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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요 4: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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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요 4:19~24) 


새해 첫 주일예배에서 [세상을 품고 섬기는 교회]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며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가장 큰 계명 두 가지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데 [하나님 사랑]은 일차적으로 예배로 표현되며 [이웃 사랑]은 섬김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배와 섬김이 늘 짝을 이루어 가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며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와 섬김이 균형 잡힌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에는 빠지는 일이 없는데 섬길 줄은 모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부서활동은 잘하는데 예배는 소홀히 합니다. 물론 예배도 섬기는 일도 모두 꽝인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예배도 섬김도 다 잘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래 예배와 섬김은 각각 다른 일이 아니라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은 섬김도 잘 하는 것이고, 잘 섬기기 위해서는 예배를 잘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어에서는 섬김을 서비스(service)라 합니다. 그런데 예배도 worship service 또는 그냥 service라 합니다. 예배는 오직 하나님만이 주인이 되시고 모두의 섬김의 대상이신데 반해 섬김은 사람들 간에 서로 종노릇하는데 그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 대상과 범위가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예배와 섬김은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배를 잘 드려야 섬기기도 잘 하고, 잘 섬겨야 예배도 잘 드리는 것이라는 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잘 섬겨야 사람도 잘 섬길 수 있는 것이고 사람을 잘 섬겨야 하나님도 잘 섬기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예배에는 안 빠져도 사람을 섬길 줄 모르면 바른 예배자라 할 수 없는 것이고, 아무리 열심히 섬긴다고 해도 예배드리기를 소홀히 하면 잘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금년에는 아니 앞으로는 예배와 섬김, 이 두 가지를 다 잘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유대지방에 가셨다가 다시 갈릴리로 가시기 위해 [사마리아]를 통과하실 때 [수가]라고 하는 한 동네에서 만난 한 사마리아 여인과 나누신 대화의 일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대화의 내용을 가지고 2004.10.31 주일에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전체를 반복하지 않고 오늘은 본문의 마지막 두 절에서 거듭 언급된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본문 23-24절을 다시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이고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임을 우선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란 과연 어떤 예배입니까? 

24절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신 것으로 보아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란 영이신 하나님과의 만남, 즉 영적인 만남이 있는 예배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의 영적 만남을 갖기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이 스스로 영이신 하나님과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개하시는 성령의 역사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때 비로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만남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셨습니다. 

또 태초부터 영이신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이가 예수님이십니다(요1:1, 14).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적인 만남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영이 되어서가 아니라 영이신 이가 우리처럼 육신이 되어 오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하나님과의 만남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만남과 소통의 한 방법인 기도를 할 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란 성령의 역사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을 가진 사람이 영이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는 예배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언제나 이런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자연히, 필연적으로 감격을 낳고 기쁨을 생산하며 감사가 넘치게 하고 변화를 일으키며 생명을 창출합니다. 그래서 참 예배를 드린 사람은 새로운 감격을 맛보고 기쁨에 가득 차며 감사로 충만하고 거룩해지며 활력이 넘치게 됩니다. 그런 참 예배를 드리지 못한 사람은 예배 마치고 나오는 표정이 굳어있거나 무표정하고 예배당 밖으로 나오자마자 불만과 불평을 터뜨리며 비판을 일삼곤 합니다. 예배 시간 한 시간 외에는 주일 하루를 온통 부정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지냅니다. 은혜가 없다고 떠듭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처음부터 은혜 받을 준비 없이 예배당에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다 은혜 받아도 혼자 못 받습니다. 스스로 은혜를 거부할 준비만 하고 예배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주일마다 그러기를 반복하다 보면 신앙이 식어갑니다. 신앙의 모습이 비뚤어지기 시작합니다. 표정도 변하고 말투도 변하고 사고방식도 뒤틀리기 시작합니다. 어느새 사람이 완전히 변하고 맙니다. 그러다 보면 점점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기 시작합니다. 모두에게 불평쟁이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소외감을 느끼게 되면 점점 더 공격적이게 되고 모든 것이 맘에 안 들고 모두에게 적대적이 됩니다. 그리고 자기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하고만 어울리고 친해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런 현상이 점점 더 심해집니다.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그러다 보면 그것이 그의 본래 인간성처럼 되어 버립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배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계기입니다. 바른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그 신앙의 성숙과 삶의 변화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신앙의 성장에 있어서 예배보다 더 큰 힘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배에 대한 바른 이해와 자세 없이 예배에 출석하는 일은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십년, 이십년, 아니 삼사십년을 예배당에 드나들어도 아무런 인간성의 변화도 삶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바른 예배를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른 예배자세를 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무엇인지 사실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예배는 오직 하나님만이 주인이 되시고 모든 사람은 섬기는 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배를 드리려고 하나님께로 나아와야 합니다. 예배를 지배하고 평가하려고 나아와서는 안 됩니다. 예배는 은혜를 받으려고 나아와야지 비판하려고 나아와서는 안 됩니다. 은혜 받을 마음으로 나아오는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다. 비판하려고 나아오면 비판거리만 잔뜩 얻어가지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예배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불평, 불만, 비판, 심지어는 욕설까지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배가 조금 일찍 끝나도 불만, 조금 늦게 끝나면 더 불평입니다. 

