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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갖자 (빌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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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갖자 (빌 1:3~8)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생각할 때마다

기억은 또 하나의 만남입니다. 직접 만나서 부딪히고 함께 있을 때는 몰랐는데 서로 떨어져 기억으로 만날 때는 또 다른 느낌을 가져다줍니다. 그 사람의 아름다운 면이 떠오르고 그 사람이 그리워집니다. 부부 간이나 부모 자식 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얼굴로 맞대어 볼 때보다 우리는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 편지나 글을 통해서 상대방을 기억할 때 더 친밀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물론 기억이란 것이 완전하지 못하거나 일방적으로 자신이 조작한 방향으로 흐르는 경향도 있지만 이것은 기억의 부정적인 면의 일부일 뿐입니다. 기억은 직접 맞대할 때 우리 감정과 욕구로 말미암아 발견할 수 없었던 상대방의 아름다움과 그 만남의 기쁨을 재현하여 관계를 깊게 하는 순기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 서로를 기억으로 만날 때도 필요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서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또 그 때가 얼마나 감사한 상황이었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작은 교회에서 만나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언젠가 우리에게도 이때가 그리워질 것입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 부족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면도 있지만 미래의 어느 때엔가는 사실 그때가 가장 순수했었다고 기억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만났던 사람들이 소중했다고 생각하며 미소를 띠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지금 서로 치열하게 만나는 것입니다. 방관자로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기억 속에서 지워지고 맙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무관심은 기억에 가장 큰 해악입니다.

우리가 이곳으로 이전해 오기 전에 한 2년 정도 방배동에 있었습니다. 방배동에 있으면서 가장 생각나는 분이 한 분 있습니다. 그분은 80대의 할머니 권사님입니다. 이름도 참 신실함이 넘쳐나는 분이셨습니다. 백신실 권사님입니다. 이분은 다른 교회에 다녔지만 저희가 개척교회 한다고 늘 안쓰러워하시면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다.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고 자리를 지켜주셨습니다. 틈틈이 아이들 먹으라고 과자를 사주셨고, 저희 부부를 불러 돈까스를 사주시기도 했습니다. 

이곳으로 이사 오면서 제일 마음에 걸렸던 것이 바로 이 분이셨습니다. 주변에 교회가 많지 않았고 또 다리가 불편하셔서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든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들어올 수 있는 교회가 우리 교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사 가면 이분이 어디서 새벽기도를 드리나 하고 마음에 걸렸습니다. 새벽기도 멤버가 두 분이 더 있었는데 한 분은 남자 집사님이었고 다른 한 분은 우유 배달하시는 순복음 교회 권사님이셨습니다. 

남자 집사님은 서너 정거장 되는 거리를 걸어서 새벽기도에 참여해 주셨고, 여자 권사님은 새벽마다 오토바이를 끌고 일하시는 중간에 기도하러 오셨습니다. 생각할수록 고만운 분들입니다. 그냥 스치고 지나갈 수도 있지만 이 분들이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만나주니까 제가 기억하게 된 것이고 이 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게 됩니다. 

여러분 현재 우리가 만나고 있는 만남을 피상적으로 갖지 마십시오. 소중하게 여기고 그 만남을 치열하게 가지십시오. 그러할 때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서, 아니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기억 속에서라 말하고 싶은데 그 기억 속에서 아주 소중한 사람들로 남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적이지 않습니다. 바로 빌립보 교인들 때문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3절의 고백처럼 바울이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고, 간구할 때마다 속에서 기쁨이 솟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기쁨으로 가득한 사도 바울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누가 여러분을 생각할 때 기쁨이 떠오르게 하는 존재입니까? 아니면 생각하기도 싫은 존재입니까? 여러분에게는 가끔 생각할 때 기쁨으로 가득하게 만드는 얼굴이 있습니까? 또는 그러한 때가 있습니까? 그런 추억이 많고 그런 사람들이 많은 사람이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마치 기억의 창고에 풍부한 보물을 쌓아두고 있는 사람과 같다할 할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사도 바울에게 이처럼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까닭은 5절에 나와 있습니다.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하고 있다는 말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빌립보는 매우 특별한 곳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1차 선교는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선교했습니다. 2차 선교는 사도 바울 단독으로 했는데 원래는 아시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지만 성령이 막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마게도니아 사람의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16:9)는 말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배를 타고 유럽, 그리스 지역으로 건너갔습니다. 

