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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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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 2:1~17) 

  
'피너츠 퍼레이드'라는 만화 시리즈에 등장하는 유명한 개 스누피는 상당히 철학적인 개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개라는 사실에 대한 자의식(自意識)까지 가지고 있으며, 가끔 그 문제에 대하여 저 혼자 깊은 사색에 잠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자신의 '견생(犬生)'이라는 것이 만족스럽지 못해서 그런지 잘 때에도 절대로 자기 개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항상 개집의 지붕에 누워서 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만화라는 픽션의 세계에서나 하는 이야기이지 실제로 개가 개 자신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얼마나 잘 인식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개가 가지고 있는 지적 능력의 한계를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 볼 때에는 지극히 유치한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그처럼 '개가 개 자신에 대하여 아는 것'보다는 오히려 사람이 개에 대하여 훨씬 더 많이, 그리고 훨씬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개가 어떤 종(種)에 속한 동물인지부터 시작해서 그 신체 구조, 그 생활 습관, 그것을 길들일 수 있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개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정보와 지식은 그 어떤 '천재적인 개'라 할지라도 꿈도 꿀 수 없는 수준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람 자신에 대해서'는 과연 얼마나 잘 알고 있겠습니까?
물론 제 딴에는 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의학적, 생물학적으로는 유전인자까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이 알고 있으며 철학적으로도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다.'라고 사람의 특성을 정의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시야와 수준에서는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그것은 지극히 제한적이고 유치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개에 대해서 개 자신보다 사람이 훨씬 더 잘 알고 있듯이, 사람에 대해서도 사람 자신보다 하나님께서 훨씬 더 완벽하게 알고 계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지난 주일에 나누어 보았던 '존재 세계의 원인과 시작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더불어서 이 '생각하는 동물'인 사람이 가지는 근본적인 양대 질문입니다.
그리고 오직 성경만이 '사람이 사람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내리는 제한된 인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사람의 근본적인 본성'을 정확하게 가르쳐 줍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사람이란 원래 어떤 본성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는가?'라는 이 중차대한 질문에 대하여 과연 성경 말씀은 어떻게 가르쳐 주고 있는지를 본문을 통하여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사람은 '자연과 융합되는 동물'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인격체'로 창조되었습니다. 

본문 1절부터 7절 말씀에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2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4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4절 이하 7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완성하신 후에 그 "대락" 즉 '사건 전모'를 총정리해 놓은 것입니다.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라는 말씀은 1장에서 보았던 "궁창 아래의 물" "궁창 위의 물" 즉 지표면과 창공의 수분이 충분한 상태였기 때문이며, 그래서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는 말씀대로 지구 전체는 습도 높은 온실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초목"과 "채소"란 여기서는 '사람에 의하여 경작되는 작물(作物)'을 의미하는데 "들"과 "밭"에 아직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이런 인위적인 농작물은 없었지만, 그 온실 같은 최적의 환경으로 인하여 온갖 식물의 열매와 과실들은 풍족한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사람 살기에 완벽한 생존 환경을 먼저 준비해 놓으신 후에 "흙으로 사람을 지어"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을 2장 19절의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라는 말씀과 비교해 볼 때, 사람의 육신을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는 다른 동물들과 똑같은 것으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그래서 사람이 죽어서 흙속에 묻히게 되면 동물과 아무 구별되는 것 없이 똑같이 썩어서 흔적도 없이 흙과 섞여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과 동물 사이에는 그런 생물학적인 공통점도 생기게 되었지만 결정적인 차이점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생기"라는 말은 직역하면 '생명의 호흡'(breath of life)인데, 인간 생명의 기원은 무슨 '아미노산의 우연한 합성' 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영생의 하나님께서 불어넣어 주신 생명의 기운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생령"이라고 번역된 말은 원래 '살아 숨 쉬는 생명체'라는 뜻으로서 1장 24절에서 다른 동물을 가리켜 "생물"이라고 번역한 말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하지만 다른 동물과는 달리 사람은 하나님께서 직접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심으로써 '특별한 영적 생명체'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더 자세히 설명한 것이 바로 1장 26절과 27절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 당신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이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과 겉모양이나 생김새가 비슷하게 지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적인 속성(屬性)'을 모델로 하여 '사람의 인격적인 본성'이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과 공유하는 영적 본성을 가지게 된 것이며, 바로 이 때문에 사람은 자신의 지, 정, 의 등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사귈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서로 취미가 같다든지 하는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친구지간이 될 수 있듯이, 사람은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공유하게 됨으로써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인격체'로 창조받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한갓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으로서는 