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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요 1:4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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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요 1:43~51)

 
요한복음 1장 35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 네 사람을 부르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네 사람이 예수님과 만나는 과정은 조금씩 달랐습니다. 먼저 안드레의 경우는 자기 스승인 세례 요한의 직접적인 소개를 통해서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의 형제 안드레가 메시야를 만났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빌립은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다나엘은 빌립의 소개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너와 나의 관계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서로 관계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처럼 절대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또 학교나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관계처럼 상대적인 관계도 있습니다. 하여간 관계를 떠난 삶은 결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도 이 관계를 잘 활용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을 따르게 된 빌립이 친구인 나다나엘을 찾아가 예수님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1장 45절 말씀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이 분명히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를 만났다"
그에 대해서 들었다거나 그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열망하던 메시야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빌립은 메시야를 만났다는 그 감격을 가지고 나다나엘에게 전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나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확실한 체험이 있을 때 제대로 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심각한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빌립의 전도를 받은 나다나엘의 반응이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 상반절)

나다나엘의 반응은 매우 냉소적이었습니다. 그는 편견이 심하고 자기 생각에 대한 고집이 센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무엇이든지 직접 확인하지 않고서는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인물은 설득하기가 참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자 빌립은 말문이 막혀버렸습니다. 그래서 빌립은 "와서 보라!"(요 1:46 하반절)고 나다나엘을 직접 예수님에게로 초청했습니다. 나다나엘이 보였던 냉소적인 반응을 볼 것 같으면 빌립의 초청도 거부했을 것 같은데 그는 빌립을 따라갔습니다. 왜 그가 빌립을 따라갔을까요? 아마도 그 까닭은 그들이 평소에 맺었던 친한 인간 관계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도 평소 인간 관계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라고 전도를 할 것 같으면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에 가기 싫다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사기를 당했다거나, 예수 믿는 사람들 때문에 금전적인 손해를 봤다거나, 아니면 예수 믿는 사람들로부터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미 심한 피해 의식을 갖고 있는 경우들은 어쩔 수 없다고 할지라도 이제부터라도 예수 믿는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좋게 바뀔 수 있도록 우리가 좀 더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감히 '우리를 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와서 보라!’고 할 때 그 옛날 나다나엘이 빌립을 따라갔던 것처럼 사람들이 우리의 말을 듣고 와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빌립의 초청을 받고 나다나엘은 그를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

우리는 앞에서 나다나엘의 인간성을 이미 평가했습니다. 매우 냉소적이요 또한 편견이 심하고 고집이 센 인물이라고 그를 평가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나다나엘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착하고 간사한 것이 전혀 없는 순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면이나 편협한 기질은 전혀 문제 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겉모습이 아니라 속사람, 즉 그의 중심을 보셨던 것입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 하반절 말씀에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러자 나다나엘이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요 1:48 상반절)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8 하반절)

무화과나무는 잎이 무성하고 그늘이 짙어 그 아래 앉아 명상하는 것이 그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의 관습이었습니다. 나다나엘도 무화과나무 아래서 성경을 묵상하며 약속하신 메시야가 올 때를 생각하고 그 때를 위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사실을 이미 알고 계신다는 사실 앞에서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다나엘아!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너를 알고 있었고, 네가 나를 찾기 전에 내가 너를 찾고 있었다. 진실하고 아름답게 살고 싶어하는 너의 중심을 나는 알고 있단다.'

그는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너를 보았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담겨져 있는 뜻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르고 계신 것처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쉽게 낙심하고 좌절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알고 계시되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십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의 심중을 깊이 통찰하고 계시는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시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 1:49)

과연 그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정말 정직하고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고백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속사람은 그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50절, 51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사람의 깊은 심중을 통찰하시는 것보다 더 큰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은 더 큰 일이라고 하면 인간적인 욕망이나 세상적인 욕구가 충족되는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불경기라고 해도 나만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을 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자녀들이 특목고나 일류 대학이나 대기업에 척척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노력은 별로 하지 않으면서 높은 지위에 올라가서 권력을 마구 휘둘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 밖에도 예를 들자면 한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더 큰 일이라는 것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더 큰 일이란 하늘이 열리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땅의 것만 생각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늘이 열릴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돌아갈 본향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자들이 예수님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방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보자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하반절)
우리에게 있어서 이 보다 더 큰 일은 결코 없습니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을 때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크리스찬은 싫어한다. 왜냐 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당신들이 믿는 신은 이웃 사랑을 가르치는데 당신들은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아서 그 나라 백성들을 괴롭히는가?"

영국이 인도를 무력으로 식민 통치할 때 비폭력 운동을 강조했던 간디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간디의 이 말은 스스로 크리스찬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꼭 물어야 할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빌립이 나다나엘을 포기했습니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님 앞으로 인도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 앞으로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주님과의 만남은 우리가 기대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일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토록 냉소적이었던 나다나엘도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 입으로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많은 영혼들을 생명의 주님 앞으로 인도함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변화를 직접 체험할 뿐 아니라 더 큰 일을 보고 또 그 일을 전하는 복되고 충성스러운 복음의 증인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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