후에 역사가 토인비는 그의 책에서 이 사도 바울을 싣고 가던 배는 유럽의 운명을 바꾼 배였다고 기술하였습니다. 바울이 그리스 땅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교회를 개척한 곳이 바로 이 빌립보 교회였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빨래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기도처를 찾았던 바울 일행은 강가에서 자주 장사 루디아를 만나게 되고 그녀가 세례를 받으면서 그 루디아의 집이 바로 교회가 되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1절의 인사에서 볼 수 있듯이 감독과 집사까지 세울 정도로 부흥하고 열심히 봉사하는 교회였습니다. 특히 그들은 사도 바울의 선교를 많이 도왔습니다. 빌립보서 4장 15절과 16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감사하기도 하였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빌4:15-16) 

사도 바울은 자비량 선교로 유명합니다. 천막 짓는 일을 하면서 자기 쓸 것을 자기가 스스로 벌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도 바울이 전적으로 도움을 받은 교회가 있는데 바로 빌립보교회입니다. 그들은 복음의 시초부터 바울을 도왔습니다. 인근의 데살로니가 지역을 선교할 때도 바울을 도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에서도 이렇게 칭찬합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8:1-2) 

빌립보 교회에 환난의 많은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쁨이 넘쳤습니다. 저들은 극히 가난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연보를 풍성함을 넘어 넘치도록 하였다고 칭찬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위하여 에바브로디도라는 사람을 보내어 시중을 들게 하고 또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이들은 이제 고난까지도 나누어 가지려 합니다. 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이들은 사도 바울이 옥에 갇히고 재판을 받으면서 복음에 대해서 변론하고 확증할 때 그들도 함께 동참했다고 합니다. 어떻게요? 그들은 물질적 도움으로, 기도로 중보함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이 일은 바울을 얼마나 든든하게 했는지 모릅니다. 누가 나를 기억해주고 멀리서라도 지지해준다는 사실이 얼마나 우리를 든든하게 합니까?

이것이 바로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 안에서 이루어진 교제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고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기쁨이 넘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결코 홀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함께 하는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선교사들은 더 그러합니다. 먼 곳에서 복음을 전하지만 본국에서 그들을 후원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동역자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인간에게는 절대적이지만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로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담에게는 하나님도 있었고 동물들도 있었고 해야 될 일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창2:18)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에게는 그래서 가정이 필요하고 교회가 필요하고 동료가 필요합니다. 프란치스코도 성자였지만 그도 함께 하는 ‘잔 꽃송이들’이라 불리는 형제들이 없었다면 성인의 길을 걷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루터도 종교개혁을 하였지만 그와 함께 하고 그를 도왔던 동료들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은 실패로 끝났을 것입니다.

5절에서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라고 할 때 교제는 헬라어로 ‘코이노니아’입니다. 7절에서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할 때 참여라는 단어에도 ‘코이노니아’ 라는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서로 마음을 나누고 서로 물질을 나누고 또 서로 기도하는 것 이것이 코이노니아, 곧 교제입니다. 

우리가 서로 마음을 나누고 있습니까? 그러면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하여 기도합니까? 그러면 코이노니아 입니다. 우리가 서로 좋은 것을 나누고 서로 어려울 때 물질을 나눕니까? 그러면 코이노니아 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이런 아름다운 코이노니아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사도신경을 고백하며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교통이 바로 코이노니아 입니다. 코이노니아가 없는 것은 올바른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폴 투르니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 둘 있다. 하나는 결혼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나의 일대일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곳이 아닙니다.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의 모임이 곧 교회입니다. 성도들 간에 코이노니아가 있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는 우리 신앙 성장을 위해서도 함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홀로 떨어진 고고한 영혼은 홀로 타는 석탄과 같다. 그 불길은 이제 식는 일만 남았다. 더 이상 뜨거워지지 않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같은 복음의 동역자들이 있었기에 감옥이라는 극한 시련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바울은 이런 선한 역사를 시작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다고 고백합니다. 6절입니다. “너희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이는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며 모든 것을 시작하시고 계획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내 뜻 내 의지, 어떤 우연적인 일로 인하여 빌립보 교회가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복음 안에서 행한 모든 수고 또한 그들의 수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일이 이루어지던 그때는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든 이루어진 것은 하나님의 계획임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잘 보이지 않아 혼동 가운데 있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지만 그 안개가 걷힌 연후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뚜렷이 알게 될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예수를 믿고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자기 의지가 아니라 창세전에 이미 예정하신 일이라고까지 고백합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1:4) 나는 어느 날 생각 없는 부모 밑에서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이 날 이 때 내가 구원받을 것이며 하나님의 하실 일을 정하셔서 태어나게 하셨다는 고백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를 얼마나 든든하게 합니까? 혼란 가운데 결정한 것처럼 보였는데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이며 하나님께서 이미 시작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라는 선한 역사를 이루신 분도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내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자기 일을 가볍게 대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께서 소원을 우리에게 두시고 행하시는 거룩한 일입니다. 내 마음에 소원이 있고, 내가 그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바입니다. 가볍게 대하지 마십시오.