정말 엄청난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 집을 좀 더 예쁘게, 좀 더 안락하게 꾸미려고 애를 쓰지만 아무리 최고급 인테리어로 장식되어 있다 해도 혼자 사는 집은 역시 쓸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아무도 맞이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 집에 아무리 멋진 벽화가 걸려 있고 현대식 주방시설이 완비되어 있고 최신식 비디오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다 해도, 벽화를 보고 퇴근 인사를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자기 요리 솜씨를 같이 맛보아 줄 사람도 없이 밥공기 한 개만을 놓고 먹는 밥상은 입맛이 날 수가 없으며, 혼자 연속극을 보면서 낄낄거리며 웃는다든지 훌쩍거리며 운다는 것은 정말 청승맞은 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신 생활하는 사람일수록 무언가 '살아 있는 생명체와 교감을 나눔'으로써 그 외로움을 달래 보려고 애완동물이라도 키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에도 그 지으신 '눈에 보시기에 좋은 것들'을 그저 혼자서만 감상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누군가가 당신 곁에서 그것들을 같이 음미하면서 "하나님, 당신께서 지으신 만물들이 정말 아름답고도 오묘합니다."라고 그 창조의 솜씨를 감탄하고 그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찬양해 주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완벽한 생존 환경 속에서 매일의 일과를 누리면서 "하나님, 당신께서 제게 허락해 주신 생명의 나날들이 정말 행복합니다."라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릴 줄 아는 피조물이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처럼 '당신과 교제할 수 있는 인격체'로 지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천지창조를 다 마치신 후에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고 그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신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은 '엿새 동안에는 힘써 모든 자신의 일을 하다가도' 바로 이 '안식일은 반드시 거룩히 지킴으로써' 하나님과의 복스러운 영적 교통을 꼭 이어가도록 그 태초 때부터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주간 스케줄을 짜 놓으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일 성수'와 '예배'야말로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라는 이 특권적인 관계를 유지함에 있어서 필수적이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어 타락한 인간은 바로 이 엄청난 특권을 외면하고 스스로 동물의 수준으로 자신을 격하시키고 있습니다.
'영장'(靈長)이라는 말은 '영묘한 힘을 가진 으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과 생물학적으로 가까운 동물들을 가리켜서 '영장류'라고 통칭하고 있으며, 한술 더 떠서 소위 유인원(類人猿) 동물들 중에서도 고릴라나 침팬지나 비비 원숭이 같은 것들은 사람과 함께 '인과'(人科)에 포함시키고 나머지는 '원과'(猿科)로 분류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처럼 사람을 동물의 하나로만 여기는 까닭에 사람의 가장 이상적인 생활 상태는 이 자연계와 잘 융합되어 섞여 사는 것이라고만 생각하게 됩니다.
  
박두진 씨의 '해야 솟아라'라는 시에서,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에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려보리라."라고 묘사되어 있듯이, 마치 이런 것을 인류의 최고 이상향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다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일 뿐이며, 성경 말씀은 사람이란 원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면서" 살기 위한 목적으로 창조된 아주 특별한 인격체이며 이것이야말로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유전인자로만 따질 때에는 침팬지와 사람은 98퍼센트가 같고 2퍼센트만 다르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과 침팬지의 진짜 차이점은 그 '2퍼센트의 다른 유전인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로 창조받았다는 바로 이 사실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동물에서 진화된' '동물과 가까운' 존재가 결코 아니라 '하나님과 가까이 사귀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히 창조하신' 피조물인 것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타공인하면서도 스스로를 자연계의 만물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있는 '타락한 인간의 자기 평가'에 미혹되지 말고, 하나님께서 원래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는 이 특권적인 인격을 꼭 회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사람은 '자연에 의지하는 유한적인 생명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영생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8절 이하 17절의 말씀에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0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12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14세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네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에덴동산의 위치가 어디였는지를 지금에 와서 애써 찾으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실낙원 이후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창 3:24) 하신 이후로 그것은 오늘날의 지구상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닫힌 공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사람이 죄를 지어 저주 받게 되기까지는 그야말로 '완벽한 자연계'인 에덴동산에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거기에서 나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서 문자 그대로 낙원의 삶을 살게 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에덴동산에 살게 하시면서 '하나의 책임'을 주셨는데 바로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자연에 의존하는 종속적인 존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연을 잘 보존하고 관리하는 '일'을 하고 그 결과 그 자연을 정복하여 마음껏 선용함으로써 그 자연계 속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게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되어 있었음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낙원이라는 곳은 결코 빈둥거리며 놀기만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장소가 아니라 분명한 책임이 있고 일과가 있는 곳이었으며 일주일의 주기와 안식일의 성수도 이미 시작된 곳이기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천당 역시 그냥 먹고 노는 향락의 낙원이 결코 아니라 예배생활이라는 분명한 일과가 있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즐겁고도 영광스러운 일거리가 꽉 차 있는 곳인 것입니다.