은혜 받는 사람은 예배가 빨리 끝나면 예배가 짧은데도 너무 은혜가 된다고 말하고, 예배가 늦게 끝나면 예배가 긴데도 조금도 길게 느껴지지 않게 은혜롭다고 말합니다. 예배에 대한 바른 자세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설교가 자기 생각과 다르면 온갖 비난을 쏟아냅니다. 드리는 예배, 섬기는 예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이 지배하고 자기 마음이 흡족해야 하는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가 주인인 예배를 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고 본 것입니다. 관찰한 것입니다. 비판할 것 없는지 열심히 살핀 것입니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했는지 아닌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 자기가 속한 서클의 이념, 자기가 속한 정당의 노선에 맞는지 아닌지를 가지고 비판을 일삼느라고 목사를 원수로 삼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소속정당을 소속교회보다 더 중요시하며 정치이념을 하나님의 말씀이나 신앙에 우선시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런 입장은 섬김으로서의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그것은 예배가 나를 섬기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배의 주인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 나의 소신, 나의 철학, 나의 인생관, 나의 정치이념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점검받고 교정 받으려 하지 않고 나의 생각과 소신과 철학과 인생관과 정치이념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고 비판하려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예배의 주인이 되고 섬김을 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홀로 섬김을 받으시는 예배에서는 은혜 받고 만족하며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표정이 밝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모두가 은혜 많이 받았다고 할수록 더 기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만 외톨이가 됨을 보기 때문입니다. 늘 비판과 불평을 일삼는 사람은 묘하게 비판거리가 없으면 행복해야 할 터인데 그렇지 않음을 종종 봅니다. 하루 종일 씹을 거리를 못 찾았기 때문입니다. 신이 나지 않는 하루를 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그게 무슨 신앙생활입니까? 뭐하려 교회는 나옵니까?

기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하자면, 목사가 조금 불만스럽다 해도, 설교를 조금 못한다 하더라도 그럴수록 그를 위해 더 기도 많이 하고 누구에게나 “우리 목사 참 좋은 목사라.”고 말해주는 신자가 좋은 신자고 그런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그저 목사 흉보는 일에만 열중하고 자나 깨나 그 일로 즐거움을 삼는다면 그런 교회가 어떻게 부흥하고 성장하겠습니까? 좋은 교회인 줄 알고 소문 듣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목사 흉만 보고 있으면 누가 다시 올 생각을 갖겠습니까? 

제 발로 찾아오는 새 신자들 흩어져 돌아가게 만드는 사람들일 수록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다, 교인이 줄어든다는 말은 더 잘합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하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했는가? 무엇을 해야겠는가? 하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목사는 교회의 얼굴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새로 정할 때 대부분 목사를 보고 교회를 선택합니다. 

