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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형통한 사람, 요셉 (창 3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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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통한 사람, 요셉 (창 39:1~6)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몹시 가난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을 지키며 십일조를 하며 열심히 생활했습니다. 소년은 성실과 믿음이 인생의 성공을 가져온다고 믿고 가난과 싸워나갔습니다. 그 결과 그 소년은 장성하여 30세가 되던 해에 모빌런치서비스라는 회사를 설립하게 되었고, 이어서 세계적인 도너츠 상표를 개발했습니다. 그가 바로 세계적인 도너츠 체인점인‘던킨 도너츠’의 창업주 로젠버그입니다. 현재 전 세계 어느 곳에 가도 던킨 도너츠 체인점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는 72세를 맞이하는 생일축하 자리에서 말하기를 “나는 너무 가난하여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늘 저의 짐을 맡아주셨습니다. 성공은 지식에 있지 않고 태도에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는 가난하여 교육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늘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자신의 짐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짐을 대신 맡아주시고 그를 이끌어 주셔서 대기업가로 성공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는 “지식이 나를 성공시킨 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가 나를 성공 시킨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삶의 태도가 인생을 성공으로 만들어 주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본문을 포함하여 창세기 39장~50장은 야곱의 열한째 아들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요셉은 열형들의 미움과 배신으로 이집트의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온갖 고난과 서러움을 겪었으나 그는 훗날 이집트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 놀라운 사실에 대하여 본문 2절에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기 되어...” 라고 하셨습니다. 형제들에게는 버림받은 요셉이었으나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 요셉은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삶을 통해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해주시기를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교회를 다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 수 있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기보다 내 욕망이 충족만을 구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것은 결코 삶의 지혜가 아닙니다. 그렇게 요구한다 하여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시기만 하면 모든 것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나 함께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 달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 그 해답을 요셉의 삶의 모습에서 찾고자 합니다. 

一. 하나님은 변함없는 믿음의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성경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힘입은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의 공통된 특징은 모두가 변함없이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셉 역시 이러한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며 살아갔습니다. 요셉의 어머니는 요셉의 동생 베냐민을 낳다가 산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 요셉은 열 일곱살 때 이복형들에 의해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이렇게 하여 아버지마저 생이별을 했습니다. 요셉이 세상에서 의지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부잣집 아들로 곱게 자라던 요셉이 그만 졸지에 노예의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요셉은 하나님만 굳게 의지하며 열심히 살아갔습니다. 

하나님을 굳게 의지한 요셉의 믿음이 창세기 45:4-5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판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애굽에 팔려간 요셉이 훗날 총리가 되었을 때에 자신을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이 흉년을 맞아 양식을 구하고자 애굽에 와서 요셉 앞에 섰을 때에 한 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 요셉은 매사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었습니다. 형들의 배신으로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 이로 이해 겪게 되는 천신만고의 삶, 소용돌이치는 기막힌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숨은 계획이 있음을 굳게 믿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굳게 살아갔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로마서 8:28에“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현재의 상황이 어떤 경우든 결국은 좋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뜻하지 않은 어려운 날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러움의 날도 있습니다.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한 날 변함없으신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삶에 지쳐 쓰러질 때에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도우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손길이 있습니다. 승리의 길이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의 날의 믿음에 대하여 박두진 시인은 이러한 시를 썼습니다. 

< 믿음 지키기>

무너지지 말아라.
해가 솟아도 해가 빠져도 무너지지 말아라.
달이 떠도 달이 빠져도 무너지지 말아라.
별들이 펑펑 다 쏟아져도 무너지지 말아라.
온 땅 위에 꽃이란 꽃들이 일제히 다 떨어져도 무너지지 말아라.
새란 새들이 다 슬프게 울어도 무너지지 말아라.
늑대, 사자, 여우, 칡, 범, 맹수란 맹수가 다 몰려와도 무너지지 말아라.
가도 가도 끝이 없어도 무너지지 말아라.
불볕 쩔쩔 황사바람, 천둥번개, 소낙비 풍풍, 폭설, 우박
진눈개비가 쳐도 무너지지 말아라.
눈물의 폭포 피의 장강에도 무너지지 말아라.
너 자신의 영혼의 고독 해일로 덮치는 절망과 불안
죽음에 이르는 허무의 사다리에서도 무너지지 말아라.
너여, 너여 진실로 말씀이시며 승리이시며 영원이신 새 영원
뜨겁고 그 진하신 피와, 하늘 빛 푸른 눈물,
사랑이신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나니.

<박두진의“폭양에 무름 꿇고” 中에서>.

