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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의로운 새 나라에 대한 비전 (사 3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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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새 나라에 대한 비전 (사 32:1~8)


[“장차 한 왕이 나와서 공의로 통치하고, 통치자들이 공평으로 다스릴 것이다.” 통치자들마다 광풍을 피하는 곳과 같고, 폭우를 막는 곳과 같게 될 것입니다. 메마른 땅에서 흐르는 냇물과 같을 것이며, 사막에 있는 큰 바위 그늘과 같을 것입니다. “백성을 돌보는 통치자의 눈이 멀지 않을 것이며, 백성의 요구를 듣는 통치자의 귀가 막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경솔하지 않을 것이며, 사려 깊게 행동할 것이며, 그들이 의도한 것을 분명하게 말할 것이다.” 아무도 어리석은 사람을 더 이상 고상한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며, 간교한 사람을 존귀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은 말을 하며, 그 마음으로 악을 좋아하여 불경건한 일을 하며, 주님께 함부로 말을 하고, 굶주린 사람에게 먹거리를 주지 않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물을 주지 않습니다. 우둔한 사람은 악해서, 간계나 꾸미며, 힘 없는 사람들이 정당한 권리를 주장해도, 거짓말로 그 가난한 사람들을 파멸시킵니다. 그러나 고귀한 사람은 고귀한 일을 계획하고, 그 고귀한 뜻을 펼치며 삽니다.]


•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小寒 大寒 무렵을 두고 부른 옛사람의 노래가 아련하게 들려오는 듯합니다. “雪中의 峰巒(산봉우리)들은 해 저문 빛이로다. 歲前(새해가 되기 전)에 남은 날이 얼마나 걸렸는고.” 저희 집 창으로 멀리 내다보이는 삼각산 연봉에 비낀 해가 소복이 쌓인 눈을 비출 때면, 그 비현실적인 광경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릅니다. 눈을 돌려 산 아래 마을을 보면 온갖 갈등과 추문으로 지지고 볶는 추한 현실이 보입니다. 여전히 전쟁의 포성은 멈추지 않고, 약자들의 신음소리는 우리의 가슴을 찢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도 빈정거림과 자조적인 한숨이 도처에서 들려옵니다. 희망보다는 절망이 지배적인 정서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울울한 마음을 떨쳐버리고, 담대하게 희망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이제 이틀 후면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합니다. 사람들은 이중적 감정을 가지고 미국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오바마는 ‘변화와 희망’이라는 화두를 들고 세계 앞에 서 있습니다.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이 스스로의 힘에 도취된 상태에서 벗어나 세계 시민으로서의 윤리를 회복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도 역시 미국의 이익을 최우선의 가치로 생각할 것이라는 비관론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느 쪽이 되었든 우리는 그의 행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교착상태에 빠진 대북관계를 어떻게 풀어갈지, 또 한미 FTA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지, 수렁에 빠진 이라크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지 우리는 기대 반 우려 반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싫든 좋든 그는 많은 세계인들의 운명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기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를 주시기를 기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정치에서 정의가 사라진지는 이미 오래입니다. 하지만 그가 ‘담대한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세계 질서를 세우는 데 공헌했으면 좋겠습니다.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책 <<신의 도시>>에서 “정치 체제는 정의가 없다면 조직화된 범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힘이 정의가 되는 세상이야말로 가장 각박하고 위험한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런 세상의 실상을 고발하고, 그런 강고한 세상에 틈을 만들어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야 합니다. 예언자들은 바로 그런 역할을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 이집트는 신이 아니다

선견자, 즉 보는 사람(seer)이라 일컬어졌던 그들은 한 마디로 ‘눈을 뜬 사람들’이었습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는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관습적인 삶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변화를 요구하는 예언자들을 달갑게 여기지 않으니 말입니다. 이사야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는 북방에 등장한 새로운 강자 앗시리아에 의해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을 때 등장한 예언자입니다. 그는 두려워 떠는 왕과 백성들에게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면서,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해야 할 때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허울 좋은 자부심에 도취해 살던 그들이었건만 위기를 만나게 되자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데서 희망을 보려 합니다. 그들은 이집트와 동맹을 맺음으로 위기에서 벗어나보려 합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국제정세가 신의나 공의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이익에 바탕을 둔 것임을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집트의 도움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수치와 치욕만 얻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많은 선물을 싸들고 찾아간다 해도 이미 힘이 빠진 이집트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언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불길한 말을 전하는 예언자를 원망하며 입을 다물라고 말합니다.

