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신년] 예배의 성공자가 되자 (요 4:19~26)

  • 잡초 잡초
  • 593
  • 0

첨부 1


예배의 성공자가 되자 (요 4:19~26)   

 
1월에는 몇 가지 저의 목회에 중요한 주제에 대한 말씀을 드리면서 창립100주년을 준비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예배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배에 성공해야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감동, 감화를 받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인생이 변화됩니다. 

따라서 교회는 전 역량을 집중하여 예배에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예배가 살아야 교회가 살고, 예배가 살아야 교인들이 삽니다. 
예배가 습관화되고, 형식화되고, 죽어 있으면, 교회도 죽고, 교인인 우리도 죽습니다. 
문제는 예배입니다. 

예배의 회복이 없이는 삶의 회복이 없습니다. 
예배의 회복이 없이는 가정의 회복도 없습니다. 
예배의 회복이 없이는 교회 부흥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봅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먼저 저의 마음속에 일어난 질문은 ‘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예배 문제로 귀결되었는가?’하는 점입니다. 


1. 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예배문제로 귀결되었을까? 

요한복음 4장의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물로 시작합니다. 
7절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 물 이야기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에 관한 내용으로 전개됩니다.
1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그러다가 얘기는 여인의 남편 이야기로 반전합니다. 
16절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이 그의 가슴 깊숙이에 묻어둔 죄의 문제를 들춰낸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예배문제로 끝을 맺습니다. 

20절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사마리아 여인의 이 질문은 갑자기 뜬금없이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마치 대답하기 곤란한 문제를 피하기 위하여 이야기의 주제를 돌리려는 질문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질문은,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에 의하여 자신의 죄를 인식한 후 자신의 갈급한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마리아 여인은 구태여 예배 문제를 들고 나왔을까요? 
이것은 모든 영적인 문제가 예배의 문제로 종결된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인간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겠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중요합니다. 

K. Barth라는 신학자는 “예배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중대하고, 가장 긴급하고, 가장 영광스러운 행동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배가 그토록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드리는 장소에 대해서만 출25-40장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드리는 법에 대해서도 레1-27장까지 자세하게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많은 분량을 할애한 것은 예배가 하나님께 그토록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 선교, 교육, 봉사, 교제가 다 중요하지만 예배를 빼놓는다면 그것들은 다 껍데기일 뿐입니다. 

그래서 본문 23절에서는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찾으시느니라.’로 번역된 ‘제테오’는 ‘집요하게 찾다(seek)'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잃어버린 어떤 것이나 자기와 관계를 맺고 싶은 사람을 성심껏, 마치 수색하듯이 찾는 행동을 말합니다. 

‘찾으신다.’는 것은 그렇게 예배하는 자가 적다는 말이 아닙니까? 
‘찾으신다.’는 것은 그렇게 예배하는 자가 귀하다는 말이 아닙니까? 
‘찾으신다.’는 것은 그렇게 예배하는 자를 만나보고 싶다는 말이 아닙니까? 
‘찾으신다.’는 것은 그렇게 예배하는 자를 쓰시겠다는 말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인물 좋은 사람도 아니고, 공부 많이 한 사람도 아니고, 지위 높은 사람도 아니고, 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최고의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봉사를 많이 한다는 칭찬보다는, 한 가족처럼 분위기가 좋다는 칭찬보다는, 전도를 많이 한다는 칭찬보다는, 최고의 예배를 드린다는 칭찬을 받는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2.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할까?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의 형식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20절을 다시 보십시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말하자면, ‘예배를 어디에서 드려야 하는가?’ ‘예배를 어떤 순서로 드려야 하는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이 산’, 즉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스룹바벨 성전 건축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스룹바벨이 바벨론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할 때 북쪽 사마리아인들이 그 성업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그 요구가 거절됨으로써(슥4:1-6절) 갈등은 빚어졌고, 사마리아인들은 그 해결책으로 BC 322년에 그리심산에 자신들의 성전을 세운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사마리아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그 후 약 200년간 예루살렘 성전과 그리심산 성전이 같이 존속하다가 BC129년 유대 하스모니안 왕조의 힐카누스(Hyrcanus)에 의하여 그리심산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을 ‘축복의 산’으로 믿었기에 여전히 그곳을 기도처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를 물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배의 자세’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23절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절에 또 다시 반복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예수님은 예배의 장소나 형식보다는 예배의 자세를 중요하게 보셨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in spirit and truth)!’ 

① 여기서 ‘신령’이라고 하는 희랍어 단어는 ‘프뉴마티’로 ‘靈’으로 번역됩니다. 

즉 그것은 외적인 허례허식에 반대되는 ‘마음의 자리’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참 예배는 마음의 자리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마음자리에 죄의 용서에 대한 감격이 없다면,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가 없다면 진정한 예배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② ‘진정’이라는 희랍어 단어는 ‘알레데이아’로 ‘진리’를 나타냅니다. 

즉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참된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말이지요. 
앞에 나오는 ‘신령’은 유대인들의 예배에서 결여된 부분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배의 형식을 중요시 여겼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요구되었습니다.
반면 사마리아인들은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데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대로 예배드린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자기 편한대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성경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눅7:36-50절에는 한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여인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 여인이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용서받은 감사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이 여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 여인이 미쳤나?’ 

