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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섬기는 자가 되라 (전 11:11~12, 갈 5: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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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는 자가 되라 (전 11:11~12, 갈 5:13~15)


‘지퍼’를 아시지요? 얼마나 편리한 생활용품입니까? 지퍼는 저드슨이란 사람이 몸이 뚱뚱해서 신발 끈을 묶기 힘들어 만든 것입니다. ‘싱어’라는 재봉틀이 있습니다. 가난과 질병에 고생하던 아내가 몸져눕게 되자 아내의 삯바느질을 어떻게 도울까 하여 바느질을 쉽게 하게 도와주려고 재봉틀을 만들었습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이런 아주 편리한 발명품들은 남을 돕기 위하여 만든 것들이 제법 많습니다.
  
인생은 테니스 경기와 같습니다. 서브를 잘 하지 않고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서브는 테니스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특히 세계적인 남자선수들의 경기를 보면 자신의 서브 게임을 잃으면 그 세트는 집니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서브를 잘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에서 섬김을 잘 하지 않고는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신앙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섬김을 잘 하지 않고는 결코 신앙생활에 승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적 원리에서 보면 예배와 섬김은 하나입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는데 하나님을 섬김은 예배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방법은 사람들을 섬기는 일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예배’라고 하고, 사람을 섬기는 것을 ‘봉사’라고 합니다.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크게 말하면 세 가지입니다. ‘케뤼그마’와 ‘디아코니아’와 ‘코이노니아’입니다. 말씀의 선포인 케뤼그마의 외적 작용이 디아코니아이며, 내적 기운이 코이노니아입니다. 그러므로 디아코니아도 코이노니아도 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는 것이며 말씀 없이는 이 모든 것이 다 헛것입니다.
  
웨슬레는 “하나님께 대한 최대의 예배는 인류에의 봉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초대교회는 교회를 ‘봉사자의 집단’이라 불렀습니다. 교인이 되었다는 것은 봉사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인은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봉사자의 집단입니다. 기독교는 두 가지 상징물이 있습니다. 영성가 리처드 포스터는 십자가가 복종의 징표인 것처럼, 수건은 섬김의 징표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서 1:27에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고 합니다. 참된 경건은 섬김입니다. 일반적으로 경건이라고 하면 굉장히 정적인 것으로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경건을 고아와 과부를 섬기는 동적인 일이라고 합니다.
  
수도사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한 번에 엿새씩 금식하고, 엄격한 규칙을 지키면서 움막에 앉아 교요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병자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가운데 누가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겠습니까? 병자들을 돌보는 형제입니다. 하나님은 섬기는 영성을 좋아하십니다.
  
어떤 모양으로 섬기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섬기는 자의 마음입니다. 진정한 섬김이란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지배자가 되고자 한다면 먼저 그들의 하인이 되어야 합니다. 섬김을 통하여 그들의 마음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섬김의 진정한 의미는 성경에서 흘러나온 것입니다. 섬김이란 무엇입니까? 어떤 분이 말하기를 ‘섬김’이란 ‘섬’ 빼고 ‘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올해의 목회 주제는 총회 주제인 ‘섬겨야 합니다’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섬김을 다시 한 번 배우고 섬기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섬기는 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갈라디아서 5:13에는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고 합니다. 섬김이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입니다. 요즘 말로 옵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랑으로 종노릇”은 섬김의 최고의 자세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 사랑하면 모든 것이 완성됩니다. 사랑하면 끝납니다. 사랑은 섬김의 조건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아래에 서주는 것입니다. 높은 자가 낮아지는 것입니다. 강한 자가 무릎을 꿇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하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사랑은 양을 먹이고 섬기는 조건입니다.
  
마태복음 20:28에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섬김은 그리스도의 오신 목적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삶의 모델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섬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도 섬김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과 함께 두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성만찬과 세족입니다. 성찬은 자신을 나누어 주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쪼개듯 자신을 쪼개면 그 수가 늘어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따르듯 자신을 따르면 우리도 잔치를 즐길 것입니다. 제자의 발을 씻기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섬기시는 예수님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니다.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선생이 종의 발을 씻길 수 있습니까? 종이 선생의 발을 씻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섬김을 보이시기 위하여 스승으로서 종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발을 씻기신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이며 둘째는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시려는 것입니다.
  
시각장애인으로서 세계 유일의 안과 병원장이신 김선태 목사님의 자서전 ‘땅을 잃고 하늘을 찾은 사람’이 지난달에 출판되었습니다. 출판기념회 때 제가 그 책의 서평을 했습니다. 그 한 대목에 제가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만난 사람 가운데 김선태목사님 만큼 손으로 베풀기를 즐겨하는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있어서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으로 베푸십니다. 항상 다른 사람에게 베풀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 줍니다. 그래서 항상 주고 난 빈손 같지만 마르지 않는 샘처럼 날마다 넘칩니다. 이것이 그 분의 속에 간직된 신비입니다.” 부유하기 때문에 남을 도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을 돕기 때문에 부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30세까지는 학문과 예술을 공부하자. 30세 이후에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인생을 바치자”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4:11-12에는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모든 직분자의 공통의 사명을 몇 가지로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는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입니다. 둘째는 봉사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함입니다. 섬기고 봉사하는 것은 모든 직분자의 사명입니다. 우리 모두의 사명이 바로 섬기는 일입니다.
  