“미리 앞일을 내다보지 말아라!…우리에게 사실을 예언하지 말아라! 우리를 격려하는 말이나 하여라! 가상현실을 예언하여라…‘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이야기는 우리 앞에서 제발 그쳐라”(사30:10-11)

이사야는 이집트의 도움이라는 것이 허상에 지나지 않음을 계속해서 일깨워주려 하지만, 백성들의 눈은 거룩하신 분이 아니라 이집트의 군마와 많은 병거를 향합니다. 이런 상황이기에 이사야의 말은 더욱 절박해집니다. 그는 ‘이집트는 신이 아니고, 군마 또한 고기 덩어리일 뿐’(사31:1, 3)이라며, 하나님의 백성이 믿고 의지할 분은 만군의 주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백성들에게 일깨우기 위해 두 가지 이미지를 끌어 들입니다. 먹이를 물고 있는 사자가 목동들이 떼 지어 몰려와서 소리를 지른다고 해서 먹이를 버리고 도망치지 않고, 어미 새가 날개를 펴서 둥지의 새끼를 보호하는 것처럼 주님은 그렇게 당신의 백성들을 감싸 주고 건져주신다는 것입니다(사31:4-5). 실감이 나십니까? 

옛말에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세상에 어떤 위기가 닥쳐온다 해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느부갓네살의 신상 앞에 절하기를 거부하자, 그들을 아꼈던 왕은 달래기도 하고 위협하기도 하면서 지금이라도 신상 앞에 절하면 살려주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단호합니다. 설사 자기들이 화덕에 던져진다 해도 하나님께서 구해 주실 것이고, 비록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해도 차마 신상에게 절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결국 그들은 일곱 배나 더 달구어진 화덕에 던져지게 되지만 조금도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고난의 현장에 뛰어들어 그들을 지키십니다. 이 믿음이 무너지면 우리는 믿는다는 허울은 있지만 정작 믿지는 않는 신앙적 허무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역사의 추세를 지켜보면 자꾸 낙심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추스르는 까닭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 治人事天, 莫若嗇

하나님의 이사야를 통해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그 백성에게 보여주십니다. 장차 한 왕이 올 텐데 그가 공의로 통치하고, 제후들은 공평으로 다스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기서 말하는 왕을 메시야 예수님과 연결시키고 싶어 하지만, 사실 이 대목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이사야 36장부터 38장 사이에 등장하고 있는 히스기야 임금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왕은 공의(şědāqāh)로 즉 공정하면서도 넉넉한 사랑으로 통치하고, 왕을 돕는 이들은 공평(mišpāţ)으로 즉 법대로 통치하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사야는 이처럼 공의와 공평으로 통치할 왕과 제후들의 모습을 멋진 그림 언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광풍을 피하는 곳이고, 폭우를 막는 곳이고, 메마른 땅에서 흐르는 냇물이고, 사막에 있는 큰 바위 그늘입니다. 우리 역사가 어느 때 이런 정치인을 만났는지 모르겠습니다. 독설가로 유명한 어느 정치인을 지지하는 이들의 모임에서 ‘아가페적 사랑으로 000을 지켜내자’고 했다는 말을 듣고 웃었습니다만, 존경할만한 정치인을 갖지 못했다는 것처럼 큰 비극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사야가 증언하고 있는 공의의 왕은 어떤 특질을 갖고 있습니까?

