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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영원한 집 (고후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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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영원한 집 (고후 5:1~7)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보면 주인공은 IQ가 75가 되지 않는 사람인데 그렇지만 그는 베트남전에 나가서 전쟁영웅이 돼서 돌아오고 또 미국 최고의 탁구선수가 돼서 핑퐁외교를 하러 중국에 가기도 하고 멕시코 만에서 새우 잡이로 갑부가 됩니다. 그리고 대통령도 여러 번 만납니다. IQ가 평균보다 낮은 사람치고는 상당히 성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 어머니에게 ‘내 인생의 의미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내 인생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미 거둔 성공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는 얘기입니까. 그러니까 그런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아마 보통 어른이라면 민망해서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레스트 검프이기 때문에, 순수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질문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정말로 자기가 물어보고 싶은 것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물어보지 않습니다. 아내에게도 물어보지 않고 부모에게도 물어보지 않고 마음속에만 그것을 간직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사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어머니에게 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닙니다. 어머니가 답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어머니도 알지 못하고 아버지도 알지 못합니다. 인생에 대한 질문은 하나님만이 답해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면도 있지만 인간을 알게 되는 면이 더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인간을 알게 되고 인생을 이해하게 되고 왜 살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알게 되는 면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저희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인가 2학년이었던 제 아이가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캐나다에 갔다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참 불쌍해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왜 불쌍하시니?’ 
‘할아버지는 이제 맛있는 것도 못 드시고 재미있는 일도 못하시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아, 나는 이런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참 행복해!’ 그러면서 먹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재미있는 일을 하면서 인생을 실감합니까? 그럴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제 신학교 친구 하나는 여자 친구와 디즈니랜드에 갔다가 거기서 서로 갈라섰습니다. ‘The happyiest place in the world-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이다’ 그게 디즈니랜드에요. 그런데 거기서 서로 싸워서 거기서 갈라섰으니… 인간은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고 인생마저도 맛있어지는 것이 아니고 재미있는 일을 한다고 인생마저도 재미있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생존하는데 필요한 것이 의식주라고 하는데 아무리 배부르게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자동차를 굴리더라도 그것으로 존재의 해답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은 아닙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람과 짐승의 차이점을 찾는지도 몰라요. 

세계적인 음악가인 에릭 클랩톤이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세계적인 스타이고 돈을 엄청 벌고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내 옆에 두어도 나는 늘 죽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 그래서 그는 마약 중독자에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에릭 클랩톤에게 우울증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가 우울증을 앓았기 때문에 인생의 고민을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느낀 것입니다. 인생의 고민을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느끼면서도 그냥 넘어갈 것을 에릭 클랩톤은 우울증을 앓았기 때문에 더욱 거기에 대해서 깊이 정직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그야말로 인생을 더 정직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번민 자체는 괴로운 것이지만 거기에는 부수적인 유익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애통하는 것이 뭐가 복입니까. 그러나 애통해봤기 때문에 위로라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애통해봐야 위로라는 것이 있고 나아가서 위로하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설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인 현상 속에서 우리는 인간이 스스로 찾을 수 없는 해답을 인간 밖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고 그게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입니다. 클렙톤은 그래서 자기와 같은 중독자를 위해서 갱생센터를 짓기도 했습니다. 

세상사는 모든 사람들이 이런 고민을 하느냐?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사람들 중에는 별로 심각한 생각을 하지 않고 고민도 하지 않고 관심도 갖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은 거기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교회를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자기 발로 오든 누구에게 끌려서 오든 간에 사람이 교회에 오고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육신적으로 채울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육신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교회에 오고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아무리 친구가 많고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허전하다는 사실, 고독하다는 사실, 뭔가 채워지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 이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만드는 것이고 신앙을 찾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뭔가 해답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을 언제 가장 확실하게 느끼느냐면 우리가 추구하던 것을 얻을 때입니다. 소원을 이루고 성공을 거두고 원하는 것을 갖게 될 때, 그때 오히려 허무감을 느낍니다. 이게 다란 말인가. 이것을 얻기 위해 내가 그동안 그렇게 애를 썼다는 말인가. 여기에서 허무함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제가 한번은 새벽기도 시간에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 목회에 성공을 가져다주십시오.’ 좀 부끄러운 기도입니다. 그러나 제 솔직한 생각이 그랬으니까 제 목회에 성공을 가져다 달라고 기도했는데 바로 그날 저녁에 다른 교회 장로님을 만날 일이 있었는데 그분이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면서 ‘아, 목회에 그렇게 성공하셨으니 축하드립니다.’ 그러더라구요. 하나님의 응답이 즉각 임한 것입니다. 