성경에는 섬김과 사역 그리고 종과 사역자라는 단어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면 바로 우리가 사역자요 우리가 누군가를 섬기고 있다면 우리는 사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섬기지 않는 크리스천이란 말은 의미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섬겨야 합니다”란 주제는 그리스도인의 당위성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섬김을 통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섬김을 위해 구원받았습니다. 섬김을 위해 구원받았기 때문에 섬길 때에 진정한 구원의 의미가 나타납니다.


둘째, 섬기면 내가 도리어 섬김을 받습니다.

전도서 11:1에는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합니다. 섬기는 자가 받게 되는 것이 성경적 이치입니다. 섬김의 최대 수혜자는 섬기는 자 자신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섬기고 나면 마음이 즐거워집니다. 이것만 하더라도 수지맞는 일입니다.
  
‘부메랑 효과’(boomerang effect)란 말이 있습니다. 부메랑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수렵기구입니다. 던지면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는 기구입니다. 자신이 한 어떤 행위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는 경우를 말합니다. 특히 친절이 그러합니다. 이솝이야기에는 늙은 사자와 생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자가 생쥐를 잡았는데 은혜를 갚을 테니 한번 만 살려달라고 애원합니다. 사자는 이 말을 듣고 생쥐를 살려주었습니다. 어느 날 사자가 그물 덫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본 생쥐는 그물을 갉아서 사자를 풀어주었습니다. 친절을 베푼 자가 친절을 되받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모든 것이 베푼만큼 되돌려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부메랑 효과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7:12에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합니다. 흔히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대접 부메랑입니다. 누가복음 6:38에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줌 부메랑입니다. 마태복음 10:12-13에는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고 합니다. 기도 부메랑입니다. 하늘의 원리는 철저하게 부메랑 원리입니다. 어떤 일을 저지르던지 반드시 되받게 되어 있습니다.
  
격언에 ‘다른 사람에게 물을 주는 사람은 자신도 물을 받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사해는 출구가 없기 때문에 죽은 바다가 되었습니다. 그 안으로는 물이 흘러 들어가도 다시 밖으로 나오는 법은 없습니다. 반면에 갈릴리 바다는 물을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기 때문에 항상 풍요합니다. 주는 사람이 받고, 섬기는 사람이 섬김을 받습니다.
  
호레스 만은 “남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파멸시키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3:1에는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이들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부지중에라도 천사를 대접한 것은 내가 덕 보는 일입니다. 마태복음 25:40에는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합니다. 부지중에 예수님을 대접한 것은 내게 덕이 됩니다.
  
‘거울의 법칙’이 있습니다. 마치 거울에 비치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의 상대방에 대한 태도가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에게로 그대로 되돌아오는 것을 거울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이 거울은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아내가 죽었습니다. 여동생 마야가 일을 도우려고 이사하여 14년 동안이나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 덕에 아인슈타인은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1950년에 그녀가 뇌경색으로 쓰러졌습니다. 그 후 2년 동안 아인슈타인은 매일 오후에 마야에게 플라톤의 책을 큰 소리로 읽어주었다고 합니다. 섬김이나 선행은 씨를 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뿌린 씨는 반드시 자신이 열매로 거둡니다.
  
백인의 문화와 문명은 본질상 물질적인 것입니다. 백인의 성공 기준은 ‘나를 위해 재산을 얼마나 모았느냐에 있다’고 합니다. 인디언의 문화는 근본부터 영적인 것입니다. 인디언의 성공 기준은 ‘내 동족에게 얼마나 봉사를 베풀었는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공기준은 ‘사람을 섬김으로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나?’라는 것입니다.

결론

사도행전 28장에는 로마로 항해하는 바울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고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순풍이 불어 항해를 도와주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유라굴로라는 태풍이 불어 배가 파선하게 되어 선적한 화물을 다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바울 한 사람 때문에 배에 타고 있던 276명의 목숨만은 구조되게 하였습니다. 구조된 곳은 멜리데라는 조그만 섬이었습니다. 

바다에서 건짐을 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불을 피웠습니다. 바울도 함께 바다에 빠졌다가 나왔지만 장작나무를 가지고 와서 불을 지피다가 장작 속에 있던 독사가 나와 손을 물었습니다. 바울이 왜 손이 물렸습니까? 독사가 있으니까 물린 것입니다. 뱀은 시험하는 사탄입니다. 사탄이 있는 동안 사람들은 시험을 당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같은 입장이지만 다른 사람을 섬기다가 물린 것입니다. 

바울이 뱀에게 물렸을 때에 사람들은 ‘그는 죄인이다.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한 마디 변명도 하지 않고 뱀을 불에 떨어버렸습니다. 바울이 죽기를 기다려도 죽지 않자 ‘과연 그는 신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섬기는 사람이 시험을 당합니다. 섬기지 않는 사람은 시험도 당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시험 당할 시간도 없습니다. 봉사하다 얻은 시험은 성령의 불로 이겨야 합니다. 독사에게는 불이 최고의 약입니다. 섬기다가 당한 시험은 성령의 불로 소멸하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 1:2에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합니다. 섬김의 대가는 기쁨입니다. 섬기다가 당한 시험은 기쁨입니다. 섬김으로 얻는 기쁨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최근 한국 기독교의 이미지가 최악의 수준입니다. 기독교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법은 섬김입니다. 섬김으로 이미지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습니다. 올 한해는 섬김의 사명을 다하기를 바랍니다. 섬김으로 도리어 섬김의 복을 받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섬기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한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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