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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벧세메스로 올라가는 암소 (삼상 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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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세메스로 올라가는 암소 (삼상 6:10~16) 
 
 
2009년은 소띠의 해(기축년)입니다. 소는 우리나라 농경생활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민족 문화와 식문화를 만들어 왔습니다. 소는 단순한 가축의 의미를 뛰어넘어 마치 한 식구처럼 생각돼 왔습니다. 소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노동력일뿐 아니라 운송의 역할도 담당하였고, 급한 일이 생겼을 때는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비상금고의 역할까지 톡톡히 했습니다. 자녀의 등록금, 시집 장가 가는 밑천, 논이나 밭을 살 때, 집을 짓거나 살 때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소는 다른 동물에 비해 덩치가 크고 움직임도 느린 편입니다. 개나 고양이나 원숭이에 비해 사람 말을 잘 알아듣는 편도 아닙니다. 그래서 '쇠귀에 경읽기'며 '황소고집'이라는 말이 사용되는가 하면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다'는 식으로 부정적인 속담도 생겨났습니다. 이처럼 우리 일상생활에서 소는 우직함과 고집, 그리고 때로는 아둔함과 미련함의 상징으로 통용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국문화에서 차지하는 소는 긍정적인 측면이 훨씬 많은 동물입니다. 소는 근면함과 유유자적의 대명사입습니다. 나아가 동물 중에서는 우리와 가장 친근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소는 우직하고 성실·온순하며 끈질기고 힘이 세나 사납지 않고 순종적이며 충직한 동물입니다. 이러한 소의 속성은 한국인의 정서 속에 녹아들어 여러 가지 관념과 풍속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소가 말이 없어도 열두 가지 덕이 있다"고 했습니다. '소같이 일한다'·'소같이 벌어서'·'드문드문 걸어도 황소걸음' '우보천리'등의 말은 소의 근면함을 들어 인간에게 성실함을 일깨워 주는 속담입니다. 

또한 소는 둔한 것 같으면서도 신나는 일에는 '쇠뿔도 단김에 빼듯' 침식을 잊고 해내지 않으면 몸살을 앓는 것도 소의 특성입니다. 그래서 한번 마음먹었다 하면 하늘이 두쪽이 나도 해내는 사람을 비유하기도 합니다. 시인 박목월은 '황소 예찬'에서 소가 가지고 있는 어진 눈과 엄숙한 뿔, 슬기롭고 부지런함, 유순, 성실, 근면, 인내, 확고한 신념 등을 노래했습니다.
  
'소는 하품 밖에 버릴 것이 없다'는 말처럼 소는 정말 버릴 것이 없습니다. 뿔, 기름, 피, 가죽, 고기, 뼈, 내장 등 그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이 실재생활의 중요 재료로 사용되어왔습니다. 

소가 이런 존재였기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집안 전체의 화(禍)을 막는 데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이사한 뒤에 문에 소뼈나 소 고삐를 매달아 두는 풍습은 나쁜 귀신이 접근하는 것을 막는 의미였고 소꿈은 집안의 재력이나 집안의 길흉화복과 관련돼 있었습니다. '꿈에 황소가 자기 집으로 들어오면 부자가 된다'거나 '소가 문밖으로 나가면 재물을 잃는다'는 꿈해석은 이 같은 조상들의 생각을 잘 드러낸다고 할 것입니다.

성경 안에서도 소는 여러 가지 상징과 의미로 등장합니다. 암 4:1, 렘 46:20에서는 살진 암소는 부유한 백성이나 국가를 상징했고, 창 41:27절에서는 굶주린 암소는 흉년을 의미했습니다. 황소는 악인을 상징하는데(시편22:12) 특히 바산의 황소는 힘 센 자를 의미합니다(암4:1).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비옥한 목초지였던 바산(Bashan)의 소가 대단히 힘이 셌기 때문입니다. 

레 22:26과 민 23:1에 송아지는 희생의 제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소하면 우상의 상징이 된 금송아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를 하며 소로 하나님을 형상화했는데 이는 애굽의 우상 아피스(Apis)를 본 딴 것으로(출32:4)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고 끈질기게 나타는 고질병과도 같았습니다(왕상12:28, 대하13:8). 성서시대에는 귀한 손님이 올 경우와 같은 특별한 때에는 자신이 키우던 짐승들 가운데 가장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백미와 같은 탕자의 비유에서도 방탕한 아들이 돌아오길 끝없이 기다리던 탕자의 아버지는 그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온 날 "잃어다 찾았고 죽었다 살아온"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눅15:23).

그리고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본 사무엘상의 기록에 의하면 소가 특별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사무엘서는 법궤의 이동 사항을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로로 있던 법궤가 전쟁터로 옮겨진 것은 불레셋군대에게 이스라엘이 패함으로 말이암아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우심을 얻기는 커녕 불레셋에게 법궤를 빼앗기고 말았으며 홉니와 비느하스도 그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블레셋에 법궤를 빼앗긴 것을 이가봇(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뜻)이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법궤는 처음에는 에벤에셀에 있었으나 곧 아스돗으로 옮겨 블레셋의 우상을 섬기는 다곤 당에 보관됩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재앙이 그곳에 임하여 다곤 신상이 다 깨지고 말았습니다. 독종까지 아스돗의 지경에 임하여 그 지경을 망하게 하였습니다(5:6). 그래서 법궤는 다시 가드로 옮겨졌다가 다시 에그론으로 옮겼지만 가는 곳마다 재앙이 임하였습니다. 마침내 불레셋방백들의 회의에서 새 수레를 만들어 젖 나는 두 소에게 끌게 해 이것이 벧세메스로 가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재앙이고 그렇지 않으면 우연이라고 하자고 결정했습니다. 