마치 요셉의 삶을 두고 지은 시 같습니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믿음의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믿음은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얻게 되며 말씀을 들으므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로마서 10:17). 이 믿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조건입니다. 이 믿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통로입니다. 이 믿음은 세상의 고난과 역경을 막아주는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16에는“믿음의 방패를 가지라”고 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육신의 건강 못지않게 내 영혼의 건강을 위해 즉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해 말씀 듣는 예배를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二. 하나님은 소망의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요셉의 삶은 어두움의 연속이었습니다. 형들의 뜻하지 않은 배신, 가족과의 이별, 그로인해 겪어야 하는 괴로움과 외로움, 노예의 서러움, 죄인 아닌 죄인의 억울함 등 그의 앞에 희망이란 전혀 없었습니다. 캄캄한 흑암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역경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의 마음속에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7:1-11에는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심어준 꿈이 있었습니다. 열두 형제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는데 요셉의 단은 일어서고 형들의 곡식 단은 요셉의 단 곁에 둘러서서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또한 열 한 별과 해와 달이 요셉에게 절을 하는 꿈을 주셨습니다. 훗날 그에게 영광된 날이 있으리라는 꿈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꿈으로 또는 음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셨습니다. 때로는 천사를 통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승천하신 후 성령님이 강림하셔서 처음으로 교회가 세워 졌습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오셔서 역사하십니다. 이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의 특성가운데 하나는 언제나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절대 소망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어던 경우라도 낙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낙심의 출처는 나를 망하게 하려는 어두움의 세력입니다. 

인간은 꿈을 먹고 삽니다. 꿈이 있는 곳에 용기가 있고 삶의 의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꿈은 승리의 원동력이 됩니다. 
동양인으로서 세계 최초로 올림픽에서 수영 금메달을 딴 백태환 선수가 그의 일기장에 쓰기를“나의 최고 스승은 꿈과 희망이었다.”라고 했습니다. 

1858년 뉴욕의 한 가정에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 소아마비로 다리를 절었습니다. 시력도 극도로 나빴습니다. 천식으로 인한 호흡곤란 때문에 앞에 있는 촛불을 끌힘도 없었습니다. 가까스로 생명을 연장해가고 있었습니다. 열한 살이 되던 어느 날 아버지는 아들에게 “네가 가진 장애는 장애가 아니란다. 네가 만약 전능하신 하나님을 참으로 신뢰하고 믿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의 도우심이 너와 함께 하신다면 오히려 네 장애 때문에 모든 사람이 너를 주목할 것이고 너는 진실로 역사에 신화 같은 기적을 남기는 놀라운 삶을 살수 있단다.”라는 말로 소망을 심었습니다. 

이 어린이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꿈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드디어 23세 되던 해에 뉴욕 주를 대표하는 의회 의원이 됐습니다. 그 후 뉴욕 주 지사가 되었고, 부통령이 되었고, 드디어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1906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데오로르 루즈벨트 입니다. 장애자 아들로 하여금 이토록 위대한 삶을 살아가도록 한 것은 아버지께서 심어준 꿈 즉 소망이었습니다. 

낙심과 교만은 같은 뿌리에서 자라나는 마음 밭의 잡초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불신앙의 열매입니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는 일이 잘되면 교만하고 잘못되면 낙심합니다. 이처럼 낙심과 교만은 사탄이 우리들의 마음 밭에 심어 놓은 잡초입니다. 

시편의 한 기자는 험한 세파에 시달리면서 마음에 낙심이 될 때에 스스로 다짐한 내용이 시편 42:11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여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어려운 날은 그 어려운 상황만을 바라보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자 스스로 다짐하며 노력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려운 날은 어려운 상황만을 바라보지 말고 그 상황을 능히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인 성경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형통케 되는 날이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1:1~3에 말씀하시기를“복 있는 사람은...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고 하셨습니다. 

옛날 범선을 타고 항해하던 때에 배를 처음으로 탄 초보 선원이 돛대 꼭대기에 올라가서 작업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거센 파도에 흔들리는 작은 배의 돛대 위는 흔들리는 각도가 훨씬 더 큽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머리가 어지럽고 배는 금방 바다에 침몰할 것만 같습니다. 이 초보 선원은 두렵고 불안하여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벌벌 떨고만 있습니다. 이때에 경험 많은 선장이 소리를 칩니다.“야, 아래를 내려다보지 말고 하늘을 쳐다봐.”선장의 말을 들은 초보 선원은 비로소 하늘을 처다 보았을 때 할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어려운 날은 그 어려운 상황만 바라보지 말고 그 어려움을 능히 해결할 수 있는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은 전능자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약속인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형통케 되는 날이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三. 하나님은 이웃에게 인정받도록 살아가는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본문 4절에 요셉의 삶에 대해 가록하기를“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라고 했습니다. 

