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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세월을 아끼라 (골 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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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아끼라 (골 4:2~6)


2008년도 마지막 주일에 지나온 한 해를 돌아보며 하나님께 감사로 예배드립니다.  연말이 되면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금년 한 해 동안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자신을 점검하는 기회를 가집니다.   계획한 일이 만족스럽게 이루어져 뿌듯한 마음으로 새해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주어진 기회와 시간을 활용하지 못하여 후회와 아쉬움이 가득한 마음으로 한 해를 결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맘때가 되면 여기저기서 소위 성공한 사람들을 강사로 초청하여 효과적인 시간관리에 대한 세미나를 가집니다.  새해에는 황금 같은 시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기필코 성공하는 사람이 되어보겠다고 굳게 결심합니다.

중국 유학의 대가 주자는 <주문공문집> <권학문>에서 ‘소년은 늙기 쉬우나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 순간순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마라’ 그리고는 이어서 ‘연못가의 봄 풀이 채 꿈을 깨기도 전에 계단 앞 오동나무 잎이 가을을 알린다’ 하면서 세월의 흐름이 이렇게 빠르니 젊은 시절에 학문에 정진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정치가요 과학자였던 밴자민 플랭클린의 자서전을 보면 그의 13가지 삶의 가치관이 나오는데 그 중에 ‘절제, 검약, 근면’ 이라는 덕목들이 있습니다.   그 덕목들이 의미하는 것처럼 시간을 소중하게 여긴 사람이었던 그는 ‘시간은 금이다’는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젊었을 때는 시간의 중요성을 심각하게 의식하지 못하다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인생은 단 한번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부터 비로소 시간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하루 24시간, 일년 365일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 것이지만 동시에 누구에게나 제한된 시간입니다.  젊은이들이라고 하여 노인들보다 여유 시간이 한 시간 더 주어진 것도 아니고 더 느리게 지나가는 것도 아닙니다.  돈을 잃으면 다음 기회에 다시 얻을 수도 있지만 시간은 지나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이 제한된 시간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며 사는 것은 참 좋은 삶의 자세입니다.  돈은 다 쓰면 다시 벌 수 있지만 시간은 점점 줄어듭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쓸수록 내 수명을 깎아먹는 것과 같아서 ‘시간은 생명이다’ 말하기도 합니다.   

2008년 365일 가운데 362일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과거로 보내고 이제 오늘 반나절을 포함하여 나흘을 남겨두고 있는 오늘 아침 시간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와 함께 오늘 읽은 본문을 중심으로 성경이 교훈하는 그리스도인의 시간 관리법은 무엇일까 생각해보기로 합니다.    

