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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희망을 보여 주는 상징적 교회 (렘 32:1~15, 렘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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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보여 주는 상징적 교회 (렘 32:1~15, 렘 33:3)


성경에 보면 여러 면의 상징적 인물 사건 지명 물체들이 나옵니다.
한 예를 들면 선지자 이사야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사7:8:에 보면 스알야숩 과 마할살렐하스바스 라는 이름의 두 아들이 나오는데
         스알야숩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 는 은총의 상징적 아들이라면
         마할살렐하스바스는 노략이 급하다는 심판의 상징적 아들입니다.

오늘 교회 안에도 두 종류의 상징적 사람들이 모여있습니다. 
     크게 구분하자면 신자와 비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C.S 루이스는 교회 안에 신자와 비신자의 구별을 
             만들어진 것과 태어난 것의 구별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잘 만들어도 로봇 하고 태어난 사람하고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로봇이 더 예쁠 수도 있고 더 고상하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호흡은 하지 않습니다. 호흡하지 않으면 죽은 몸입니다. 
영적 호흡 즉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만이 
     이 시대와 사회에 희망을 보여 주는 그리스도인이 될 줄 믿습니다.  
   
본문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면  

1. 본문말씀의 배경을 말해 보세요(1-2절)

1절에 [ 유다의 시드기야 왕의 열째 해 곧 느부갓네살 열여덟째 해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 고 합니다.

시드기야 왕의 열째 해 곧 느부갓네살 열여덟째 해는 
    B.C 587년으로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있을 때입니다.
에레미야가 활동하던 시기는                                        
           유다 왕국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시대였습니다.

유다 역사를 보면 16대 요시야가 8세 때 왕이 되어
      그는 16세 되던 해에 신앙개혁을 단행합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우상을 일제히 제하여 버립니다.
  그리고 성전을 수리하다가 제사장 힐기야가 율법책을 발견하고 
  요시야 왕이 그 율법의 말씀을 듣고는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 우리가 하나님 앞에 너무 잘못 살아 왔구나 ! ]
  그래서 율법에 있는대로 유월절 절기를 성대히 지켰습니다.

성경은 사무엘 이후 이같은 유월절을 지킨 적이 없더라고 합니다.
이러한 요시야 왕이 안타깝게 
       애굽 왕 바로느고와 갈그미스 전투에서 전사를 하고 맙니다.
그러니 비온 후에 마른 땅같이 정치, 종교, 사회 모든 분야에 부패로 말미암아 
     나라는 파멸을 향해 내리막 길을 달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절박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로 이어지는 왕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들이었습니다. 
시드기야 10년은 유다가 마치 풍전등화같이 망하기 직전의 시기로
이러한 절박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 
더군다나 예레미야가 옥에 갇혀있는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습니다

옥에 갇혀 있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신앙적 교훈을 줍니까?


2. 갇혀 있는 에레미야 선지자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1-2절)

왜 예레미야 선지자를 옥에 가두었습니까?
유다 왕 시드기야 제 10년은 B.C. 587년으로서 예루살렘 멸망 1년 전해입니다. 

제9년 10월에 예루살렘이 완전히 포위되어
제11년 4월에 함락되었음으로
이때는 이미 유다의 패망이 기정사실화 되었던 때를 말합니다.
이와 같이 패망 직전에 
예레미야가 왕의 시위대 뜰 감옥에 갇혀있는 이유는
유다왕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의 손에 붙잡혀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끌려갈 것을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더욱 예레미야가 곤궁에 빠지게 되는 것은 
유다를 돕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오는 애굽 군대와 맞서기 위해
      바벨론 군대가 잠시 예루살렘 포위를 풀었을 때로서
유다왕 시드기야와 고관들이 생각하기를 
아마도 애굽으로 인해 그들이 구원받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러한 희망에 기대하고 있던 그들에게
      예레미야 선지자를 예루살렘의 멸망을 재차 선포하였으니
      시드기야 왕과 고관들의 분노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런 이유로 예레미야는 왕의 관리들에 의해
    적을 이롭게 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려 백성들을 불안케 한다는 명목으로 
    예레미야 선지자는 매국노로 낙인찍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왕과 고관들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옥에 가두었지마는 

32:1절 이하에  보면
[유다의 시드기야 왕 열째 해 곧 느브갓네살 열여덟째 해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 고 합니다.
아무리 옥에 갇혀 있어도 
하나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들린다는 것은 바로 희망을 의미합니다. 

