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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요 1:4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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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요 1:43~51)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으러 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45절에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이 말하는 예수님은 바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입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만났다는 말은 메시아를 만났다는 말입니다. 그 메시아가 바로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는 분이라고 증거합니다. 안드레가 말한 것도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는 것이고, 빌립이 말한 것도 약간 다른 표현을 쓰고 있지만 “메시야를 만났다”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이 만난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메시아입니까? 성인입니까? 선생님입니까? 구주입니까? 
분명하게, 분명하게 뼈저리게 뼈가 저리도록 느껴야 합니다. 체험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당신의 누구입니까? 이것을 체험하고 알게 된 빌립은 즉시 전하러 갑니다. 

이분이 메시아다. 그리스도다. 구주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당신에게 중요한 분이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분이라고 느끼고 삽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생각하면 경련이 일어 날만큼 흥분이 될 만큼 기쁨과 감격과 감동이 생겨납니까? 예수님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귀가 열리고 가슴이 열립니까? 그러면 당신은 틀림없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세상에 살면서 수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삽니다. 그 관계 속에서 서로 영향을 끼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어떻습니까? 내가 진정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나로 인하여 나와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에게 어떤 모양으로 든 지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가까운 것은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예수님을 믿기에 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똑같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신앙이 죽었던지 내가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믿지도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구주로 받아들이면 달라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이라면 변화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우리 속에 오셔서 능력을 나타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가치관으로 가득 찬 내 마음에 하늘의 영을 부어주시고 세상에 대하여는 죽고 하늘에 대하여 살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을 돌려대는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을 벗어 주는 능력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가 없습니다. 

도덕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수련을 통해서 어떤 선한 의지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늘나라의 생명의 뿌리가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면서 선한 일을 하는 정도로 예수 믿는 것으로 착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일은 기독교가 아니어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일로 종교를 비교 합니다. 어느 종교는 이런 일을 하는데 어느 종교는 이런 일을 하는데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 것은 기독교의 목표는 사회사업을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교회가 그곳에 목표를 세운다면 그 교회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모든 백성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이 말하는 사회사업의 선한일보다 수 십배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힘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를 섬기고 모두를 용서하고 모두를 돌보는 능력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 힘을 얻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빌립은 예수님에게서 그 힘을 발견하였기에 와보라고 합니다. 보면 안다는 것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나다나엘이 빌립보다 말을 더 잘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나사렛은 갈릴리에 속한 조그마한 마을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없지만 나머지 복음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보면 나사렛을 말할 때 갈릴리 나사렛이라고 표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한 말은 나사렛이 그렇게 중요한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구약의 탈무드나, 미드라쉬 그리고 요세푸스의 글에도 나사렛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그만큼 작은 동네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동네에서 메시야가 나셨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더욱이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미가 선지는 예언하고 있습니다. 메시아는 나사렛 출신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지도 않고 만나지도 않고 대화해보지도 않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좁은 지식만으로 사람들을 이렇게 판단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이러한 판단은 더러 맞는 이야기도 있지만 대개는 그릇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세상은 비판하기를 좋아하지만 예수님은 아니라고 합니다. 비판하기보다 서로 돌아보기를 좋아하라고 가르칩니다. 말로 당 할 수 없는 빌립이 와보라고 합니다. 네가 직접 만나보면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믿습니까?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증거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메시야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실 분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논리가 우리보다 강합니다. 세상의 지식이 우리보다 뛰어납니다. 이러할 때 우리는 무엇이라 해야 합니까? 와 보라입니다. 예수님에게 와보라 우리교회에 와보라. 우리모임에 와보라. 우리가 예배드리는 곳에 와보라 입니다. 