6절에는“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요셉의 삶을 짐작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요셉이 주인에게 전폭적인 신임과 사랑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노예의 신분인 요셉이 왕을 호위하는 시위대장의 가정 총무가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당시 노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농사짓는 농기구 중 하나로 인식되는 것이 노예의 처지였습니다. 

당시 농기구는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 움직이지 않는 농기구로 괭이나 삽, 쟁기 같은 도구 입니다. 둘째, 움직이는 농기구로 소나 말이 있었습니다. 셋째로, 말하는 농기구로 노예가 있었습니다. 노예에게는 인권이나 생명의 존엄성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람 요셉이 얼마나 성실하게 살았으면 주인인 시위대장의 전적인 신임으로 그의 가정 총무가 되었으며, 훗날 당시 최고의 문명국인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되었겠습니까? 

이처럼 신실한 삶을 살았던 요셉은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었습니다. 성실한 삶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입니다. 마태복음 5:14-15에 말씀하시기를“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를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는 이웃에게 본이 되는 성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실한 삶을 통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려는 마음이 일어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초기 성도들의 삶에 대하여 사도행전 2:47에 기록하기를“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부흥의 세 가지 요소는, 입술로 전하는 복음, 본이 되는 삶, 그리고 하나님이 역사였습니다. 오늘날은 도리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본이 되지 못하므로 교회의 부흥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본문 6절에 요셉의 모습에 대하여“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요셉의 외모가 사람들 보기에 호감이 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결코 요셉의 얼굴 외모만을 가리키는 말씀이 아닙니다. 당시 요셉의 신분은 노예였습니다. 노예의 검게 탄 얼굴, 엉클어진 머리카락, 남루한 노예의 복장, 이러한 요셉이었는데 뭐가 그리 준수하고 아담했겠습니까?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고 한 것은 외모가 아니라 그의 속사람의 됨됨이었습니다. 신실한 요셉의 삶이었습니다. 

외모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대로 받는 것입니다. 외모는 내가 고칠 수도 없습니다. 요즘은 성형의술이 발달되어 외모도 많이 고치는 것 같은데 그보다 속사람을 고치고자 노력하는 것이 성도의 지혜입니다. 속사람은 자신이 스스로 갈고 닦으면 얼마든지 아름답고 빛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3:3에 권면하시기를“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52에 예수님께서 성장하신 모습에 대하여 기록하기를“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나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아가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날이 더해 갈수록 예수님을 닮아 하나님과 사람 앞에 사랑받도록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노예의 신분으로 주인집 총무가 되어 가정 살림 전체를 맡았다는 것을 볼 때 그가 어떠한 자세로 임했는지 충분히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요셉이 주인의 눈치만 살피면서 꾀를 부리고 자신의 안일만을 추구했다면 그래도 주인의 총애를 받아 가정 총무가 될 수 있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신분은 비록 노예였지만 그 집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습니다.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꼭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주인의 눈치를 살피면서 적당히 일한 사람이 성공한 예는 없습니다. 사람을 속이면서 일하는 사람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매사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채플이라는 교회당의 천장 벽화를 손수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 천장은 까마득히 높았기 때문에 그 아래에서는 사실 천장의 모습이 한 눈에 정확하게 파악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이 천장의 벽에 가까이 붙어서 선 하나 하나를 정성을 다해서 그리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친구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여보게, 여기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네, 그냥 적당히 해두고 내려오게나.”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천장에서 그 친구를 향해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여보게, 이 그림을 다 그린 후에 이 그림의 성과가 어느 정도인가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그야 자네겠지.”“맞네. 내가 알고 하나님이 아시는 한 나는 최선 이하로 일할 수는 없네.”라고 대답했습니다.

에베소서 6:6~7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에 대해 말씀하시기를“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미움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요셉의 삶이 이와 같았습니다. 어디에서나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주위 사람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영광된 날이 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쉽게 맡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맡은 일에 대한 책임을 감당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감당하되 끝까지 감당하는 것은 더욱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4:2에“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10에는“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삶의 자세는 충성하는 것입니다. 충성하되 사력(死力)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충성하되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변함없이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위해 생명의 면류관을 예비해 두고 계십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처럼 어떠한 역경 가운데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요셉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신임과 사랑을 받는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말이 아닌 삶으로 본을 보이는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요셉처럼 환경을 탓하지 아니하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요셉의 아름답고 신실한 삶의 자세가 우리 모두의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세상을 이기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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