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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예배를 드립시다 (행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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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를 드립시다 (행 10:1~2)


금년 겨울도 포근하리라 던 기상청의 장기 일기 예보와는 달리, 어느 해보다 많은 눈이 내리고 추운 것 같습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란 말이 있는데, 그렇지 않아도 경제 불황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춥고 시릴 터인데, 이렇게 춥고 많은 눈까지 내리고보니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더욱 움츠러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금년 겨울은 고난의 겨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시인 쉘리는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겨울이 추우면 봄이 멀지 않다!” 그렇습니다. 멀지 않아 봄은 돌아올 것이며, 언젠가 경제 불황의 터널도 지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둔 밤 지나면 새 날 오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 이 세상 슬픔이 지나고 나면, 광명한 새 날이 다가올 것♪입니다. 

새 해 첫 주일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라는 말씀을 중심해서 ‘소망이 부끄럽지 않으려면’ 말씀에 붙잡혀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말씀에 붙잡혀 사는 구체적인 생활로 1)금년에 반드시 성경을 일독하시기 바라고, 2)주일을 성수하시기 바라며 3)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하시기 바라고 4)선교 헌금에 동참하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바둑이나 수학에 정석이 있듯이, 신앙생활도 꼼수로 하지 말고 정석대로 하여, 여러분의 소망이 결코 부끄럽게 되지 않기를 다시 한 번 축원합니다. 

새 해 두 번째 주일인 오늘은 집집마다 "가정 예배를 드리자!" 라는 말씀으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제가 하나님과 성도 여러분 앞에 한 가지 회개할 것이 있습니다. 곧 가정 예배를 어쩌다가 가끔씩 드리고 성실하게 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서 입니다. 

거기에는 한두 가지 핑계거리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새벽 기도회 시간에 이미 가족을 위해서 기도를 다 드렸는데 또 다시 가정 예배를 드려야만 하는가? 라는 것이었고, 둘째로 저희 부부는 아직 까지 ‘여보’ ‘당신’ 소리를 못하고 사는 사람들인데, 아이들이 다 떠나고 나니까 둘이서만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조금은 쑥스럽게 생각되어서 가정 예배를 등한히 해왔고, 그래서 가정 예배드리는 일에 대해 한 번도 설교를 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가 지난 해 12월 우리 집에서 먼저 가정예배를 시작하고, 새 해에는 정석대로 신앙생활을 하자는 뜻에서 오늘 이렇게 여러분들에게 가정 예배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드리게 되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20년 동안 아내요 어머니로서 살아 온 한 여자 성도의 입에서 이런 한탄이 나왔습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이 잘못된 모양이에요. 나는 일생 동안 가정 밖에 몰랐는데, 지금 우리 가정은 엉망진창이에요. 다 집어치워 버리고 싶다니까요.”라는 좌절감에 사로잡힌 비통한 독백이었습니다. 

하워드 헨드릭스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가정, 단순히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는 집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함께 사시는 가정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 액자에 보면 이러한 문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집의 주인이시요, 식사 때마다 보이지 않은 손님이시요, 모든 대화에 말없이 듣는 이시라.” 

우리들의 가정은 앞서의 “나는 일생 동안 가정 밖에 몰랐는데 지금 엉망진창이에요.”라고 탄식한 어느 가정처럼 문제는 없을까요? 단순히 신자들이 사는 집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함께 사시는 가정, 그래서 그리스도는 이 집의 주인이시요, 식사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님입니다.”라고 할 수 있는 가정들이 몇 가정이나 될까요? 이 시간 피차 우리의 가정들을 진단해 보면서 더 복되고 이상적인 가정을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하고 많은 제도가 있고 조직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가장 신성한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교회이고, 둘째는 가정입니다. 이 세상에 그 많은 단체와 기관, 조직과 제도 중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것은 가정과 교회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가정과 교회는 그 기원부터 신적이고 신성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듯 신성한 기원을 가진 가정들이 오늘날 어떠한 상태에 빠져있습니까?

