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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결코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행 18: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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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행 18:5~11)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 기억이 생생하지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어느 평범한 사람이 우연히 산 로또 복권 100억에 당첨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행복할 가능성보다 자살할 가능성이 일반 사람보다 훨씬 더 높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보통 사람들의 경우 식당에 가서 친구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 김치찌개 백반이나 자장면 정도가 행복의 수준인데 갑자기 100억 원의 돈이 생기면서 그 때부터는 호텔에 가서 뷔페는 먹어야 하고, 차도 이제는 3000CC이상은 되는 차를 몰아야 하고, 옷도 명품만 입어야 하는 수준으로 격상될 터인데 그러면 좋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와 함께 했던 공동체의 사람들이 단절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나와는 수준 차이가 나서 같이 못 놀겠다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물질의 풍요로움으로는 인간을 만족시키는 것이 한계가 있고 결국은 공동체에서 함께 부대끼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단절됨으로서 외로움의 극치를 경험하게 되고 그것이 극단화되면 잘못하면 자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는 그런 논리입니다.

이러한 이론이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되는 것은 분명히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설득력이 있는 이론일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외로움은 정말로 힘이 든 고통 중에 하나 일 것입니다.

저는 가끔 성경에서 마태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던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는 세리를 통해 얻는 교훈이 생각이 납니다.

막 2:14절입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조금 깊게 생각을 해 보십시다.
당시에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당시의 세리는 로마 당국이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걷기 위하여 세금 징수권을 돈을 받고 팔았는데 그 징수권을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느 한 지역에 세금징수권을 주면 얼마를 내겠냐고 입찰을 해서 최고낙찰가를 써 낸 세리에게 팔았습니다.
그런 세금징수권을 사서 영업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세리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세리는 국가로부터 세금징수권을 사면서 돈을 국가에 납부한 다음 그 지역의 사람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합니다.

그들은 투자 한 것이 있기에 그것보다 더 큰 이득을 얻기 위하여 법이 허용하는 테두리 내에서 최대한의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세금을 거둬들이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돈에 미쳐 있는 세리들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었고 당연히 세리들에 대한 인식은 최악일 수밖에 없었고 그들을 매국노로 몰아붙였고 그들을 사람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이들은 상당수의 부를 갖고 있기는 했지만 철저하게 동족에게 외면을 당하고 왕따를 당하던 신세들이었습니다.

삭개오도, 알패오의 아들 레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렇게 외면을 당하고 외로움에 지쳐 있는 마태에게 예수님께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상당수가 같이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향하여 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송을 받기도 하고,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기도 했다는 예수가 지금 자기에게로 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한 마디에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질시는 엄청나게 힘이 들고 고통스러운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알패오의 아들 레위는 더욱 두껍게 자기를 방어하기 위하여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예수의 한 마디가 던져지면 더욱 강하게 대항할 것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를 하면 열 마디로 갚아 주리라 마음을 다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자기 앞에 선 예수께서 입을 열어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나를 따르라’

너무나 뜻밖의 외침이었습니다.
영적으로 갈급하고 있었던 마태의 모든 부분을 완전히 날려버리고 해결하는 단 한 마디였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 명령에 너무나 감격한 마태의 그 다음의 행위를 마가는 아주 드라마틱하게 그러나 너무나 단순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어나 따르니라’

저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의 기사를 읽을 때마다 받는 감동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은 외로움이라는 두려움이다.”

확실한 감흥입니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동의합니다.
오늘 저는 본문의 내용을 통해 저의 감흥과 동의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본문에는 정말로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담대한 사도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가장 고통스러운 외로움이라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울입니다.

바울이 외로움이라는 두려움과 싸우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바울 사도가 두려워하며 세상에 그 누가 두려워하지 않을 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을 상세하게 살피면 분명히 바울은 고독이라는 공격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본문 9절을 주목합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이 말은 역으로 이야기를 하면 바울이 지금 두려워서 말을 하지 못할 정도라는 뜻이 됩니다.
본문에 기록된 ‘두려워하다’의 뜻으로 번역된 ‘fobew’(포베오)라는 단어의 원뜻은 ‘경악하다’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냥 웬만큼 놀라는 그런 상태가 아니라 놀라 자빠지는 정도의 두려움을 느끼는 상태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이런 경악할 정도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까?
외로움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두 번에 걸친 본문의 설교를 통하여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았지만 다시 음미하겠습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떠나 고린도에 이르렀습니다. 
고린도까지의 여정이 어떠했습니까?
눈물겨운 여정이 이었습니다.

마케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서 감옥에 갇히는 시련으로부터 시작하여 데살로니가에서의 핍박, 베레아에서의 쫓겨남, 그리고 아덴에서의 미미한 전도의 결과를 경험하면서 지칠 대로 지친 바울은 삭막한 항구 그리고 음란함이 너무 엄청난 고린도에 까지 도착을 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는 바울의 선교의 동역자들은 아직 마케도냐에서 내려오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도리어 고린도에도 다른 여타 다른 지방처럼 바울을 대적하고 비방하는 안티(anti)들이 많이 존재했습니다.

