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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마라나타의 신앙 (고전 16: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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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나타의 신앙 (고전 16:19~24)


오늘은 2008년 송년주일입니다.  신앙과 삶에도 한해가 마무리되고, 세상도 사회도 이렇게 저물어갑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한해를 돌아보며 가장 인상 깊었던 기억을 사람들의 머리에 각인시키기 위해 올해의 단어라는 것이 발표됩니다.  미국이 선정한 올해의 단어는 ‘bailout'이라는 말입니다.  ’구제금융‘을 뜻하는 말입니다.  올해 미국경제가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대변해 줍니다.  

대통령에 당선된 오버마의 선거 전략이었던 ’change‘를 제치고, 미국인들이 온라인사전에서 가장 많이 검색한 단어였습니다.  일본에서는 올해의 단어로 변할 '변(變)'을 선정했다고 합니다.  일본은 해마다 한자능력검정협회에서 발표하는데 올해 주가 폭락과 금융 상황 변동, 살충제 냉동 만두 사건과 같은 식품 안전에 대한 의식의 변화, 그리고 일본 총리와 미국 대통령의 교대 등 정치적 변화가 많았다는 이유로 이 단어를 꼽았습니다.  또한 대만에서는 올해의 단어로 어지러움을 나타내는 '란(亂)'을 꼽았습니다.  대만 국내는 물론, 세계의 돌아가는 상황이 올해는 심상치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나라도 올해의 단어를 선정합니다.  우리는 교수들과 전문인들의 여론조사를 통해 사자성어로 발표합니다.  올해의 사자성어는 ‘호질기의 (護疾忌醫)’가 선정되었습니다.  호질기의는 ‘병이 있는데도 의사한테 보여 치료받기를 꺼린다’는 의미로 과실이 있으면서도 남에게 충고받기를 싫어함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중국 북송시대 유학자 주돈이가 남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세태를 비판하면서 말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곧 우리 정치와 경제가 참 어려운 한해를 보내면서 정부와 정치권이 국민의 비판과 충고를 겸허히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부족했던 것을 지적한 것이라고 합니다.  아울러 이것은 문제가 더 커지기전에 얼른 귀를 열고 국민과 전문가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성경의 시대에도 그들의 단어가 있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대를 살던 1세기 성도들에게도 그들만이 사용하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한해만이 아니라 처음 예수를 믿고 죽을 때까지 그들 머리에 각인되었던 말이 있었습니다.  바로 ‘마라나타’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서로 인사할 때 이 말을 사용했고, 예배를 마치면 한주간의 삶을 승리로 이끌기를 다짐하며 사용했고, 그들의 간절한 기도와 소원 속에서도 마라나타를 외쳤습니다.  

마라나타라는 말은 아람어로서 ‘주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신약성경에 몇 번 나오는데 요한계시록과 본문에 나옵니다.  22절에 ‘주께서 임하시느니라‘는 말이 바로 마라나타입니다.  당시 성도들의 신앙은 ’마라나타신앙‘이었습니다.  한해를 마무리하고, 어려운 시대를 사는 우리가 배워야 할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마라나타의 신앙은 어떤 신앙일까요? 


첫째는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주여 오시옵소서, 주께서 임하신다’는 말에서 우선적으로 발견하는 그들 신앙의 모습은 기다림입니다.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그들의 신앙과 삶을 잘 대변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선적으로 마라나타의 신앙은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이것이 그들 삶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다린 것은 우선적으로 주님의 재림이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많은 성도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다시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굳게 믿었습니다.  자기들의 시대에 주님이 다시 올 거라는 기대감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마라나타의 신앙은 바로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신앙으로 표현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주님의 재림과 함께 기도의 응답을 기다렸습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더 간절하고 애달프게 기도했습니다.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하고, 때론 가슴을 부여잡고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기도의 제목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한순간도 기도 없이는 살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기도를 드리고, 응답을 기다렸습니다.  하루, 한 달, 일 년, 십년, 때론 평생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면서 낙심하지 않았고,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들어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간절히 기도했고, 응답을 기다렸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렸습니다.  참 아름답고 보기 좋은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회복을 기다렸습니다.  주님의 재림과 기도의 응답을 기다린 것도 귀하지만 회복을 기다리는 것이 그들의 환경을 이기는 삶의 원동력이었습니다.  