미국의 어떤 유명한 가정 잡지에 발표된 통계에 의하면 
1)71%가 가정생활이 문제 가운데 빠져 있다고 하며 
2)결혼한 사람들 중 75%가 자신의 결혼을 실패로 보고, 자기 가정은 불행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문제가 많은 통계인 것 같습니다. 가정은 이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고, 반대로 이 세상은 각 가정들의 복사판이라 할 수 있겠는데, 그렇다면 국가와 사회의 최소단위로서의 가정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는 줄 압니다. 분명히 세상의 도덕 수준은 이 사회를 조성하고 있는 각 가정들의 도덕 수준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 가정과 불신자 가정의 특징은 무엇이며,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엡 4:17-19에서 불신자의 생활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 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들은 이방인들의 생활모습을 나타내주는 말씀입니다. 이방인들의 영적 상태는 어둡고 무지하고 무감각하다는 것입니다. 저들의 생활은 무가치한 것들과 허영과 육욕적인 불순함으로 특징지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딤후 3:1-5의 말씀을 보면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고 했습니다. 이상의 모든 특징들이 이방인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성경은 말씀하기를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하며, 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 가정들의 특징은 무엇이어야 하고, 또 그리스도인 가정의 모델이 될 수 있는 가정은 어떠한 가정일일까요? 그것을 오늘 사도행전 10장의 백부장 가정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집사님은 기도할 때마다 고넬료의 가정처럼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고넬료는 점령국 로마의 장교로서 100명의 부하를 거느린 이달리야대라 이름한 부대의 백부장입니다. 그리고 이 고넬료는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고넬료는

1. 경건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참되시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독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군 복무시절 장교들의 타락한 생활을 많이 보았습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장교들이 그러하다면 정말 걱정입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경건한 군인이었습니다. 여기 경건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잘 예배하는 태도가 아주 몸에 밴 것을 말합니다.

2.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한 인물이었습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으나 그들의 많은 잡신을 버리고,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며, 그리고 자신 만이 아니라 온 가족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도록 한 인물입니다. 개인적으로 위대한 신앙가는 있어도 온 가정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기란 그렇게 쉬운 일도 아니고 흔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고넬료의 가정은 온 가정 식구들이 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제일주의 살아가는 믿음이 가정이었습니다.

3. 백성을 많이 구제한 인물이었습니다.

고넬료는 위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진정한 경건의 사람이었습니다. 약 1:27 말씀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수입의 일부분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모든 책임을 다 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나머지는 자기 마음대로 써도 괜찮은 줄로 압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도 중요하지만, 그 나머지 90%로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4. 항상 기도한 인물이었습니다.

고넬료의 영혼은 늘 하나님을 앙망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힘썼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 없는 사람이며, 기도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군인이 아니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고넬료처럼 신앙과 덕성을 겸전하고 있다면 얼마나 귀한 일이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정이 고넬료의 가정처럼 경건한 가정이 되려면 필요불가결한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곧 가정 예배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작은 교회로서의 구실을 했습니다. 실제로 몇몇 가정들은 지역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습니다. 

빌레몬서 1:1-2에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했습니다. 

고전 16:19절에는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라고 했으며, 골 4:15절에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두 사람 이상의 단체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렇게 가정교회들이 많이 있었고, 이러한 가정교회들은 생명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놀라운 번식력과 감화력을 발휘했습니다. 

우리 한국에서도 이전에는 가정 예배가 매우 중요시 되었습니다. 연세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던 고 백낙준 박사는 수 십 년 동안 하루도 가정 예배를 거룬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활이 분주해자면서 가정 예배가 점점 밀려나고 사라져가는 실정입니다. 

하워드 헨드릭스는 “신자에게 있어서 예배는 사치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이다. 예배는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필수적인 것이다. 예배는 예배드리는 사람이 시간과 관심이 있는 그 때까지 보류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지고한 업무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가정 예배 시간을 갖는 것은 우선권의 문제다. 무엇을 위한 시간이 없다는 말인가?”라고 반문을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자기 교회에 출석하는 태만한 신자에게 일침을 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신자는 이야기하는 도중 “목사님, 목사님은 이해하지 못하십니다. 나는 시간이 없어요. 나는 일을 해야 하거든요.”라고 말했습니다. “누가 당신이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나요?”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못해요.” “누가 먹어야 한다고 말했나요?” “목사님, 좀 현실적이 되세요.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어요.” “누가 당신은 살아야만 한다고 말했나요? 살아야만 한다고 말하는 성경 구절을 하나만 대보세요.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못하면서 사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하면서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해보신 적은 없으신지요?”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적은 없어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리챠드 백스터는 영국의 유명한 청교도 목사입니다. 그는 아주 부유하고 세련된 교구민들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삼년 동안 온갖 열성을 다해 설교를 했지만, 눈에 띠는 결과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서재에 엎드려 울부짖었습니다. “오 하나님, 당신께서 이 사람들에게 어떤 일을 해주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죽겠나이다.” 그 때에 하나님은 “백스터야, 너는 잘못된 곳에서 일하고 있다. 너는 교회를 통해서 부흥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구나. 가정에서부터 시작해 보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백스터는 한 집 한 집 가정 예배를 드리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마침내 성령께서 불을 붙여주셨고, 그 불길은 온 교회에 번져서 가장 큰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부흥을 일으켜 달라고 간구하도록 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부흥을 일으켜주신다면 우리 교회는 놀랍게 부흥하고 힘 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가정에 가정 예배도 없고, 부흥도 없고, 그리스도께서 함께 사시는 가정이 아니라, 단순히 명목적인 신자들이 살고 있는 집이 될 때, 그 가정은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할 수 없고, 그러한 가정들로 이루어진 교회라면 오합지졸에 불과한 힘없는 교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영국의 대 설교가 스펄전 목사는 말하기를 “가정예배를 그치는 자에겐 화가 있다.”고 경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으로 하여금 벧엘에서 가정예배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벧엘이란 바로 하나님의 집이란 뜻입니다. 

