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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 좋은 것을 바라보며 나아가자 (수 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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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좋은 것을 바라보며 나아가자 (수 5:10~12)
  

이삭은 37세 되던 어느 날 큰 슬픔을 당했습니다. 어머니 사라가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사라는 출산이 불가능한 90세의 고령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삭을 낳았습니다.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 이삭을 얼마나 사랑했을는지 능히 짐작이 갑니다. 그토록 사랑해 주시던 어머니를 잃은 이삭은 통곡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3년 후 이삭은 리브가와 결혼을 했습니다. 리브가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슬퍼하던 이삭에게 큰 위로와 기쁨이 되었습니다. 이 모습을 창세기 24장 67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떻게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아내를 통해 위로 받을 수 있는가? 자식 다 필요 없다>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닌, 인생의 순리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좋은 어머니라 하더라도 언제까지나 계실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돌아가실 것입니다. 그 다음엔 아내와 살수밖에 없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함께 사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순리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이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아내를 통해 위로 받은 것은 결코 불효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삭을 위하여 좋은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만약 이삭이 언제까지나 어머니 생각만 하고 우울증에 빠져 있다면, 그거야말로 심각한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이삭은 어머니를 잃은 대신에 아내를 얻었습니다.

인생은 언제나 <잃음과 얻음의 반복>이라고 생각됩니다. 때때로 우리는 소중한 것을 잃게 됩니다. 더 이상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것을 주셔서 누리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순간에 <잃은 것 때문에 아쉬워하는 우리를 위해 더 큰 기쁨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도 이런 경험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만나가 그쳤습니다. 그들은 감격적으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첫 발을 디뎠습니다. 그 곳이 <길갈>입니다. 거기서 유월절을 지키면서 가나안 땅의 곡식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날 아침 만나가 그치는 충격적인 일이 일이 있었습니다. 그 날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주리를 들고 들판으로 나갔을 것입니다. 여느 날 같으면 하얗게 만나가 내려 있었을 것이고, 그들은 그것을 거두어 음식을 해서 먹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그 날 눈을 씻고 보아도 만나는 없었습니다. 

바로 그 이야기가 본문의 내용입니다.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만나가 무엇입니까? 만나는 그들이 광야를 통과하는 40년 동안 먹었던 음식입니다. 그것은 땅에서 농사해서 얻은 것도 아니요, 돈을 주고 산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주신 기적의 음식입니다. 출애굽기 16장을 보면 최초의 만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때는 그들이 애굽에서 나온 지 <둘째 달 십오일>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들은 광야에 먹을 것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했고, 그 때 내려주신 양식이 만나였습니다.

만나가 내렸을 때 그들은 무엇인지 몰라서 물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만나란 말은 <이것이 무엇이냐>란 뜻입니다. 무엇인지도 모르는 신비의 음식, 기적의 음식이었습니다. 그들은 만나를 떡과 과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이 소중한 만나를 잊지 않기 위해 항아리에 담아 언약궤 안에 간직하였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그들을 40년 동안 먹여 살린 만나가 그친 것입니다. 그것도 잠시 그친 게 아닙니다. 12절의 말씀처럼 다시는 만나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만나를 먹을 때는 지겹게 느껴져 다른 음식을 찾곤 했는데, 이젠 그 만나를 다시는 먹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 때부터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것 대신에 땅에서 나는 것을 먹었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이런 일이 많습니다. 늘 보는 사람이기에 무심했건만, 그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됩니다. 늘 하던 일이기에 지루하게 여겼는데, 다시는 그 일을 할 수 없게 될 날이 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얻을 수 있는 것이기에 귀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다시는 얻을 수 없게 됩니다. 세상에는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잃었을 때, 그것을 다시는 얻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허전함과 아쉬움이 밀려올 때,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판단의 과제 앞에 서게 됩니다. 그 판단은 <무엇이 더 좋은가>하는 것입니다. 우선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만나가 좋은가, 가나안의 곡식이 좋은가?> 또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꿀 수도 있습니다. <광야가 좋은가, 가나안이 좋은가?>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여기서 헷갈리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나는 하늘에서 내린 기적의 음식인 반면, 가나안의 곡식은 땅에서 난 평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만나가 더 좋다고 말할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늘 기적을 대단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건 정답이 아닙니다. 정답은 가나안의 곡식입니다. 가나안의 곡식이 만나보다 더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기적의 음식을 먹은 광야보다 가나안이 더 좋은 곳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물론 광야는 기적의 땅이었습니다. 만나가 내리고,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그들을 보호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광야는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통과하는 곳에 불과했습니다. 반면에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한 축복의 땅이요, 목적지입니다. 광야에서 그들이 체험한 기적들은 그들을 무사히 가나안으로 가게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마치 가나안이 사랑하는 가족들이 기다리는 가정이라면, 광야는 여관과 같습니다. 아무리 여관집 밥이 맛있다 한들, 가족과 함께 하는 가정의 식탁에 비기겠습니까? 그러니 아무리 만나가 귀하다 한들 가나안의 곡식에 비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만나가 그쳤을 때, 그들은 만나를 다시 먹을 수 없게 되어 아쉽지만 더 기뻐할 가나안의 곡식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했습니다.   