또한 에덴동산의 사람에게는 '하나의 선택'도 주어졌습니다.
그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는데, 그 중에서 '생명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을 수 있는 나무'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즉 사람은 원래 그 에덴동산에서 영생하도록 창조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나무' 바로 곁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나란히 세워 놓으시고 에덴동산에서 유일하게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명령을 내리시면서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명령에 대한 순종 여부가 곧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결정적인 관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사람이 손만 뻗치면 따먹을 수 있는 곳에다 심어 놓으시고 무슨 철책이나 방벽 같은 것도 전혀 없이 그저 '먹지 말라'고 말씀 한 마디만 하셨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사람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신 것이며 그것은 다른 말로 곧 '자유 의지'를 주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졌다고 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미치지 못하는 '치외법권 지대'가 생긴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부하에게 재량권이란 것이 주어져도 여전히 전체적으로는 상관의 권위 아래 완전 복속되어 있는 것이라든지, 애완동물이 자기의 자유로운 기분에 따라 어떤 다양한 감정의 반응을 보이든지 간에 여전히 주인에게 완전 종속되어 있음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그런 자유 의지를 주셨겠습니까?
애당초 사람에게 그런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으셨더라면,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같은 것은 아예 에덴동산에 두지 않으셨더라면 사람이 불순종하여 타락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인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물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는 그 어떤 잘못이나 모순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이 '인간의 자유 의지'라는 것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당신과 인격적으로 교제할 수 있는 피조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과 필연적인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도 집에서 '어항 속의 물고기'나 '새장 속의 새'를 보는 것보다는 사파리 같은 자연공원의 동물을 구경하는 것이 더 좋으며 그보다도 아예 야생 상태에서 자유로이 뛰놀고 있는 짐승들을 그대로 두고 보는 것이 훨씬 더 기분 좋지 않습니까?
  
우리 속에 갇혀 있는 동물은 구경꾼이나 주인이 다가가면 자기에게 무슨 먹이를 줄까 해서 사람에게 가까이 오는 것이 흔히 있는 일이지만, 야생 상태에서 마음대로 도망칠 자유가 있는 동물이 만약 제 발로 사람 쪽으로 가까이 와 준다면 사람으로서는 얼마나 행복하게 느껴지겠습니까?
만약에 사람에게 자유 의지가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에덴동산은 '동물원' 같은 곳이 되었을 것이며 사람은 하나님께서 교제의 대상이 아니라 그냥 '볼거리'로 만들어 놓은 존재에 불과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런 무슨 구경거리 동물처럼 만드신 것이 결코 아니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어디까지나 당신과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특별한 피조물로 창조하셨고 그래서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자유 의지는 '순종'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꼭 필요한 것이며, 바로 그 자발적인 순종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사람과 기쁨과 진정의 교제를 나누는 데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일본 사람들이 만든 로봇(robot) 개를 보았는데, 제법 진짜 개처럼 행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발로 움직이는 것은 물론이요 주인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기분이 좋다는 표시로 불을 깜박거리기도 하고 또 상황에 따라서는 꼬리를 흔들기도 하는 등, 주인의 말이나 행동에 여러 가지 반응을 보이도록 만들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로봇 개를 잘 만들어도 그것이 진짜 애완견에 비길 수야 있겠습니까?