그러려면 와보라 할 만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와보라 해서 와 보았더니 서로 시기하고 다투고 미워하고 당을 짖고 교만하고 눈들이 독사의 눈을 가지고 있고. 욕심으로 가득차고 힘겨루기 하고 있으면 그곳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와보라 해서 와보았더니 정말 예수님이 계십니다. 사람들의 얼굴이 환하고 웃음이 넘치고 사랑하고, 서로 섬기려 하고, 양보하고, 서로 감사하고, 나눔이 있고, 서로 높여주고, 친절하고, 말씀이 있고 찬양이 있고 감동이 있고, 오늘날 그것을 보여 주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예수님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나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나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는 것은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나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떠나갔다'. 더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누구 때문에 교회 못 나가겠다. 성경은 그러면 연자 맺돌을 목에 걸고 가서 강물에 빠져 죽어라 합니다. 그게 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런 사람은 절대로 연자 맺돌을 매고 가서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제아는 자신이 문제아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이 떡을 찍어다 주면서 이 사람이다 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좋은 교회는 예수님이 크게 보이는 교회입니다, 사람이 높임 받는 교회가 아니고 예수님이 높임을 받는 교회, 예수님의 말씀만이 선포되고 그 말씀이 힘이 있는 교회 그 말씀이 살아 있는 교회 다시 말하면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 있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와보라”했을 때 예수님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만나 감동을 받고 변화가 일어나고 열정이 생겨나고 흥이 돋아나서 찬양이 울려 퍼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에너지가 들어가면 전기가 일어나고 에너지가 들어가면 기차가 달리고 비행기가 날아갑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생명의 에너지입니다. 인격의 에너지입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나다나엘에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그는 고백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하던 자가 완전히 딴사람이 되었습니다. 빌립을 따라오는 나다나엘을 보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은 누구의 이름입니까? 야곱의 새 이름입니다. 아시지만 야곱은 원래가 간사한 사람입니다. 어머니 치마폭이나 싸고도는 마마보이에다 형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가로챈 사람입니다. 엄마와 합작해서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자기의 이익을 얻기 위해 남을 속이는 자가 간사한 자가 아닙니까? 자기의 이익을 위해 그 앞에서는 수도 없이 얼굴이 바뀌는 사람이 간사한 자가 아닙니까? 

그런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기까지 얼마나 하나님께서 그를 연단시켰습니까? 자기가 속인 것에 몇 배는 더 되게 속임을 당했고, 형을 속인 결과로 고향을 찾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얍복강에서 그렇게 매달리며 씨름할 때 환도뼈를 쳐서 평생 절룩거리며 살게끔 하시고서야 형과 화해를 이뤄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해서 얻어낸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을 보고 예수님이 참 이스라엘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깨끗하고 바르게 살아왔다는 겁니다. 뜻밖의 말을 들은 나다나엘이 묻습니다. 나를 어떻게 아십니까? 예수님이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이말에 나다나엘이 완전히 녹아집니다. 당신은 하나님의아들이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면 녹아집니다. 고집도 녹아지고 교만도 녹아지고 성질도 녹아지고 우리 모두가 녹아지기를 바랍니다. 

무화과 나무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 이 말이 중요 합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주 쓰는 너는 경건한 사람이다 하는 숙어와 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건기는 우리보다 아주 덥고 건조합니다. 그래서 했빛 아래서는 호흡하기조차 힘들지만 그늘에 들어가면 무척 선선합니다. 

6개월이나 지속되는 이스라엘의 여름 날씨에서 잎이 넓어 좋은 그늘을 제공하는 무화과 나무아래는 랍비와 함께 토라를 공부하고 토론하기에 좋은 장소였던 것입니다. 아울러 여름내내 쉼 없이 열매를 맺는 무화과의 향기는 기억력을 좋게 하는 청량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아래에서 말씀을 공부하고 묵상하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고 기도하는 것을 알고 계신 예수님 그래서 참 이스라엘이라고 인정해주시는 예수님 그 앞에 녹아진 것입니다. 우리도 쉬지 않고 가져야 할 소중한 시간들이 있습니다. 바로 말씀을 공부하는 일과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말씀을 공부하는 것은 똑똑해지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자 말씀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말씀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알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나다나엘을 다 보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주님이 여러분을 보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어데서 무엇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사는지 무슨 마음으로 사는지를 다 아십니다. 그래서 만나야 할 자들을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빌립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나다나엘이 에수님을 만났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 다 같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이를 만났다 증언 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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