소중한 것을 잃게 되는 아쉬운 순간에 그 다음 축복을 바라보는 것,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인생의 원리 중의 하나입니다. 엄마의 젖에 매달려 사는 아기는 엄마 젖이 더 나오지 않는다고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엄마 젖이 그쳐야 아기는 이유식을 먹고, 언젠가는 밥을 먹고, 딱딱한 음식도 섭취하여 건강하게 될 것이요, 세상의 온갖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될 것입니다. 엄마의 젖이 마른 것이 아쉽지만, 밥이 더 좋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마십시오. 때로 그것을 잃는 날이 온다고 하더라도 슬퍼하지만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다음에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그 다음 것>을 준비하시는 아버지입니다. 만나를 그치게 하신 대신 가나안의 곡식을 먹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그 다음 선물을 준비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신앙 생활도 그렇습니다. 처음에 교회 오시면 이것저것 잘 안내해 드립니다. 그러다가 몇 주간 지나면 더 이상 안내를 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젠 교회에서 무관심하다고 섭섭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린 아이처럼 인도해 드려야 교회에 오실 수 있는 것보다 홀로 스스로 예배에 오셔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더 큰복입니다. 누가 일일이 보살피지 않아도 스스로 설 수 있고, 오히려 다른 분들을 인도해 올 수 있는 성숙한 교인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간도 그렇습니다. 시간은 한 번 지나가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가끔 <만약 과거를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해 봅니다. 그렇다면 해 보고 싶은 것이 참 많습니다. 

저는 영등포의 영은 교회 근처에 다시 가보고 싶습니다. 지금은 아파트촌이 되어 완전히 달라진 그 길거리에 많은 추억이 서려 있습니다. 또 지금은 헐려 없어진 모 교회의 오래된 예배당 기도실에 올라가 보고 싶습니다. 그 삐그덕거리던 나무 계단을 올라 기도실 창가에서 서서 달리는 기차들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고등부 토요 집회가 열리던 스레트 지붕의 작은 예배당 그 좁은 의자에 다시 한 번 앉아 보고 싶습니다. 땀 냄새를 풍기면서 교복 호크는 풀어 헤친 채로, 모자는 삐딱하게 쓰고 들어와 옆에 앉던 친구의 그 때 모습이 보고 싶습니다. 성탄 이브에 가슴 설레는 마음으로 카드와 선물을 준비하여 모여들던 소박한 파티자리에 다시 가보고 싶고, 파티가 끝나면 뽀드득 뽀드득 눈을 밟으면서 새벽송을 부르며 밤길을 걷던 때로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습니다. 