딤후2:9절 바울의 
[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느니라 ] 고백처럼
우리가 사방에 우겨쌈을 당해 아무리 둘러봐도 대책이 없을 때도
       하나님이 말씀은 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들려집니다. 
말씀이 듣려지면 희망이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즉 하나님의 계시가 있다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답답할수록 사방에 우겨쌈을 당할수록
           하나님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울이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이상
         즉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에 들리어지는 이상 
감옥, 이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 아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이제 마지막이 다가왔다고 아우성이지만 
희망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람은 
       “ 이게 이제 시작이다 ” 이렇게 믿고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수14:의 가데스 바네아 사건을 기억하시죠?
        희망을 보여 주는 상징적 사람 여호수아 갈렙은
        끝이 아니야! 이제 시작이라고 외칩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 받고 다시 시작하는 
         희망을 보여 주는 상징적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예레미야의 예언에 대해 시드기야 왕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3. 예레미야의 예언에 대해 시드기야 왕은 어떻게 반응하며 
       이런 행동이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이 무엇입니까?(3-5절)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를 옥에 가두었지마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은 더욱 구체적입니다. 
3-5절에 보면 
  [ 예루살렘 성을 바벨론 왕에게 넘기겠고
    시드기야 왕은 갈대아 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진바 되리니 
    시드기야를 바벨론으로 끌고 가서
    하나님이 돌볼 때까지 그기에 있으리라 ] 고 합니다.

그러니 시드기야 왕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 네가 어찌하여 이같이 예언하였느냐? ] 하고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옥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비록 예레미야의 예루살렘 멸망 예언이 
      시드기야 왕과 백성들에게는 듣고 싶지 않은 싫은 소리였지만
     하나님의 말씀 이였기에 담대히 전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끝내 화근이 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귀를 즐겁게 하는 말만 듣기를 원합니다. 
         자기를 칭찬하고 자기를 높여주면 
         자기 자존심을 살려주는 말에 귀를 갖다 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듣기 좋든 싫든 아멘이라고 해야 합니다.
시드기야는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적 인물입니다.   

한 때는 렘34:8에 보면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다급해지니깐
       시드기야 왕은 모든 백성과 한 가지로 하나님 앞에 계약을 맺고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롭게 하기로 선포합니다.  
사람은 다급하면 하나님 찾기 마련입니다. 
마침 애굽 왕 바로 느고가 유다를 돕기 위해 원군을 이끌고 애굽을 출발했다는 
소문을 듣고 바벨론 군대가 포위를 풀고 물러나니

렘34:11절에 [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복종시켜 다시 노비로 삼았더라 ]  
그러니 하나님께서도 다시 바벨론 군대가 다시 쳐들어오게 하겠다고 하며
렘34:17절 이하에 무서운 심판이 임할 것을 예고합니다. 
옛날에만 시드기야 왕이 있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시드기야는 우리 가운데 남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불순종의 상징적 인물만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듣기 싫고 자존심 상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는 청종하고 순종하는 교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예레미야가 옥에 갇히자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생각 밖에 말씀이 임합니다. 


4. 시위대 뜰에서의 에레미야의 행동은 
         우리에게 어떤 영적 의미를 말해 줍니까?(6-15절)

시드기야 10년은 B.C 587년으로서
       바로 유다가 586년에 바벨론에 완전히 망하기 불과 몇 달 전입니다.

그런데 6절 이하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 고 할 때

8절에 [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다 ] 고 합니다.
9절에 네 사촌 하나멜의 아나돗에 있는 밭을 은 70세겔에 싸서 
          증서를 인봉하여 토기에 담아 잘 보관하라 고 합니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서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말씀입니다.

