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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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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눅 10:25~37)


올해 우리교회의 표어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다움, 섬김’입니다. 
작년에 우리교회는 이 표어를 실천하려고 여러모로 애를 썼습니다. 

‘전교인 1인 1사역운동’ ‘녹색교실 운영’ ‘희망봉사단 거리청소’ ‘강북 노인전문요양원 예배’ ‘한일병원 세발봉사’ ‘결손가정 어린이 돌보기’ 등 적지 않은 섬김의 활동을 했습니다. 
이런 봉사사역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한 여러 손길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금세기 최고의 영성가이며 저술가인 헨리 나우웬, 여러분 잘 아시지요? 
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일대학교에서 영성학을 가르치던 ‘헨리 나우웬’에게 1985년 ‘장 바니에’라는 정신지체아 장애인을 섬기는 프랑스 ‘라라쉬’ 공동체의 책임자가 찾아와 자신의 사역을 소개하고 여름 수련회에 참석해달라고 헨리 나우웬을 초청했습니다. 

나우웬은 강의를 해달라는 줄 알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의 역할은 강의하는 일이 아니라 평범하게 장애인들을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그해 가을 ‘장 바니에’는 나우웬에게 “토론토에 정신지체아 6명을 섬기는 데이브레이크 커뮤니티를 설립하려고 하는데 그 공동체의 책임자로 일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다음 해에 명문 하버드 대학의 교수로 가기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고민이 많았겠습니다. 
결국 그는 하바드 대학의 교수자리를 버리고 6명의 정신 지체아를 섬기려고 캐나다로 갔습니다. 

그는 그 공동체를 섬기면서 주옥같은 영성의 글들을 쏟아냈습니다. 
1996년 그는 이 세상을 떠날 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이들을 섬기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나는 경이로운 삶을 체험했다.” 

섬김의 삶을 살 때 그의 인생이 풍요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 내용 설명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한 율법사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율법에 전문가(expert)인 율법사가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하여 영생에 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영생을 얻는다.’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인생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율법사는 이 중요한 문제를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망으로 진지하게 질문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알게 됩니다. 

아무리 중요한 영생의 문제라 할지라도 그것이 ① 시험거리가 될 수 있고, ② 농담거리가 될 수 있고, ③ 그 말이 너무 익숙하여져서 무감각해질 수 있고, ④ 실존적인 문제로 인식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 선택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신약학자 탈버트(C.H.Talbert)는 본문을 해설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눅 10:25절 이하의 말씀은 눅 10:27절에 나오는 두 큰 계명의 해설이라는 것이지요. 
눅10:27절의 말씀을 읽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내용이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 방문 기사(38-42절)’이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내용이 ‘선한 사마리아 비유’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60m의 고지대에 위치해있었습니다. 
반면 여리고는 해면보다 250m 낮은 저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려가다가’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두 지역 간의 거리는 약36km정도였으며 길이 가파르고 험하여 도둑이 자주 출몰하였다고 합니다. 
제롬에 의하면 A.D. 4세기 말까지도 그 길에는 강도들이 출몰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실제 상황으로 일어날 개연성이 많은 이야기였습니다.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라는 표현은 성전에서 봉사하던 제사장이 그 임무를 마치고 여리고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 제사장은 강도 만나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레위인도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왜 그들은 강도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보고 도망가듯 피하여 지나갔을까요? 

그들에게도 할 말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이런 말이 나올법합니다. 
“제사집례 책임을 잘 감당하려고..........” 

레21: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고하여 이르라 백성 중의 죽은 자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려니와........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인즉 스스로 더럽혀 욕되게 하지 말지니라.” 

그러나 그들이 무슨 말로 변명한다할지라도 율법의 본질인 생명사랑을 외면했다는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의외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사마리아인입니다. 
사마리아인은 그 당시 유대인들에 의해서 거의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던 부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킨 것은 앞서 나온 제사장, 레위인과 비교함으로써 유대인들의 위선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였음이 분명합니다. 이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어 주었습니다. 

상상해보십시오. 
그 당시 약품이었던 기름과 포도주를 찍어 바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쏟아 붓는 모습. 
다급해서 소중한 옷가지인 머리에 두른 수건이나 속옷을 아낌없이 찢어 싸매는 모습. 
그 그림이 너무 아름답지 않습니까? 