“백성을 돌보는 통치자의 눈이 멀지 않을 것이며, 백성의 요구를 듣는 통치자의 귀가 막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사려 깊게 행동할 것이며, 그들이 의도한 것을 분명하게 말할 것이다.”(사32:3-4)

공의로 다스릴 왕은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들어야 합니다. 그의 눈과 귀는 하늘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늘 여쭐 때 그는 사람들을 제대로 이끌 수 있습니다. 그는 또한 땅의 소리에도 예민해야 합니다. 특별히 ‘땅의 사람들’, 곧 성경에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표상되고 있는 이들의 현실에 주목하고, 그들의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들어야 합니다. 정치가 강자의 이익을 대변할 때 세상은 약육강식의 전장이 되고 맙니다. 돈 벌었다 하면, 출세했다 하면 그것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한 결과든 무조건 존경해야 된다는 생각이 우리 사회를 뿌리로부터 파괴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지도자들은 ‘사려 깊게’ 행동합니다. 사려 깊다는 것은 제 좋을 대로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늘 다른 이들의 유익에 마음을 씁니다. 뒤쳐진 이들을 버려두고 달려가지 않습니다. 

옛 성인인 노자는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에는 아끼는 것 만한 것이 없다”(治人事天, 莫若嗇, 59章)고 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진정으로 아낀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변화됩니다. 

블레셋과 전투를 벌일 때 다윗이 “누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나에게 길어다주어, 내가 마실 수 있도록 해주겠느냐?” 하자, 세 용사가 블레셋 진을 뚫고 나가 우물물을 길어와 다윗에게 바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물을 마시지 않고, 길어 온 물을 주님께 부어드리며 말합니다. “주님, 이 물을 제가 어찌 감히 마시겠습니까! 이것은, 목숨을 걸고 다녀온 세 용사의 피가 아닙니까!”(삼하23:15-17) 이 순간 다윗의 부하들은 감동했을 겁니다. 우리 시대의 병통은 자기 편 말고는 아무도 아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들은 무정함과 폭력으로 자기 욕구만 채우려 하지만, 주님의 일꾼인 우리는 사회적 약자들의 살 권리를 존중하는 ‘우정의 사회’를 지향합니다. 


• 폭력의 유혹을 떨쳐버리라

우리가 그런 세상을 이루기 위해 분투할 때 하나님은 우리 사회에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그 날의 아름다움을 이사야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저 높은 곳에서부터 다시 우리에게 영을 보내 주시면, 황무지는 기름진 땅이 되고, 광야는 온갖 곡식을 풍성하게 내는 곡창지대가 될 것이다. 그 때에는, 광야에 공평이 자리잡고, 기름진 땅에 의가 머물 것이다. 의의 열매는 평화요, 의의 결실은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다.”(사32:15-17)

주님의 마음이 우리를 지배할 때 황무지는 기름진 땅이 되고 광야는 곡창지대가 될 것입니다. 공평과 의가 머무는 그 땅에서 비로소 우리는 ‘평화’(šālŏm)를 누리고, ‘평안’(hašqēţ)와 ‘안전’(beţah)을 맛볼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부름받은 까닭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고통과 불의와 오류와 허위에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불의에 도전하고 고통을 없애기 위해 연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무정한 이 세상에 연민과 책임과 헌신의 마음을 불어넣으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역사의 중대한 기로에 서서 함께 1961년 성탄절에 교황 요한 23세가 각국 지도자들에게 내린 엄중한 경고를 되새겨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은 권위로써 말합니다. 모든 폭력의 달콤한 유혹을 떨쳐버리십시오. 갈등과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자아내는 활동, 결정, 증오의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비극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파괴가 아니라 건설을, 분열이 아니라 일치를, 눈물이 아니라 고용과 안전을 제공할 수 있는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정치인들이, 그리고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이, 폭력의 달콤한 유혹을 떨쳐버리고, 인류의 공생과 공영을 위해 함께 협력하는 새로운 질서를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람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삶이 그런 세상의 씨앗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 꿈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이웃들을 배려하십시오. 넘어진 이웃들을 일으켜 세우십시오. 불의에 눈감지 마십시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정의로운 새 나라에 대한 비전에 기쁨으로 동참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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