특별히 6장 14절 말씀은 구원사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자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마침내 언약궤는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하여 지키게 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이방신들을 버리고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면 블레셋에게서 건져주실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결과 사무엘이 살아있는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아주셨다(7:13)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릇 성도의 신앙은 법궤를 끌고 묵묵히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와 같아야 합니다. 푸른 풀이 유혹했으나 법궤를 멘 소는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습니다. 어미를 부르는 애절한 송아지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묵묵히 벧세메스로 갔습니다. 불레셋 방백들의 계획과 의도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는 다른 것에 끌리지 않고 착하디 착하게 자기의 길을 끝까지 걸어갔습니다. 

불레셋 방백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려고 치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법궤를 이스라엘로 보내는데 있어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를 한번도 메어 보지 아니한 젖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송아지는 집으로 떼어보내고 수레를 메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 수레가 벧세메스로 곧장 가면 이 큰 재앙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연히 만난 재앙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이 의견으로 보면 정말 완벽한 인본주의 작전이었습니다.먼저 수레가 새 것이었습니다.먼 길은 헌 신을 신고 걷는 법입니다.등산할 때 새등산화보다는 길이난 헌등산화가 훨씬 평안하고 좋습니다. 새 등산화를 신고 등산을 하면 틀림없이 발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따라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수레였습니다.둘째 소는 멍에를 메어 보지 않았습니다.일하지 않은 소입니다.게다가 암소이며 새끼를 둔 소였습니다. 짐을 실어나르려면 잘 길들여진 힘있는 황소가 제격일 것입니다. 셋째 길은 오름길에다가 낯선 길입니다.또 인도자가 없는 먼 길입니다.

인간의 판단으로는 두 마리의 암소가 벧세메스로 간다는 것은 100% 불가능입니다.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인본주의적인 작전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이 하시니까 되었습니다.인간의 불가능이 하나님 안에서는 가능입니다.하나님이 열면 닫을 자가 없고, 하나님이 닫으면 열자가 없습니다.우리는 못하시는 것이 없는 하나님께 언제나 의지해야 합니다.하나님 안에서는 불가능이 없습니다.그렇습니다.블레셋 방백들은 완전한 작전을 세웠습니다.그러나 역사를 쥐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역사전체를 섭리하시고 지배하시고 운영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늘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벧세메스로 가는 두 암소는 블레셋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보란 듯이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었습니다. 블레셋사람들이 염원한대로 하지 않고 사명대로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는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처럼 우리가 지고가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약점이 있고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벧세메스로 가는 두 암소가 보여준 것처럼 묵묵히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벧세메스로 가는 소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습니다. 눈물이 눈에서 흘렸지만 사명의 길을 망치지 아니했습니다. 모든 성공자들은 감정을 잘 다스린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마리의 암소가 동행하여 법궤를 끄는 것이었기에 뜻을 맞추고 보조를 맞추고 서로 서로 배려하고 양보하면서 그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두 암소는 의견 충돌도 없이 협력하여 정해진 코스로만 갔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중도에서 꾀를 내지도 않았습니다. 뒤를 돌아보거나 제자리걸음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푯대를 향하여 묵묵히 힘을 합쳐서 순종의 걸음만을 걷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협력하고, 하나님의 종들과 협력하고, 하나님의 사람들과 협력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성도의 협력을 원하시는데 그렇다면 무엇을 위하여 협력해야 할까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협력해야 합니다. 내 생각과 달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내 생각을 내려놓고 협력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고 협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마리 암소에게는 눈물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12절에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라고 하였습니다. 두 암소는 본능적으로 새끼들을 생각하며 울었을 것입니다. 한 번도 메어 보지 못한 멍에를 메고, 생전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길을 걷고 있습니다. 비록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울면서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가야 될 그 길을 가면서 울었습니다. 암소들이 새끼 송아지들에게 모성적 본능에 이끌리면서도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손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눈물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성도마다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해야 될 시간들이 있을 것입니다. 

시편 84편 6절에도 성도는 눈물 골짜기를 통행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에게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죄로 인한 애통의 눈물이 터져야 합니다. 또한 그 죄에 대한 사죄 때문에 북받치는 감격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감당키 위한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가 걷는 이 길은 눈물 없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이렇게 우는 성도를 주님께서는 그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7:17). 
  
두 암소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헌신이 있었습니다. 주를 위해 생명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에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는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도 정지 명령을 내린 사람도 없었지만, 아니 수레를 이끈 사람도 없었지만 여호수아의 밭, 큰 돌이 있는 곳에 섰습니다. 자기들의 할 일을 다한 두 암소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 앞에 희생이 되어 번제의 제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만도 못한 우리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소가 웃을 그런 인생, 그런 신앙생활을 우리는 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소도 하지 않는 일을 우리 인생들이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것 저런 것 모든 것을 우연의 소치라고 주장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우연이라고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연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필연이 있을 뿐입니다. 

2009년 기축년은 어느 때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한 해가 될 것으로들 모두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의 어진 눈, 엄숙한 뿔, 슬기롭고 부지런한 힘, 유순, 성실, 근면, 인내 등과 같은 소의 덕성으로 우리가 살아간다면 반드시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도약하는 한 해가 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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