또한 그 때문에 부담을 갖지 마십시오. 그 일을 이루실 분은 바로 그 일을 시작하신 주님이십니다. 바울은 6절에서 또한 이렇게 고백합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어떻게 해요?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이루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염려할 것 없어요. 하나님의 이름은 처음과 나중이요,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시작하신 분도 하나님 마치시고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교회 일을 하다가 어려움에 부딪혔습니다. 밥 맛이 싹 달아날 정도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기도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이 교회가 누구 거지? 당연히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해결해야 될 분은 누구지? 논리적으로 따지면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그 목사님에게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이분이 기도를 바꾸었답니다. “예수님 당신의 교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가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이런 마음을 먹자 마음에 평안이 임하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막힌 길도 주님께서 열어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확신을 가지십시오. 이 일을 끝까지 이루실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공의 부담을 덜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을 이루실 분도 주님이시요, 주님께서 이 일을 이루어지지 않게 하신다면 그것도 주님의 책임입니다. 다른 더 좋은 뜻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열심히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기도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두려움으로가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할 것입니다. 주님은 오케스트라 지휘자요, 연극의 감독입니다. 그리스도의 날까지 주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실 것이고 우리는 주님께서 맡기신 역할만 충실히 맡아서 하면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리스도 예수의 날은 곧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종말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종말을 그리스도의 날이라 부릅니다. 그날은 단순히 심판의 날이거나, 우주가 개벽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만들어지는 날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실상 결혼한 부부를 위한 신혼집에 불과합니다. 결혼식은 그 화려함 때문이 아니라 신랑과 신부가 만나 이제 부부로 맺어진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천지개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곳뿐만 아니라 1장 10절에서도 2장 16절에서도 그 날을 ‘그리스도의 날’이라 부릅니다.

여러분 우리 시대에 종말이 올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 개인적 종말, 곧 죽음의 날은 반드시 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날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죽는 날, 소천, 장례, 별세......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날입니다. 하나님 품속에서 영원히 안식하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보며 그분과 영원히 함께 하는 그리스도의 예수의 날입니다. 죽음 이후는 허무와 무로 가득한 것이 아니라 희망과 생명으로 가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빌립보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사랑은 매우 지극합니다. 8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여기 심장으로 번역한 헬라어 단어는 정확히는 심장을 비롯한 모든 ‘내장, 장기’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는 ‘그리스도의 애끓는 심정으로’도 번역이 가능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열정으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심장이 뛰는 것이고, 또 사랑하기 때문에 속이 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러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은 어떤 심장입니까? 예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군병들이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는데 그곳으로부터 피와 물이 다 쏟아졌습니다. 결국 자기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하는 사랑이 바로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하는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온 인류를 사랑하셨듯이 자기도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하며 하나님 그 증인이라고까지 확신 있게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심장을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바꾼 사람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서는 “너희 안에 이 마음,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합니다. 3장 8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여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버렸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의 심장과 그의 마음과 그의 생각과 두뇌 모든 욕망마저도 그리스도로 바꾼 사람입니다. 

라이트푸트라는 사람은 1장 8절을 주석하면서 신앙인이란 어떤 존재인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신앙인은 주님과 다른 열정을 가지지 않는다. 신앙인의 맥박은 주님의 맥박과 같이 뛴다. 신앙인의 심장은 주님의 심장과 같이 고동친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심장은 누구의 심장입니까? 우리의 뇌는 누구의 뇌입니까? 우리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함께 기뻐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함께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생각과 같은 생각을 품고 있습니까? 크리스찬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고 그리스도가 그의 전부가 된 사람입니다. 오늘날의 시대의 문제는 피상성입니다. 자기 중심을 바꾸지 않습니다. 자기유익이 되는 것만 받아들이고 자신은 변화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그 중심을 내어드리지 않습니다.

초기 한국개신교 선교사였던 헐버트가 한국인의 종교의식 구조에 대해서 이렇게 분석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인은 사회적으로는 유교적이며, 철학적으로는 불교적이며, 밑바닥에는 샤마니즘이 자리잡고 있다” 참으로 통찰력 있는 지적이라 할 것입니다. 이중 가장 강력한 것이 샤마니즘적 정서입니다.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며 불교 유교가 득세하였지만 우리 심성을 지배했던 것은 샤마니즘이었습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샤마니즘은 기독교 안에서 다시 둥지를 마련하였습니다. 샤마니즘은 다른 것이 아니라 기복종교입니다. 자기를 바꾸지 않고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것만 흡수하는 이기주의 괴물입니다. 야곱처럼 자기만 압니다.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환도뼈가 부러지고 이스라엘로 변하듯이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나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로 가득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낮아지고 가난해졌듯이 우리도 겸손하고 가난한 자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우리의 심장이 그리스도의 심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인간들을 사랑하여 자기를 내어주었듯이 자기를 희생하고 내어주는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영광만을 위해서 살았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의 뜻과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은 실상 가장 행복한 일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자라간다는 것은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가는 길입니다. 금년 한 해 그리스도를 많이 닮는 한 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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