절망의 눈물을 흘리는 자들을 살린다. 주님의 사랑의 불꽃을 경험하면, 그들이 일어날 것이다. 


2. 주님의 말씀이다. 

본문에 의하면, 결정적으로 이 청년이 일어난 것은, 예수님이 이 청년에게 말씀하시는 순간이었다. (14)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났다. 

무엇이 살렸는가? 말씀이었다. 단순한 설교나, 도덕 강론이 아니었다.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처방이 아니었다. 말씀이 살렸다. 말씀이 처방이고, 말씀이 해답이다. 어떤 분들은 대체 말씀이 무엇이기에 라고 반문하실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바로 말씀으로 만물을 지으셨다고 가르치신다. 바로 이 말씀으로 또한 지으신 만물을 붙들고 섭리하신다고 가르치신다. 그리고 동일한 이 말씀으로 죄인인 인생을 새롭게 다시 지어 주신다. 

예수님은 (요5:25)에서, 말씀이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신다고 선포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11장)에서는, 죽은 장년이었던 나사로를 향해 말씀하신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러자 나사로는 무덤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 누가복음에서는, 죽은 청년을 향하여 말씀하신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러자 청년은 살아 일어났다. (막5장)을 보면 회당장 야이로의 어린 딸이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고 하신다. 

주님께서 말씀하시자, 장년도 청년도 소녀도 일어났다. 백부장의 하인이 중풍으로 집에 누어, 몹시 괴로워할 때, 주님께서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셨다(마8:5-7). 그때 백부장이 예수님께 직접 가실 필요 없이 말씀만 하시면, 자신의 하인이 낫겠다고 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들으시고, 크게 감격하며, 그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신 그대로, 하인은 병이 나았다. 예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믿음은 말씀을 의지하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능력을 믿어라.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의지하시기 바란다. 

저는 영적으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사건도, 육체의 부활이상의 사건이요, 이적이라고 믿는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채, 하나님 없이 살던 영혼에게, 말씀이 들려오는 순간,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새 인생의 길을 걷는다. 

바로 이것이 영혼의 부활이요, 영혼의 소생이요, 영혼의 일어나게 된다. 영혼이 살면 육체가 산다. 문제는 직장이 아니다. 문제는 사는 것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땅의 청년들이, 우리 자녀들이 살아나려면, 주님의 말씀이 들려와야 한다. 그들에게 말씀이 임하도록 기도하겠는가? 말씀은 능력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라. 그때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난다. 

우리는 주님의 이 사랑의 말씀을 전해야 하고, 이 사랑을 알게 해야 한다. 삭개오는 부자였지만, 마음에 상처가 있던 죄인이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사랑해 주셨다.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하겠다고 말씀하자, 삭개오가 살아나게 되었다. 주님의 사랑이 손가락질 받던, 사마리아 여인을 살렸다. 


3. 주님의 손길이다. 

마지막으로 이 청년을 살려내는 일에, 주님의 손길이 있었다. (14) “예수께서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라고 하였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절대로 만지지 말아야 할 것이, 2가지 있었다. 

(1) 문둥병자이고, (2) 시체였다. 유대인 지도자인 랍비의 책임가운데 하나는, 이 두 가지를 사람들이 만지지 못하도록 격리시키는 일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의 랍비로서, 이 2가지 규칙을 모두 다 깨트리고 만지셨다. 예수님은 생명을 율법 규정보다,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다 짊어지셨다. 

각 종교의 특징을 이렇게 비교해서 설명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개울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데, 3사람이 그 곁을 지나갔다. 한 사람은 개울 위에 서서, 뒷짐을 지고 “여보시오, 어떻게 하다가 거기 빠졌소? 그 사람 팔자도 사납소. 길을 걸을 때에는, 발밑을 조심하며, 점잖게 걸어야 하는데, 

경망스럽게 걸으니까, 그렇게 되지 않소? 다음부터는 조심해서 걸어요.” 이렇게 훈계를 한다. 이는 유교다. 다른 한 사람은 “허허, 안 되었구려. 당신이 그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은 전생의 업이오. 계속해서 허우적거리지 말고, 헤엄쳐 밖으로 나오시오?”하였다. 이는 불교다. 

나머지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속으로 뛰어 들어서, 이 사람을 건져냈다. 이는 기독교다. 예수님은 문둥병자들을 만지셨다. 죽은 시체, 관을 만졌다. 그래서 자신은 더럽혀졌지만,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얻고 일어선다. 죽은 자가 새 생명을 얻고, 다시 일어섰다. 

주님의 사랑의 손길이 이적을 가져왔다. 이 만지심의 이적은, 사랑의 이적이었다. 왜냐하면 사랑은 만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 첫울음을 터트린 순간부터, 엄마와의 접촉을 통해 사랑을 경험한다. 이 사랑의 접촉이 결핍되면, 인간은 정서적으로 지극히 불안정하게 된다. 