본문 6절을 보니까 그들은 아주 강하게 사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바울이 옷을 털 정도로 진저리나게 바울을 괴롭혔던 대적자들이 존재했습니다.
후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바울의 동역자로 돕게 되었고, 실라와 디모데도 바울에게 합류하여 힘이 되었지만 고린도 항구도시에 맨 처음 바울이 들어왔을 때 그는 철저하게 외로웠습니다.

감히 입을 열 수 없을 정도의 고독과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입도 벙끗할 수 없는 극도의 탈진과 무기력에 빠져 있었습니다.
‘나한테는 아무도 없어’

인간이 느끼는 최고의 절망감이며 고통의 극치입니다.
바울이 바로 그런 상태였습니다.

저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 중에 극도의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빠져서 한 동안 깊은 영적인 침체에 빠져 있었던 한 사람을 소개할 때마다 단골메뉴로 소개하는 사람이 바로 엘리야입니다. 갈멜산에서의 그 엄청난 승리를 경험했지만 일개의 사악한 여왕이었던 이세벨의 살해 명령에 두려움을 느낀 엘리야는 살인교사자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호렙 산의 한 기슭이었던 브엘세바 골짜기로 피신을 합니다.

그곳에서 극도의 영적인 탈진을 경험하고 있던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왕상 19:10절입니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이렇게 탄식하던 엘리야에게 내린 하나님의 처방전은 무엇이었습니까?
이어지는 왕상 19:15-1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무슨 말입니까?

①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람의 왕으로 하사엘을 기름 부으라.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 그리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선지자가 되게 하라”

② 남은 자를 너를 위해 예비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왕상 19장을 묵상할 때 얻는 도전이 있습니다.

1번 항목은 사명의 재확인이니까 감동이 있었을 것이지만 2번의 항목은 엘리야에게 별로 큰 감동은 아니었을 것 같다는 도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엘리야는 죽기를 각오하고 갈멜산에서 우상의 선지자들과 싸웠습니다.
그 때 갈멜산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의 회색분자들이었습니다.
여호와를 택할 것인가? 바알과 아세라를 택할 것인가? 
기웃거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분노한 엘리야가 소리를 쳤습니다.
왕상 18:21절입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기회주의자들만 있었습니다.
동시에 바로 그 엄청난 영적인 전쟁과 긴박한 상황에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는 않았지만, 바알에게 입을 맞추지는 않았지만 엘리야의 시급한 상황에 그 누구도 함께 나와 목숨을 같이 걸며 싸우려고 하던 자는 없었습니다.

굴속에서 자기들만의 신앙을 유지하려고 했던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그들이 남아 있는 들 무슨 감동을 엘리야 받았겠습니까? 그래서 엘리야는 나만 남아있음에 대한 절규를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의 심정도 참으로 어렵고 힘이 들었을 것입니다.

고린도의 우상과 음란함과 유대인의 아성이라는 절벽에 서 있었던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침묵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교우 여러분!
여기까지만 성경에 기록되었다면 참 갑갑해집니다.
여기까지만 기록하고 성경이 마감되었다면 절망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누가는 이렇게 기록을 합니다.
행 18:10절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지난주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축복을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신 뒤에 또 하나를 약속하셨습니다.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바울은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에게 이제까지의 영적인 두려움과 침체를 뒤로 하고 두 손을 들어 항복하였습니다.
그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본문의 마지막 절에 있습니다.
행 18:11절입니다.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면서 한 지역에서 1년 6개월씩이나 거주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에베소교회를 세우고 그곳에서 3년을 거주했던 경우를 제외하고 또 다시 이렇게 장기간 거주한 것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조명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은혜 때문입니다.

비록 고린도가 정말로 힘이 들고 외로운 곳이었지만 바울은 고린도라는 곳에서 교회를 세우고 그곳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밝히 증거 하면서 유럽 선교의 길을 더욱 알차게 한 것입니다.

설교 준비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손해 보지 않으신다.”

또 하나
“하나님은 당신의 사역을 위해 실수하지 않으신다.”

저는 이것을 믿습니다.
우리 교우들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원래 사도행전 강해의 본문 순서는 행 18:12절 이하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지난주에 보았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며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지난 한 주 동안 기도원에서 있었습니다.
2009년도를 준비하기 위한 목회 계획 수립과 사역을 위해서 기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개인의 기도제목을 하나님께 씨름하기 위해서 한 주간동안 기도하며 늘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조명하심에 세밀하게 귀를 기울였습니다.

교회를 위하여 종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영적인 씨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극도의 절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아무도 없는 2층 본당에서 몸부림을 쳤습니다. 
잠잠하시던 주님이 저에게 수요일 기도 중에 조용히 오셔서 조명하시며 주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9-10절이었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하나님께 풀어야 할 숙제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주간에 이 내용을 함께 조명하시면 좋겠다고 몸부림을 쳤는데 하나님은 한 꺼 번에 다 말씀하시지 않으시는 심술이 있으신가 봅니다.

저의 남은 기도제목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입니까?’입니다.

저의 지속적인 기도의 제목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분명히 압니다.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다같이 찬양을 한 곡 부르고 기도합니다.  

“오 신실하신 주”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시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약속하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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