로봇 개는 원래부터 그렇게 반응하도록 기계적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것이므로 결국에는 싫증이 날 수밖에 없지만, 진짜 애완견은 자신의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인에게 '자발적인 순종'을 하기 때문에 더욱 정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당신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만 하도록 '기계적으로 입력된' 피조물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로봇'이 아니라 '자유 의지를 가지고서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인격체'와 교제하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 순종의 여부' 이것 한 가지가 인생을 복 아니면 저주라는 양극단으로 나누는 유일하고도 결정적인 기준이요 시금석이었습니다.
'순종하면 영생, 불순종하면 사망' - 실로 간단명료한 선택이며 그 인과관계는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변함없는 철칙인 것입니다.
  
아주 쉬운 것인데도 '첫 사람'이 어처구니없이 틀리고 말았던 문제였으며 오늘날까지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사실 아주 간단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어처구니없게 불순종 쪽을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당신과 교제하면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엄청난 축복을 약속해 주시면서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 얼마나 간단한 것입니까?
말씀을 순종하기만 했더라면 반드시 누릴 수 있었던 상급인 '영생나무'는 오늘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바로 곁에 나란히 서 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이미 실낙원에서 벗어나서 다시 낙원으로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연이 제공해 주는 공기와 식물(食物)에만 의존해서 생존하는 유한적인 동물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순종하기만 하면 영생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깨닫고, 사람이 원래 받았던 이 놀라운 생명의 축복을 꼭 회복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란 '자연 진화의 산물'이며 '자연에 종속되어서 자연이 제공해 주는 것에 생명 유지를 의존해야 하는 동물'에 불과합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더구나 그 본성이 완전히 타락해 버린 사람의 시각과 지각만을 가지고 사람을 보면 기껏해야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사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의 관점에서 실로 차원 높고도 근본 깊은 대답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연과 동등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친구처럼 사귀는 존재'로 창조 받았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자연에 의존해서 겨우 칠팔십 년의 수한을 누리는 유한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 순종하면 장수 정도가 아니라 영원히 살 수도 있는 영생의 존재'로 원래부터 지음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황공무지하기 짝이 없는 사실입니까?
저와 여러분은 적어도 하나님과 사귀며 그뿐 아니라 영원히 동거할 수 있는 엄청난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무슨 '애완동물' 같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해 주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창 3:8)으로 사람과 친근히 교제해 주셨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타락함으로써 그 특권을 상실하게 되자 아예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어 주심으로써 그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고 사람이 자기 죄로 말미암아 접근금지되었던 그 '생명나무'를 저 '새 예루살렘'의 강가에서 먹을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동물 수준에서 놀거나 그보다 더 밑에 있는 물질의 수준으로 자신을 끌어내리는 바보로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뭐 빼면 시체'라는 말이 있지만 사람은 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빼고 나면 그야말로 '시체'밖에 남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하나님과 사귀는 특권'을 내버리고 자신을 동물과 물질의 수준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사람은 그야말로 로마서 1장 22절과 23절에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라고 저주하고 있는 바로 그 '짐승과 벌레 같은 인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반면에 '말씀을 순종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의 축복을 깨닫고 체험하는 신자는 정말이지 '노는 물'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예배드리고 있는 모습이야말로 사람으로서는 최고의 수준과 경지와 위치에 완전히 도달한 것 아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성경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충성하면서 주님과의 사귐을 마음껏 즐기고 있는 이 경향교회, 이 강서성전이야말로 우리에게는 바로 에덴동산이나 다름없는 낙원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자연계로부터 '진화'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실은 완전타락된 본성에 의하여 영적으로 더욱 '퇴화'(退化)되고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회복함으로써 그런 타락의 본성을 벗어 버리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더 가까이 나아가는 '성화(聖化)의 진보'를 이루어야 합니다.
만물 밑으로 스스로 기어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은 결국 그 '만물의 마지막이 이를 때에' 함께 멸망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 것'을 주님과 함께 마시게 될 그 자리에 꼭 참예하는 영생인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낙원에서 끌어내려는 사단의 모든 유혹과 시험과 속임수를 이기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원래 창조해 주셨던 생령(生靈), '하나님과 교제하는 지고의 상류사회'에서 '영생을 맛보며 주 안에서 사는 삶'을 금세에서 회복하고 영원히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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