2차 대전 당시, 이탈리아 어떤 작은 도시에, 강을 사이에 두고, 두 고아원이 있었다. 한 고아원은 연합군의 도움을 받아 시설도 좋았고, 영양도 충분하게 공급되었는데, 강 건너 편의 다른 고아원은 시설도 열악하고, 영양도 제대로 공급되지 못했다. 어느 고아원이 발병률과 사망률이 높았을까요? 

놀랍게도 오히려 시설이 열악한 고아원이, 시설이 좋았던 고아원 아이들보다, 발병률과 사망률이 크게 낮았다. 전쟁이 끝나고, 학자들이 연구하는 과정에,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시설이 안 좋은 고아원에, 전쟁 중에 아이를 잃고, 정신 나간 엄마가 들어와, 아이들과 함께 살았다. 

열악한 고아원의 아이들을, 자기 아이로 착각하여, 날마다 아이들을 안아주고 쓰다듬어 준 것이, 발병률과 사망률을 적게 만들었다. 미국의 인류학자 중에, 마가렛 미드(Margaret Mead)라는 분이 있다. 그는 전 세계를 돌며, 현대 문명의 영향을 적게 받은 종족들을 대상으로, 인류학을 연구했다. 

그 중에 ‘뉴기니아’의 아라페시 족과 문두구머 족에 대한 연구는, 중요한 교육적 가치를 지닌다. 아라페시 족과 문두구머 족은, 같은 나라에 살면서, 너무도 기질이 달랐다. 아라페시 족은 온순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족속임에 반해, 문두구머 족은 난폭하고 공격적인 족속이었다. 

무엇이 이 두 종족의 차이를 만들어 냈는가를 연구하여, 그 결과를 발표하였다. 두 부족이 아이를 키우는 방법에, 근본적 차이가 있었다. 아라페시 족 엄마들은, 아이를 앞으로 안고 다니면서, 엄마와 계속 몸으로 접촉하며, 눈길과 손길을 보내고 원할 때는, 언제나 젖을 주었다. 

그러나 문두구머 족은, 멀지 않은 지역에 살면서도, 아기를 등 뒤에 매달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아기가 엄마의 몸과 분리되어, 아무 접촉할 수 없었고, 엄마의 목소리나 표정을 지켜볼 수 없었다. 젖을 먹일 때에도, 아라페시 족은 앉아서, 아기의 입에 젖꼭지가 잘 들어가도록 배려하였다. 

그리고 아기가 젖을 먹는 동안, 지속적으로 아기들을 토닥여 주었다. 반면 문두구머 족의 엄마들은, 서서 한쪽 팔로 아기를 안고 젖을 주다보니, 팔이 금세 아파 얼른 젖을 떼고, 다시 바구니에 아기를 넣었다. 아라페시 족의 평화성과, 문두구머 족은 폭력성의 차이는, 바로 만져주는 차이였다. 

예수님의 손길은, 바로 인생의 소망이요 구원이다. 예수님의 따뜻한 손길은, 이 시대 죽어 가는, 청년들의 희망이다. 자녀들의 희망이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가, 이렇게 사랑으로 품어주길 원하신다. 우리가 자녀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을 때, 이렇게 기도해 보시지 않겠는가? 

“주님,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주님의 손으로 잡아주십시오.” 그리고 말로 자녀들을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자녀들을 힘껏 안아 주십시오. 언제 우리 자녀들을 안아 보셨나요?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이렇게 안아 달라고…” 

  
결론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쓰러진 자리에서, 일으켜 주시는 분이다. 어디에서 일으켜 주시는가? 죽음의 자리에서 일으켜 주신다. 이 청년은 이미 죽어서, 더 이상 희망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덤에 묻어버리려고, 메고 나갔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아들을, 다시 살려주셨다. 

그리고 죽은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서, 이미 중단되어버린 그의 인생을 다시 시작하게 하셨다. 주님은 이와 같이, 죽은 자를 무덤에서 일으켜 주시는 분이다. 풍랑 속에 빠진 분들이 있나요? 베드로가 바람과 파도를 보고, 두려워 물속에 빠져갔다. 그때 주님께서 그에게 달려가셨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베드로의 손을 잡고, 물속에서 건져주셨다. 오늘도 이 세상의 풍파는, 우리를 넘어뜨리려 한다. 때로는 그 풍파 속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사람도 있다. 그때 “이제는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손을 놓으며, 자기 인생을 포기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때, 실망한 우리 곁에 서 계시는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다. 주님은 세상의 풍파 속에 희망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건져 주신다. 사업에서 일으켜 주신다. 질병에서 일으켜 주신다. 걱정과 근심에서 일으켜 주신다. 낙심과 좌절에서 일으켜 주신다. 

불행의 늪 속에서 일으켜 주신다. 그래서 인생을 다시 살게 하신다. 주님이 죽어서 혼자된 여인의 아들을 살려준 사건이, 이를 말해 준다. 이 가정은 희망의 등불이 꺼졌지만, 우리 주님이 오셔서, 그 등불에 기름을 다시 채워 주시고, 잃어버린 행복을 다시 찾아 주신다. 

오늘도 다시 일어나는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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