이제 바벨론에게 나라가 망하면 토지를 다 빼앗길 터인데
    지금 밭을 싸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이런 때 밭이 무슨 소용이 있고 부동산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이런 때는 되려 현금이 필요하고 금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사촌 하나멜이 
감옥에 갇혀있는 예레미야에게 와서 땅을 사라고 할 때.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는 이런 일이었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레미야는 지금 투옥되어 있고 앞날이 어찌될지 알 수 없으며
     더욱 유다의 멸망이 임박한 상황에서 그가 비록 토지를 산다 해도
     그것이 자기의 소유가 된다는 보장이 없는 형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가 하나멜의 토지를 사는 행위는
유다가 비록 범죄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바벨론의 침략으로 멸망당하고 말 것이지만
       장차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다시 회복시켜 주심으로서
       본래의 토지의 주인이 다시 그 소유권을 행사하게 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15절 [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라 ] 
이 말씀은 지금은 멸망하고 비참한 포로 신세로 전략하고 말지만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한번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킴으로
   반드시 회복시켜 주실텐데 그 사랑을 확증하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니 예레미야에게 네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희망을 가지고 
       또한 백성들에게 희망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저는 예레미야의 행동을
    <시대를 일깨워 주는 상징적 행동>
    <그 시대와 사회에 희망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람> 이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모든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믿지 않을 때
           혼자 멸망의 참상을 바라보며 그로 인해 몸을 떨며 애통했으며
다른 모든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고 낙심할 때
     예레미야는 홀로 예루살렘의 회복을 보며 희망을 가졌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교회가 이러한 상징적인 행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위축하고 움츠려져 있는 시대에 
     희망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은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이 나라에 희망을 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한국교회에 희망을 줄 수 있습니까? 
개인의 이익을 띄어 넘어 역사의 무대를 바라볼 줄 아는 사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들어 무너진 잿더미를 딛고 역사를 재건할 것입니다.

축구감독 히딩크를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은 없을 것입니다.
대한민국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 축구펜으로부터 
         히딩크 하면 축구감독의 상징적 인물로 떠오르는 사람입니다.
사실 2002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4강으로
     2008년 유로컵에서 러시아를 4강으로 올려놓은 감독입니다.

왜? 우승한 스페인 감독보다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을까?
역대 우리나라 감독들은 문책을 하면
     선수나 협회의 지원 탓으로 자기 변명을 하지만 
히딩크는 한 번도 선수나 협회의 지원에 대해 
         그리고 자기 변명을 한 적이 없으며
주어진 환경 속에서 창조적 가치를 드러낸 감독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환경을 극복하는 감독이기에 그를 명장으로 꼽는 것입니다.

제가 2009년 희망을 보여주는 상징적 교회라는 표어를 정한 동기는
오늘 본문말씀에서 도전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왜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어려운 환경 가운데 처한 것을 보고도
   허용하시는가?
   그 답은 바로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너 같이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보여 주라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시대와 사회에 희망을 보여 주는 
     상징적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


5.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시대에 희망을 보여 주는 
          상징적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렘33:3절)

1)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비록 현실적으로는 너무나 이해 납득 할 수 없는 말씀이지만
   그러나 15절 
[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 
믿습니다. 순종하는 사람만이 
          희망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람이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드는 이상
         감옥이 끝이 아니라, 질병이 끝이 아니라 
        실패가 끝이 아니라, 부도가 끝이 아니라, 실직이 끝이 아니라
         시작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부르짖는 사람만이
   희망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람으로 일어날 줄 믿습니다.   

렘33:3절[너는 내게 부를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께 부르짖으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가 응답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크고 은밀한 일을 보여 주겠다는 것입니다.

혹 우리 가운데 시위대 뜰에 갇힌 에레미야처럼 
   어떻할 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 처한 사람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환경 때문에 좌절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 할렐루야~!