이런 생각이 어찌 저 뿐이겠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다시는 할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보고만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돈으로 되는 것이라면 재벌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며, 지식으로 되는 것이라면 석학들이 보고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시는 얻을 수 없는 것, 더 이상 우리 손에 주어지지 않을 것 때문에 슬퍼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 인생에 만나가 그칠 때 우리는 가나안 땅의 곡식 자루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이젠 만나에 길들여진 입맛을 가나안의 곡식으로 만든 새로운 음식에 맞춰야 합니다. 아쉽지만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더 좋은 것들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더 이상 과거를 돌아보지 마십시오. 만나 시대를 그리워하지 마십시오. 이젠 가나안 시대, 미래를 향하여 사십시오. 시간은 마치 물과 같습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도록 되어 있고, 그것은 철칙입니다. 마찬가지로 시간은 미래를 향하여 흐르도록 되어 있고, 그것 역시 철칙입니다. 그러므로 흘러간 과거 때문에 슬퍼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제부터 앞으로 다가올 기쁨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이렇게 말씀드린다고 해서 과거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과거는 매우 소중합니다. 과거는 무한한 감사의 조건이 숨쉬고 있는 박물관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가 있었기에 광야를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만나가 없었다면 그들은 광야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만나를 얻을 수는 없지만, 만나를 마음에서 지워서는 안 됩니다. 만나를 가슴에 품고, 그 만나를 주신 하나님께 대하여 언제나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과거를 폄하해서도 안 됩니다. 과거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조건으로 영원히 가슴에 품어야 합니다. 역사를 보는 눈도 그렇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가 있었기에 오늘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시대를 통해 경제 발전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아울러 박정희 대통령 시대가 아무리 좋았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권위주의 시대를 극복하고 새로운 민주적 사회로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순리인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과거를 소중히 여겨 감사하면서, 아쉽지만 과거를 넘어 더 큰 축복으로 나가는 원리>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율법과 성전과 제사장을 소중히 여겼어도, 예수님께서 오신 후 그것들은 사라져야 했습니다. 이젠 지켜서 구원받는 율법을 포기하는 것이 아쉽지만,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는 더 큰복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성전과 제사장, 거기서 드리는 제사를 포기하는 것이 아쉬워도 이젠 제사 대신 예배, 인간 제사장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야 했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과거에 집착했습니다. 언제나 만나만 바라보았습니다. 그게 그들의 실패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참된 제사장이요, 구주로 믿었습니다. 구원이란 인간의 힘으로 율법을 지켜서 얻는 게 아니라, 은혜로 예수님을 믿어서 얻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더 큰복이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떠나실 때도 그렇습니다.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 얼마나 섭섭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 무릎 앞에서 어리광이나 부릴 때가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하여, 부활에 대하여, 감사하면서, 이제 성령 안에서의 삶을 향해 나가야 했습니다. 그들은 의연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락방에서 기도에 힘썼고, 하나님이 주신 더 큰 은혜인 성령 충만함을 받아 위대한 복음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들 곁에 계속 계셨다면 그들은 그렇게 성숙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흥사경회가 끝났습니다. 부흥사경회는 이스라엘이 기적을 맛본 광야와 같습니다. 이번 부흥회를 통해 교우님들이 평소에 가지지 못한 많은 영적 체험을 했습니다. 뜨거운 눈물의 기도, 예배당이 떠나갈 정도의 큰 아멘 소리가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방언의 입술이 열리고, 어떤 분은 질병으로부터 치유를 받았습니다. 어떤 분은 하루 세 번 집회를 하면서 천국에 있는 것 같아 너무 좋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집회는 끝이 났습니다. 이젠 기적의 광야에서 일상의 가나안으로 나가야 합니다. 만나를 먹은 힘으로 가나안을 향해 나가듯이, 받은 은혜를 가지고 축복된 미래를 향해 나가야 합니다. 이제부터 열심히 직장 생활을 하십시오. 더 알뜰하게 가정 살림을 하십시오. 일상에서 늘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십시오. 평소의 경건 생활에 힘쓰십시오. 은혜를 생활화하십시오. 하늘의 만나만 바라보지 말고, 가나안의 곡식을 얻기 위하여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으십시오. 

그리고 방언도 중요하고, 예언도 중요하고, 치유도 중요하지만, 그것들은 광야의 기적과 같은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정말 중요한 것, 우리에게 가나안과 같은 것은 사랑임을 잊지 마십시오.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그러다가 이 세상의 삶이 끝나는 날이 올 때, 사랑하는 이들이 있는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쉽지만, 그러나 더 좋은 것, 영원한 생명의 나라, 천국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아쉽지만, 더 좋은 것을 바라보면서 날마다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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