당시 그들은 정말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고난과 핍박과 시련이 혹독하게 몰아친 시대였습니다.  주님을 믿는 것은 곧 죽음과 연결된 시대였기에 더욱 비장한 각오로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인지라 고통이 점점 두려움으로 엄습할 때 결코 견디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마라나타’를 외쳤습니다.  모든 것을 다시 회복시키는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금의 고난은 앞으로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언젠가 모든 것을 다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비록 여기가 아니면 저기에서 더 큰 영광으로 갚아주실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마라나타, 즉 기다림의 신앙으로 살았습니다.

여러분, 이 신앙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지금 이 시대를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고 응답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것의 회복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건강도, 고민도, 일터와 사업도, 상처와 아픔도, 고난과 시련도, 다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자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의 간절한 기도와 귀한 믿음의 고백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시40:1-2)


둘째는 종말신앙입니다. 

마라나타는 기다리는 신앙이면서, 아울러 종말신앙입니다.  종말신앙이란 죽음을 아는 신앙을 말합니다.  그들이 마라나타를 외치면서 기다린 것에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로 맺어져 사는 것이 죽는 것이고, 죽는 것이 곧 사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종말 신앙을 가장 잘 갖고 있던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는 평생 주님을 믿고 귀한 일들을 감당하면서 종말신앙으로 살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롬14:7-8)  

그는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그리 다르지 않다는 소신과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또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1:20-21)  이것이 바로 바울의 신앙이고, 마라나타의 신앙입니다.  그는 늘 살든지 죽든지를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사는 것은 죽는 것과 다르지 않고, 죽는 것은 사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죽음을 알아야 진정으로 사는 것입니다.  죽음을 모르면 매일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지만 실제로는 죽어갑니다.  그러나 죽음을 알면 매일 매일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라나타요, 종말신앙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의도적으로 죽음을 멀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장례식장에 가기를 꺼려하고, 가서도 죽음보다는 노는 것에 열중합니다.  죽음이라는 단어조차 입에 오르내리려 하지 않습니다.  죽는 것을 말하면 아주 기분나빠합니다.  그래서 죽어가는 사람도 죽는다고는 말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고 우리가 죽지 않습니까?  죽음이 멀리 있는 것입니까?  죽음이 남의 이야기입니까?  죽음은 나와는 상관없는 것입니까?  죽음이 우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라면, 잘 살기 위해서라도 죽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죽음을 이기는 것이고, 우리 남은 생애를 좀 더 의미 있게 사는 법입니다.  

몇 주 전 저는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다가 의미 있는 프로그램을 하나 접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 살다’는 것입니다.  혹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출연자들의 생전장례식을 진행하는 프로입니다.  주인공이 천상의 방에 들어가 있고, 문상을 온 사람들이 주인공의 지난 삶을 추억합니다.  그러다가 장례식이 진행되면 평생 걸어온 주인공의 약력이 소개되고, 추모사도 이어집니다.  마지막에는 주인공의 유언장이 공개됩니다.  예능 프로그램이어서 진지하지는 않지만 추모사를 할 때에는 분위기가 아주 숙연해 집니다.  그러다가 유언장을 읽으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주인공도, 지인들도, 출연자들도 눈시울을 붉힙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주인공이 천상의 방에서 나와 두 번 사는 소감을 밝히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 프로그램이 시작된 이후 많은 연예인들이 출연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서 줄을 서게 되었다는 멘트까지 있었습니다.  저도 감동을 받아서 조만간에 유언장이라도 좀 써 놓아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지난주부터인가 이 프로그램이 없어지고, 다른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이유인 즉 시청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는 것입니다.  재미있게 보는 예능프로에 어울리지 않고, 죽는 이야기는 가능하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말로 재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른 형태로 바뀌었는데 전보다 영 감동이 떨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처럼 죽음을 싫어합니다.  의도적으로 시선에서 멀리하고, 그들의 뇌리에서 지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멀리한다고 멀어집니까?  애써 지운다고 죽음이 지워집니까?  결국 사람이 죽음을 모르니까 죽는 것입니다.