당회를 길게 해서 좋다고 찾아와 등록했다는 사람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당회원 가운데 말 잘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 듣고 와서 등록했다는 얘기도 아직까지는 들어본 적 없습니다. 목사를 견제하는 세력이 큰 교회라고 해서 몰려와 등록했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어차피 목사 보고 오기도 하고 목사 때문에 떠나기도 한다면 기왕이면 목사의 얼굴을 잘 가꿔주려고 해야지 틈만 나면 그 얼굴에 먹칠해주고 상처내주고 주름 짓게 만들고 막 말 해서 모욕감을 느끼게 해서 되겠습니까? 목사의 얼굴이 그렇게 돼서 이익 볼 사람은 누구며 피해는 누가 입겠습니까? 이익 볼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피해는 고스란히 교회가 입는 것입니다.

예배로 하여금 참 예배 되지 못하게 하고 그래서 교회로 하여금 좋은 교회 되지 못하게 하는 일들은 또 있습니다. 찬양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고의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모든 찬양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려 해야 합니다. 회중들로부터 칭찬 받고 박수 받으려고 찬양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회중들로 감동받고 감격해서 저절로 “아멘!” 하게 될 그런 찬양을 드리려고 힘써야 하겠지만 사람의 칭찬 자체가 찬양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멘”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마디 하면, “아멘” 할 줄 모르는 것이 결코 교회의 자랑거리는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홀로 섬김을 받으시며 예배드리는 모든 사람은 다 섬기는 이가 되는 예배라면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에  “아멘!”으로 화답하고 그에게 드리는 기도에 크게 “아멘!”으로 마음을 모으며 그의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고 예배를 마칠 때 하는 목사의 축도에 온 성도가 한 마음으로 한 목소리로 “아멘!” 하며 하나님의 복을 비는 것은 당연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 교인들은 예배 중에뿐 아니라 축도 때까지도 “아멘!” 하는 소리가 복을 달라는 것인지 주시지 말라는 것인지 주시든 말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인지 알기 힘들만큼 작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초청되어 오신 강사목사님들을 민망스럽게 하고 그분들로부터 지적을 받기도 합니다. 물론 “아멘!”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 조용히 할 뿐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멘!” 한 번 크게 하면 어디가 덧납니까? 적지 않은 교우들이 “아멘!” 소리 없는 것이 곧 경건한 예배라고 여기며 우리 교회에서 “아멘!” 하지 않는 것을 자랑처럼 여기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목사가 회중으로부터 “아멘!” 소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일부러 “할렐루야!”를 남발하지 않는 것을 자랑해야지 성도들이 “아멘!” 할 줄 모르는 것을 자랑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진심이 담긴 “아멘!”이 하나님께서 기뻐 들으실 “아멘!”일 것입니다. 

찬송이든 기도든 설교든 정말 그 내용을 경청하는 가운데 자발적으로 “아멘!” 해야지 듣지도 않고 딴 전 부리다가 오 분에 한 번씩 기계적으로 “아멘!” 하는 것은 예배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홀히 섬기는 것입니다. 목사님들 가운데는 교인들이 “아멘!”을 잘 해주면 설교하는 목사들이 신이 나서 더 잘 할 것이니까 열심히 “아멘!” 하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멘!” 하는 목적이 설교자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아멘!”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향한 것이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감격하고 기뻐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멘!” 하는 것을 보고 설교자가 보람을 느끼고 용기를 얻는 일이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순전히 예배 중에 설교자를 응원하기 위한 “아멘!” 은 바른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것은 또 다시 사람이 예배의 주인이 되게 하기 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본문 20절) 하며 어디서 예배하는 것이 옳은지를 여쭈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본문 21절) 하신 것은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누구에게 예배하느냐 하는 것이며 나머지 문제는 다 부수적인 것들임을 밝히신 것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이 홀로 주인이시고 그만이 섬김을 받으시며 모든 경배와 찬양과 존귀와 영광은 그분께 돌려지고 모든 사람은 다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 참된 예배의 핵심임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만을 섬기는 예배를 드리고 그래서 예배 때마다 한량없는 은혜를 누리며 새로운 감격과 기쁨과 행복과 감사가 넘치는 삶을 선물로 받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배와 섬김이 균형을 이룬 삶을 통해 교우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이 성숙하고 교회가 성장하여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이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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