왜? 하나님이 부르짖어라 합니까?                                 
    상황이 급박하고 절망적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멸시킬 건데 
         이것, 저것 궁리할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렘33:4절 이하 말씀 보면
             바벨론 군대가 쳐들어 왔을 때 
             가옥의 기둥과 왕궁의 헐어서 막을 지라도 
                     부질없는 짓이라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살아가다가 절박한 일 당하거든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여기에 부르짖다 는 말은 <카라>라고 하는데
       목이 너무 말라 물! 물! 하며 절규하는 것을 말합니다. 

삿15장에 보면
이스라엘 사사 삼손이 나귀 턱뼈를 가지고 불레셋 사람 일천명을 죽이고 나니 
목이 심히 말라 죽을 지경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목말라서 할례 받지 못한 자의 손에 죽겠나이다. 하고 
물! 물! 하고 부르짖으니 우묵한 곳에서 물이 쏟아 나와 
       그것을 마시고 정신을 회복하였는데 
       삼손이 그곳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습니다. 

엔학고레 - 부르짖는 자의 샘이라는 말입니다.
엔학고레의 하나님, 오늘 내가 믿는 하나님도 엔학고레의 하나님으로 
          부르짖는 자에게 샘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문제 당하면 일단은 하나님께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렘29:12-14절
[너희는 내게 부르짖어라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며]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 

성구사전에 찾아보면 부르짖으라는 말이 무려 245번이 나옵니다.
즉 성경에 부르짖어 기도했다는 말이 245번이 나옵니다. 
이 말은 성경에 나타난 웬만한 믿음의 사람은 
   전부가 다 부르짖어 기도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다윗도 고백합니다. 시50:15절 처럼 여러 곳에서
[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 
다윗은 그의 생애에서 숫한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므로 그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이 시편은 그가 삶 속에서 터득한 신앙 고백입니다. 

해변가에서 인명 구조대원으로 일하는 사람에게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 해변은 피서객들로 얼마나 시끄러운데도 
  당신은 물에 빠진 사람 살려달라는 소리를 어떻게 듣습니까? ”

그의 대답은 
“ 물론입니다 시끄럽지요. 그러나 물에 빠진 사람이 외치는 고함소리와
   물에서 장난치며 떠드는 사람들의 소리는 같지 않습니다. 
   물에 빠져 휘젓는 손 모습과 뛰어 놀며 휘젓는 손 모습은 같지 않습니다.
   나는 물에 빠진 사람의 고함소리나 휘젓는 손 모습은
        바로 알아 볼 수 있습니다. ” 라고 하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반드시 들으십니다.
         나의 손놀림과 고함소리를 보고 들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응답하겠고
       내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 

미국의  emergency numbersms 911입니다.
       영국의 999입니다. 우리나라는 119입니다. 
우리나라도 119가 잘 되어 있어
    긴급재난 당하면 119 돌리면 됩니다.
   아무리 깊은 산 속이라도 지점 팻말이 있어
        119 눌러서 아무 지점이라고 하면 헬기가 바로 날라오는 것 있지요
그런데 이게 공짜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도 긴급공자폰 다이얼이 있습니다. 333입니다. 
        즉 예레미야 33장 3절 말씀입니다. 
이 번호를 돌릴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정을 들으십니다. 
   그리고 응답해 주십니다. 
적어도 우리교회 성도 같으면 천국 다이얼 333은 심비에 새겨져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 주시겠다고 합니다.
물론 여기서 크고 비밀한 일은 나중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일입니다뿐만아니라  
바로 우리 기도의 응답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지금도 크고 비밀한 일을 나타내 보여 줄줄 믿습니다. 
 

<결론>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른 말 하다가 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감옥이 끝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지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도저히 이해되지도 않고 납득할 수 없는 일
           즉 나라가 멸망할 판국에
               사촌 하나멜의 밭을 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합니다.
바로 그 시대 그 사회를 일깨워 주고 희망을 보여 주는 상징적 행동입니다.

2009년 우리 교회 표어가 
       희망을 보여 주는 상징적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부르짖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금번 신년 희망 특별 새벽기도회를 통해
     우리의 가정과 자녀들과 우리 교회가
            희망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건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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