마라나타를 말하며 한 시대를 살던 성도들은 종말신앙, 죽음신앙으로 우뚝 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는 것과 죽는 것이 언제나 함께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카타콤의 지하 동굴에서 함께 믿음 생활하던 부모와 형제와 이웃이 죽으면 선반위에 그들의 시신을 올려놓고, 매일 보면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나도 언젠가 저기 저렇게 누우려니’ 고백하면서 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마라나타는 종말신앙입니다.  우리도 비관적이거나 염세적인 입장이 아니라 성경적인 관점에서 죽음을 아는 자가 되어 날마다 새롭게, 의미 있게, 날마다 천국을 향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참된 신앙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마라나타를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에 언급한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운데 가장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일꾼도 많고, 일도 많이 했지만 교회 안에 여러 분파로 나뉘어져 바울은 물론 주님의 마음을 몹시 아프게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바로 세우기 위해 편지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조목조목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회개하고 돌아서서 바른 신앙과 삶으로 사람들의 본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강력히 촉구합니다.  그런 서신의 말미에 마라나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특히 바울은 여기에서 마라나타를 ‘사랑’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이 진단한 고린도교회의 가장 큰 문제를 사랑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진정을 사랑을 아는 자들일진대 그 사랑이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으니 이제 사랑을 다시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2절에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말하고, 이어서 ‘주께서 임하시느니라’는 마라나타를 강조합니다.  진정 너희들이 주님을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에서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본문은 대부분 사랑으로 문안하고, 위로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다가 바울은 마지막 절에서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하면서 끝을 맺습니다.  바울도 결국 그들을 향한 사랑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전서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주님사랑, 형제사랑을 마라나타와 연관을 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매순간 마라나타를 고백하기에 이젠 참된 신앙, 참된 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마라나타의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삶이 바르고 참된 신앙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라나타의 신앙은 그냥 모든 것을 기다리면서 미래로만 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라나타의 신앙은 죽음을 아는 것에서만 머무는 것도 아닙니다.  마라나타의 진정한 신앙은 미래와 과거사이의 지금, 저기와 여기 사이에 지금, 이상과 현실사이의 지금, 이론과 실제사이의 지금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미래만 향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천국에만 초점을 맞추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론에서만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참된 신앙은 지금, 여기, 이 순간이 중요합니다.  결국 과거는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의 집약이고, 미래는 내가 앞으로 만들어가는 현재로 쌓아져가는 것입니다.  

마라나타의 참된 신앙은 오늘 이 순간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깨달음 앞에 얼마나 결단과 헌신으로 다짐하고 실천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장 잘 측정하는 잣대가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매주일 교회로 모입니다.  예배에 빠지지 않고, 기도의 자리에도 언제나 가까이 나아갑니다.  그런 우리가 매일 보는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용서 앞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작은 잘못을 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면서 사람을 비판하거나, 판단하는 것도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서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주장만 고집하는 것도 옳은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래서 마라나타의 신앙으로 남은 생애를 살기 원한다면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나의 형제와 자매를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따뜻하게 위로하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2006년 10월 2일, 미국 동부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시골의 학교에서 수십 발의 총성이 울렸습니다.  범인은 교실에 여자 아이들만 남게 하고는 연락을 받고 출동한 경찰이 오자 총기를 난사한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5명의 소녀가 즉사했고, 많은 아이들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범인도 자살했습니다.  학교 총기 사고가 많은 미국에서 이 사고는 비교적 규모는 작았지만, 당시 미국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곳이 아미쉬 공동체가 사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미쉬 공동체는 미국이라는 현대 산업문명의 최첨단 사회 한복판에서 전기, 전화, TV, 라디오, 신문 등 모든 과학문명의 이기를 버리고 농사와 더불어 자연 속에서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이들의 조상은 청교도와 같이 유럽에서 신앙의 박해가 있을 때 미국으로 이주한 전통적이고 독실한 기독교인들입니다.  이들을 잘 알고 있는데 이처럼 철저한 평화주의자들인 아미쉬 마을마저 총기사고가 생겼으니 이젠 어디에서 총기로부터 안전한 곳은 없음을 보여주어 충격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사고 이후 아미쉬 사람들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들의 자녀가 죽었고, 또 지금 죽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날 범인의 집을 방문하여 범인의 아내와 식구들을 용서하고, 위로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이 미국민에게 큰 감동을 준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당시 언론은 만약 911테러 때 미국정부가 아미쉬와 같은 방식으로 테러에 대응을 했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었을까, 어느 것이 진정 예수님의 방식이었을까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아미쉬들은 이러한 용서의 당위성을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우는 주기도문에서 찾는다고 합니다.  주기도문에 분명히 주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도 아이로 인해 슬프고, 때로는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마음이 아프겠지만, 주님을 사랑하고, 천국에 대한 소망을 굳건히 가지기에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이 시대에 마라나타의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마라나타의 신앙은 기다리는 신앙이고, 죽음을 아는 신앙이며, 그리고 참된 신앙입니다.  마지막주일에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깁시다.  그래서 우리도 버릴 것 버리고, 끊을 것 끊고, 해결할 것 미루지 말고 해결하여 새해는 마라나타의 신앙으로 승리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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