사마리아인은 그 다음날 일찍이 데나리온 둘을 내놓으며 환자를 잘 돌봐줄 것을 부탁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가 이렇게 서둘러 길을 떠났다는 것은 그도 무척 바쁜 사람이었으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쪼갰다는 거지요. 

신약학자 예레미아스(J. Jeremias)는 그 당시 숙박비가 1/12 데나리온이었다고 보고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사마리아인이 내놓은 데나리온 둘은 보름 이상을 편안히 유숙할 수 있었던 상당히 큰 금액이었습니다. 

얘기는 여기서 끝납니다. 


2. 충돌하는 두 가지 질문 

우리는 짧은 본문에서 두 질문이 충돌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두 질문은 ‘이웃’에 대한 것입니다. 
두 질문이 어떻게 다른 지 눈여겨보십시오. 

1) 29절에는 율법사의 질문이 나옵니다. 
29절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이 질문은 ‘나’ 중심의 이웃관입니다. 
즉 유대인들은 이웃을 같은 민족,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들을 이웃의 범주에 넣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와 가까이 있거나, 나와 관련이 있거나....... 아무튼 ‘나’ 중심으로 이웃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2) 그런데 36절에는 예수님의 질문이 나옵니다. 
36절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 질문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 중심의 이웃관입니다. 
비록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는 내가 돌보아줘야 할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두 질문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에서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로 그 관심을 돌려놓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이웃관은 무엇입니까? 
단지 내 형제, 내 자식, 내 친척만을- 나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 돌봐줘야 할 이웃으로 생각했습니까? 
아니면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을 우리가 지나쳐서는 안 될 이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오셨습니까? 


3.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본문은 37절,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28절에도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하나의 관념으로 가르친 것이 아니라 삶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현학적인 토론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실천할 과제로 여겼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이웃이 되라!’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2:10)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여기서 ‘선한 일’이란 ‘섬김’을 말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다른 사람을 섬길 때 우리의 인생은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섬길 때 우리의 삶은 가치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우리가 진실로 구원받은 사람임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가르칩니다. 

그는 요일3: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만약 나에게 다른 사람을 섬기려는 마음이 없고 오직 내일에만 신경을 쓴다면 정말 나에게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이 있는지 의심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섬기는 마음이야말로 우리에게 생명이 있음을 나타내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천국은 좋은 곳인가요, 아니면 나쁜 곳인가요? 
천국은 가고 싶은 곳인가요, 아니면 가고 싶지 않은 곳인가요? 
천국은 좋은 곳이고, 가고 싶은 곳이라면 왜 하나님은 우리를 즉시 천국으로 데리고 가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은 이 슬픔 많은 세상에 우리를 놓아주셨습니까? 
이런 질문을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정답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남겨두신 이유는, 우리가 이웃을 섬겨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하여 명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성도들에게 있어서 섬김이란 시간이 남으면 끼워 넣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섬김은 성도의 삶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섬기고’ ‘주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 두 동사는 성도들의 삶을 규정하는 단어입니다. 
지상에서의 삶이 끝나는 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를 심문하실 것입니다. 

그때의 질문은 “너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았느냐?”가 아니라 “너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섬겼느냐?”입니다. 


복음성가- 낮엔 해처럼 

(이 복음성가는 그렇게 살긴 살아야 하는데 현실의 삶이 그렇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토로한 내용입니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 까 
욕심도 없이 어둔 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을 위해 살듯이 
나의 일생에 꿈이 있다면 이 땅에 빛과 소금되어 
가난한 영혼 지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고 푼데 
나의 욕심이 나의 못난 자아가 언제나 커다란 짐 되어 
나를 짓눌러 맘을 곤고케 하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남을 위하여 당신들의 온 몸을 온전히 버리셨던 것처럼 
주의 사랑은 베푸는 사랑 값없이 그저 주는 사랑 
그러나 나는 주는 것보다 받는 것 더욱 좋아하니 
나의 입술은 주님 닮은 뜻하나 내 맘은 아직도 추하여 
받을 사랑만 계수 하고 있으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을 찾고 계십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는, 또 다시 ‘그리스도인다움, 섬김’입니다. 
더 이상 ‘그리스도인다움, 섬김’이라는 표어가 우리의 귓가에만 맴도는 구호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알버트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섬기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진정한 행복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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