가정예배를 드리면 그 집은 벧엘이 되지만, 가정예배가 없는 집은 ‘사람의 집’이 됩니다. 가정예배를 드리면 성전이 되지만, 가정예배가 없으면 극장이 됩니다. 가정예배가 있으면 교회가 되지만, 가정에 예배가 없으면 여관이 되고 오락장이 됩니다. 가정에 예배가 있으면 하나님이 그곳에 거하시지만, 가정에 예배가 없으면 사단이 즐겨 방문할 것입니다. 고로 신자의 가정에서 힘써야할 것은 가정예배입니다.

시 127편을 보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가정에 충실하고 힘써 가정을 일으켜 세우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결제해주시지 않으면 한낱 모래 위에 세운 집처럼 그 가정은 무너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시편 127편에서는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자녀를 

1)기업이라고 했습니다. 이 기업은 과제, 사명으로도 번역이 가능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과제요, 사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상급이라고 했습니다. 자녀들은 저주의 선물이 아니고, 우연히 태어나지도 않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푸신 크신 호의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3)화살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여러분의 자녀들이 목표를 향하여 쏘아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목표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녀들에게 원하시는 목표가 있는데,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부모들의 마음대로, 부모의 욕심대로만 기른다면 그는 참으로 엉터리 양육자가 될 것입니다.

이 죄악이 관영한 시대에 경건하고 복되고 이상적인 가정 상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릴 때의 추억입니다. 이모님 댁에 가는 길에 탱자나무 울타리에 싸인 과수원이 딸린 큰 저택이 있었습니다. 그 집을 지날 때마다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지곤 했는데, 그래서 “저 가정은 무척 행복하겠구나!” 라는 생각에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앙인의 안목으로 다시 생각해 보십시다. 으리으리한 집, 값진 가구,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고, 텔레비전 앞에서 비록 온 식구들의 웃음꽃이 만발한다 하더라도, 그 가정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그 가정은 가장 중요한 것이 결핍된 가정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그리스도가 없는 가정, 영생의 소망이 없는 가정은 웃을만한 처지의 가정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웃을 수 있는 사람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가정이라야 참으로 웃어도 좋은 가정이라고 저는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이상적인 가정이란, 고넬료의 가정처럼 온 식구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선행을 베풀면서 살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고, 하늘나라의 소망이 있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가정, 하나님께 향한 깊은 감사가 있고, 기도가 있고, 찬송이 있는 가정예배를 드리며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가정, 이러한 가정이야말로 복되고 이상적인, 가정임을 믿습니다. 

가정예배의 횟수는 하루 한 번 정도가 적당하며, 명절이나 가족들의 생일에는 반드시 온 식구가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가정예배 시간으로 적합한 때는 저녁 식사 후라고 하겠지만, 때로는 아침시간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소요시간도 10분에서 20여분까지, 혹은 그 이상도 자녀들의 연령과 형편에 따라 다양하게 가질 수 있습니다. 예배의 수준은 가족 중 가장 어린 아이에게 맞추면 온 가족의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습니다. 가정예배를 쉽게 드리면 자녀들도 어려서부터 예배에 함께 참석할 수 있습니다.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먼저 주일인 오늘 밤부터 가정 예배를 꼭 시작해 보십시오.

일본의 ‘내촌감삼’은 행복한 가정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고, 그리고 그 사이에 자녀가 있어, 가을 밤 고요해질 때, 그들이 등불을 둘러앉아 머리 숙여 하나님께 기도한다. 이것이야말로 행복한 가정이다. 그때 주님은 그들 가운데 나타나시어 말씀하신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나도 반드시 그 가운데 있느니라.’ 무엇이 이만큼 신성하랴. 이것 있으므로 왕후의 궁전도 부러워 할 바 못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많은 가정들이 무참히 붕괴되는 이 시대에, 가정 예배를 통해서 여러분의 가정이 견고해지고, 임마누엘의 은혜를 체험하고, 신앙 부흥이 일어나고, 기도의 응답을 받고, 감사가 넘치고, 화목하고 성결한 가정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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