그날 새벽에 성공을 달라고 했는데 그날 저녁에 어느 장로님이 성공하셨으니 축하드립니다, 그 순간에 어떤 생각이 들었느냐면 ‘하나님이 네가 성공 달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남의 입으로 네 성공을 확인하게 했으니 됐지 않았느냐’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아, 인생의 성공이라는 것이 이렇게 잠깐 왔다가 가는 것이라면 우리가 이런 것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쓴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생각이 들면서 적어도 남의 눈의 성공은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스스로 이것을 성공적이라고 생각해야 되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성공이어야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내가 봤을 때 성공이어야 되고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성공이라고 여겨주시는 것,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 그것을 그냥 보면 예수님은 실패자입니다. 버림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사람의 눈으로 봤을 때, 믿지 않는 사람,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봤을 때의 이야기이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셨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성공이고 순종이고 그게 의와 율법을 이룬 것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켰다는 거기에 최종적인 그 판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기 전까지는 우리 인생을 다 파악할 수 없습니다. 내가 돈을 얼마나 벌었든 내 소원이 얼마나 이루어졌든 간에 결국 우리에게 주어졌던 이 시간, 우리 인생을 내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기 전까지는 다 알 수 없어요. 하나님의 입으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말씀하시든 아니면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말씀하시든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부분입니다. 할렐루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오늘도 노력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인들에게도 기뻐야 되지만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어야 됩니다. 내 삶이, 내 자식이, 우리 가정이, 내가 하는 일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기쁨이 될 수 있다면 우리에게도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올 때 한 별이 그들을 앞서서 인도했다고 했습니다. 그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별에게 간 것은 아닙니다. 베들레헴으로 갔지, 별의 인도를 받는다고 별을 향해서 간 것은 아닙니다. 베들레헴을 향해서 간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도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에게 가는 것은 아니에요. 이 땅에서 우리의 갈 길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백성이 된다고 해서 당장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이 땅에서 우리의 갈 길을 알고 우리가 해야 될 일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이 땅에서 천국백성으로 산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이 자라고 또 성령을 좇는다고 해서 천사가 되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는 여전히 사람입니다. 다만 좀 더 참된 사람다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좀 더 인간답게 하나님이 원래 계획하신 인간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좀 더 기뻐하고 또 서로 나누고 또 사랑하고 사랑을 주고받고 감사하고 섬기고 창조적이고 이러한 삶을 사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라날수록 우리는 좀 더 우리의 삶이 풍성해지고 복되고 보람 있고 의미 있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좀 더 사람답게 사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이것은 신명기에 있는 말씀을 예수님이 인용하신 것인데 예수님이 그것을 말씀하심으로써 더 새롭고 큰 의미를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떡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떡이 필요합니다. 떡만 필요한 게 아니에요. 고기도 필요하고 좋은 옷도 필요하고 편안한 집도 필요하고 다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그 필요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연연해 할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만 연연하게 되면 이멜다 마르코스처럼 됩니다. 

이멜다 마르코스가 도망갈 때 구두만 삼천 켤레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삼천 켤레, 도대체 이멜다 마르코스의 발이 몇 개인지 알고 싶어요. 도망갈 때 신은 구두를 빼고 삼천 켤레를 놓고 도망갔어요. 도대체 사람에게 몇 켤레의 구두가 있어야 족하다는 얘기입니까. 이멜다 마르코스가 누구에게 보이려고 그렇게 많은 구두를 가졌다는 얘기입니까. 그러니까 가져도 그게 충분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무리 가져도 충분하게 생각되지 않은 것입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입니다. 가져도, 가져도 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입니다. 이게 인생이에요. 육신을 좇아 살게 되면 이렇습니다. 