바리새인은 죽었다가 살아나도 이 여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바리새인이 여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그에게는 용서받은 감격이 없는데....... 
바리새인은 예수님께 안락한 자리를 제공하고, 적절한 예의와 범절로 접대하면 다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예배는 그게 아닙니다. 
마음자리에 죄의 용서에 대한 감격이 있는,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가 있는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어떻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까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몇 가지 실제적인 권면을 드리고자 합니다. 

① 예배 시작 십 분 전에 오자! 

예배시작 십 분 전에 오셔서 잠시 동안이나마 지난 한 주간 동안의 삶을 반성하며 “내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깨끗한 제물인가 아닌가.”를 점검해보시고, 주보에 나온 오늘 설교의 본문 말씀도 찾아 놓으시고, 묵상하며 마음 문을 열어놓으셔야 합니다. 

여러분!  
예배시간에 늦는 것도 버릇이고 습관입니다. 
고쳐야 합니다. 
대통령을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약속시간에 10분 정도 늦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가 없지요? 

예배는 하나님과 만나는 자리이며, 약속입니다. 
예배시간에 늦는다는 것은 정성 부족일 수도 있습니다. 

② 찬송도 정성껏 부르자! 

한 구절 한 구절 나의 신앙고백으로 나의 기도로 생각하고 정성껏 부릅시다. 
찬송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유행가처럼 불러 젖히는 것이 아닙니다. 

히13: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아주 주의를 기울여 찬송가 선곡을 하지만) 어떤 분은 어쩌다가 찬송가 가사가 5절로 된 찬송가가 나오면 한숨부터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 이 긴 찬송가를 언제 다 부르지......’ 

③ 대표기도를 할 때도 내 기도처럼 “아멘” “아멘”으로 화답하자. 

원래 기도는 모든 회중이 차례대로 다 드려야 하지만 시간 관계상 대표자 한 분이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표자의 기도는 바로 나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아멘으로 동의해야합니다. 
기도 시작할 때 잠들었다가 ‘아멘’소리에 깜짝 놀라 잠이 깨는 분이 계세요. 

④ 설교를 들을 때 ‘오늘 목사님 연설 잘 하시나 보자.’ 라는 생각은 아예 갖지 마시고, 하나님이 나에게 하실 말씀을 목사님이 대변한다는 사실을 믿고 사모하고 갈망하자! 

설교 시간에 주보에다 낙서나 하고........ 
오늘 주보에 오자탈자가 없나 조사하고........ 
그래서는 안 됩니다. 

어느 권사님이 설교 시간에 뭘 그렇게 받아 적더랍니다. 
목사님이 ‘저 권사님이 오늘 따라 말씀에 은혜를 많이 받는가 보다.’ 라는 생각에 예배 후 인사를 나누면서 “권사님 오늘 은혜 많이 받으셨지요?”라고 말했다지요. 
그랬더니 그 권사님이 얼굴이 새 빨갛게 되더니, “웬 걸요. 계 오야가 되어서 계 타는 순서 정했는걸요.”하더랍니다. 

⑤ 눈 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지 말자! 

할 것 다하고 남은 시간에 예배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눈먼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쓸 것 다 쓰고 남은 돈을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저는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구하십니다. 
가장 귀한 것으로 성막을 지어라! 
가장 온전한 것으로 예물을 드리라! 
가장 깨끗한 사람이 되어 예배를 드리라! 

⑥ 축도를 꼭 받자! 

역대 상 23: 13절에는 아론의 후손들에게 백성을 축복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아론은 그 자손들과 함께 구별되어 몸을 성결케 하여 영원토록 지극히 거룩한 자가 되어 여호와 앞에 분향하며 섬기며 영원토록 그 이름을 받들어 축복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은 이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축복할 권한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목사의 축도를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축도는 축복하는 기도입니다. 
어떤 분은 바쁘다고 축도하기 전에 집에 가는 분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늦었지만 축도만은 받겠다고 교회로 뛰어오는 분이 있습니다. 
신앙정도가 다릅니다. 

복음성가-보혈을 지나 


3. 예배를 잘 드릴 때에 어떤 축복을 받는가? 

왕상 3장에 보면, 솔로몬 왕이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일천번제를 드렸다는 것은 예배를 많이 정성스럽게 드렸다는 뜻이지요. 
하루에 한 번씩 제사를 드렸다고 해도 3년은 족히 걸렸을 것입니다. 

그 후 솔로몬이 받은 복이 왕상3:12-13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 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예배를 드릴 때 받는 축복은 지혜와 부와 영광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솔로몬을 예증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 즉 예배드리는 날을 ‘복 주는 날’로 정해 놓고 있습니다. 
출20:11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할 때 매일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와서 그들을 먹였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성경 내용이지요. 
그러나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지 않은 날이 있었습니다. 
출16:27 “제 칠일에 백성 중 더러 가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제 칠일은 하늘의 만나가 내려오지 않는 날입니다. 
‘제 칠일’, 예배드리는 날에는 사람이 아무리 땀을 많이 흘리고 수고를 많이 한다 할지라도 거두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날에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삶에 어떤 유익을 찾아 세상으로 들로 산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두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진리를 여러분의 직장생활에 적용하십시오. 
이 진리를 여러분의 사업에 적용하십시오. 
이 진리를 여러분의 학업에 적용하십시오. 
예배를 잘 드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와 부와 영광을 주십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배에 성공해야 합니다. 
예배가 살아야 개인도 살고, 가정도 살고, 교회도 삽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은혜 충만한 예배에 우리의 생명이 달려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새해에는 ‘예배성공 인생성공’이 되길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