가지고 즐기고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면 점점 더 그 기준이 올라가서 전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야 똑같은 쾌감을 얻게 되는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데 여기에는 끝이 없습니다. 어느 억만장자에게 신문기자가 물었습니다. ‘사람은 얼마만큼의 돈을 가지면 족합니까?’ 그랬더니 억만장자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세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져야 된다.’ 그러니까 영원히 거기에 이르지 못한다는 얘기입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러다가 하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인생을 하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every word that comes out of the mouth of God’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대부분의 말씀이 아니고 적당한 양의 말씀도 아니고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전문적으로 배워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마추어 식으로 배워서는 안되고 구약과 신약, 66권을 우리의 영혼의 양식으로 만들어서 이 말씀에 대해서만큼은 어느 누구에게도 필적할 만큼,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의 영혼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떡은 육신의 양식입니다. 떡이 필요하지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육신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영혼이 있습니다. 이것은 두 단어를 합친 단어인데 영과 혼, 영은 spirit 혼은 soul, 그런데 우리는 무속신앙의 영향으로 영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영적이고 꿈을 꾼다든가 예언을 한다든가. 그러나 혼은 인간의 양심, 인격을 포함합니다. 사람을 사람 만드는 것은 그가 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양심, 그래서 양심이 나를 정죄하든 칭찬하든 그런 것입니다. 파우스트가 마귀에게 자신의 영혼을 판 것처럼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판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팔았어요. 인간은 영혼에 대해서 정직하고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되지만 먼저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됩니다. 왜냐하면 남은 속일수가 있어도 자신의 영혼은 속일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 자신을 그대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 영혼을 속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혼,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든가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든가 이게 다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을 하면 마음이 기쁘고 나쁜 일을 하면 괴롭고 그게 다 영혼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는 날이 온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여기에서 장막을 거둔다고 하지 않고 장막이 무너진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장막을 거두는 것처럼 그렇게 할 수 없고 무너집니다. 기대하지 않던 날에 기대하지 않은 방법으로 급작스럽게 다가오기 때문에 장막을 거두는 식으로 여유 있게 세상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이건 무너지는 식으로 갑자기 일어나는 것입니다. 학교도 방학하는 날이 오고 백화점 세일도 끝나는 날이 오고 또 TV 드라마도 종영하는 날이 오는 것처럼. 학교가 방학하면 그전까지 와글와글하던 학교가 적막강산이 됩니다. 우리의 육신의 장막이 무너질 때도 마찬가지에요. 적막해집니다. 
  
학원이 밀집돼 있는 동네에 가면-저도 제 아이 때문에 갈 때가 있는데- 학원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자동차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자녀들을 데리러 온 부모들입니다. 아이들이 학원이 끝나면 건물 밖에 나와서 두리번거리다가 엄마 자동차를 보면 신나서 뛰어갑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들은 한참 서서 두리번거립니다. 부모가 늦었거나 잊어버렸거나. 그러면 터벅터벅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면 되지만 만약에 돌아갈 집이 없는 아이라면, 그리고 집에 돌아가도 밥을 해줄 어머니가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처량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기다려 주는 사람이 없고 마중 나오는 사람이 없을 때 처량합니다. 우리의 육신의 장막이 무너질 때 아무도 우리를 맞아주지 않고 기다려주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처량한 인생이고 고독한 영혼이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갈 데가 없다면 무서운 것을 떠나서 그건 고독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이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고 다시 오리라’ 할렐루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하여, welcome, 어서 오너라!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예수님을 영접해서 환영하고 ‘예수님, 어서 오십시오. 예수님, 어서 들어오십시오.’하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예수님이 ‘어서 오너라.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하고 우리를 영접해 주십니다. 지옥은 궁극적인 고독을 뜻하는 것이고 천국은 사랑의 완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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