바울은 골로새 지역에 있는 교인들에게 ‘세월을 아끼라’는 말을 합니다.  이때 세월을 아낀다는 의미는 시간에 대한 경제적인 가치나 물리적인 차원에서 절약하고 효과적으로 사용하라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지혜로운 시간 관리법입니다.   시간을 돈과 같은 가치로 여겨 ‘시간은 금이다’ 라고 했던 밴자민 플랭클린의 생활신조는 전형적인 자본주의 정신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시간을 소비하다, 시간을 헛되이 하다, 낭비하다 혹은 시간을 벌다, 절약하다’는 말들은 시간과 화폐를 동일시하는 이해에서 온 말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시간을 볼 때 우리는 일분 일초도 헛되게 낭비해서는 안되고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언제나 계획성 있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특히 학생들은 촌음을 아끼고 최선을 다하여 공부할 시기에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요즘처럼 환율이 하늘로 치솟는 어려운 시절에 고국에서 값비싼 학비와 생활비를 보내시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는 부모님을 생각한다면 졸다가도 정신이 번쩍 들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공부할 때입니다.  그러나 어디 학생들뿐일까요?   우리 모두가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성실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물음이 있습니다. 그렇게 아끼고 계획하여 시간을 사용하는데 과연 무엇을 위하여 그처럼 빈틈이 없이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어 살고 자투리 시간까지 허투루 쓰지 않는 진짜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생산성을 높여 경제적으로 살기 위하여, 그래서 더 많은 시간 더 많은 것을 얻어 더 많은 혜택과 편리를 누리려고 철저하게 시간을 관리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라도 한눈을 팔 수 없어 남들이 잘 때 공부하고 일하며 다른 사람이 쉴 때에도 나는 쉴 틈이 없이 일하노라고 할 겁니다.  이렇게 시간을 아끼며 사는 성실한 사람을 지독한 사람이라고 가볍게 평가절하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소중한 시간이므로 효과적으로 사용해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런 물질적 경제적 차원의 시간관리 방식이 정도가 지나치면 시간을 다스려야 할 사람이 시간이라는 굴레에 갇히고 족쇄에 매여 오히려 그 생명과 같고 황금 같은 시간의 노예로 전락해버리는 위험 또한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의 가치기준은 더 많은 황금을 모으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집중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투자하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금전가치를 창출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더 많은 보수를 받으며 상대적으로 덜 가진 자들 위에 군림하고 온갖 혜택을 누립니다. 그리고 덜 가진 자들은 언젠가 나도 그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하여 쉼 없이 일하고 싸움터와 같은 경쟁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발버둥을 칩니다. 억대 연봉을 받는 사람들과 일당 5만원을 받는 일용직 근로자가 시간당 창출해내는 금전가치는 비교할 수 없이 차이가 납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인간으로서의 가치마저 차이가 있는가 물으면 당연하게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것이 물질만능주의 세상이 말하는 가치관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가치기준 속에서 적응하며 살다 보니 생산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사람은 덜 소중하게 여기고 덜 존중하는 왜곡되고 비뚤어진 인간이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생산력이 없는 노인들이나 신체와 정신장애를 가진 약한 사람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불손하고 무자비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나의 이웃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 보기 보다는 나보다 열등하고 무능한 존재로 심지어는 자신에게 해가 되고 부담을 지우는 존재로 취급하는 범죄행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 속에서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인간이해는 물질적인 세계관과는 정반대입니다. 예수께서는 언제나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 죄인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들과 어린이들을 사랑으로 영접하시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어린이들과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 선천적으로 불구자가 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가까이 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가치기준을 친히 실천해 보이셨습니다. 물질적인 가치기준에서 보는 시간에 대하여 말하다가 인간이해까지 언급하게 되었습니다. 매사를 물질적 기준으로 보면 결국에 가서는 이런 것들이 서로 연관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말미에서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당부합니다. 기도를 요청하는 바울의 목적은 다름이 아닌 효과적인 복음 전도였습니다. 감옥에 갇힌 나를 속히 석방하도록 기도해달라던가 나를 억울하게 가둔 사람들을 처벌해달라는 기도 요청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이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여기서도 전도할 문을 열어주셔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기도해달라는 부탁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나를 위하여 기도하는 여러분들 역시 주를 알지 못하는 외인들을 대하여 지혜롭게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하였습니다.  그 지혜의 실천방법으로는 말을 할 때에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고 합니다. 그리하면 모든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말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 바울은 감옥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기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여러분은 자유로운 몸으로 외부 사람들과 교제할 때 지혜롭게 행동하여 복음 전할 기회를 선용하라는 당부입니다.   소금이 음식 속에 들어가 맛을 내는 것처럼 항상 은혜로운 언어생활을 하라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평소에 일관성이 있고 또 늘 단정하며 치우치지 않는 말을 함으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는 거칠고 험한 말과 거짓과 술수를 쓰는 말을 하다가 전도할 때는 얼굴을 바꾸어 거룩하고 고상한 언어를 사용하면 누가 그 사람의 말을 신뢰하고 복음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는 말은 결국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지혜입니다. 나는 사랑하는 가족에게 평소에 어떤 사람입니까?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친구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으로 이해되고 있습니까?  말에 실수가 많고 남을 곤란하게 하며 인색하고 자비심이 없는 이기적인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거룩한 천사처럼 말을 바꾸어 복음을 전한다면 그 사람을 보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 상상이 갑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내가 성공하고 남보다 더 잘살기 위하여 남을 짓누르고 빼앗으며 상처를 안기고 생명을 탈취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하여 나를 주는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삶의 철학 역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월을 아끼라는 오늘의 말씀은 성공하는 삶을 위하여 시간을 분초로 나누어 자투리 시간까지 허비하지 말고 부지런히 살아야 한다는 차원의 시간관리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실 줄 압니다. 내 앞에 주어진 기회를 선용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그 기회는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외부인들에게 주의 복음을 전할 기회입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시간들을 선하게 사용하되 모든 순간 그리스도의 사람답게 지혜롭게 행함으로 기회를 선용합니다.   

이 지혜는 기도에 항상 힘쓰라는 바울의 말처럼 감사로 기도하는 삶에서 나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기도하는 삶 그것도 감사함으로 깨어있으라는 말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이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기도하면서 그 심령이 깨어 있는 사람이 세월을 아끼는 사람입니다.   1세기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예수 믿는다는 것은 곧 고난과 핍박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감사로 기도하고 그 믿음이 잠들지 않고 깨어있는 것은 보통으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듣고 보고 믿은 신앙이 확고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그의 약속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세월은 비록 고난으로 점철되었을지라도 주님과 함께 하고 있기에 참고 견디며 고난의 시간을 순간처럼 여깁니다. 

몇 달 전에 잠시와 영원이라는 말씀을 드릴 때 시간에는 ‘크로노스’의 시간과 ‘카이로스’의 시간 개념이 있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크로노스적인 시간은 말 그대로 1분은 60초, 한 시간은 60분 그리고 하루는 24시간이라는 숫자로 계산되는 시간입니다.   그에 비하여 카이로스의 시간은 기회라는 차원에서 말하는 시간입니다.   크로노스가 양적인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질적인 시간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예를 들면, 졸린 눈을 부릅뜨고 아침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파수꾼에게는 먼동이 터오는 아침 시간이 더디 온다고 여기지만, 내일이면 사형장으로 끌려갈 사형수에게 떠오르는 아침 해는 급히 달려오는 죽음의 사자처럼 느껴집니다.    고리타분하고 항상 똑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목사의 설교시간은 30분이 세 시간처럼 지루하여 언제 마치나 하고 3분마다 한번씩 시계를 쳐다보고 또 보는데, 사랑하는 연인과 데이트하는 세 시간은 30분처럼 짧게 느껴져 시간을 뒤로 돌려놓고 싶을 만큼 아쉬워합니다.   물리적으로는 똑 같은 양의 시간인데 질적으로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시간 감각이 카이로스적인 시간입니다.   

한 해를 결산하는 2008년의 끝자락에 우리가 1년 365일을 얼마나 경제적으로 활용하여 많은 것을 남겼는가 계산해 보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의 자세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더하여 금년 일년 동안 나는 하나님 앞에서 질적으로 얼마나 좋은 열매를 맺었는가 살피는 지혜 또한 필요합니다. 일년 동안 내가 얼마나 멋지고 깔끔하게 일을 처리했으며 사람들 앞에서 자랑할만한 업적을 남겼는가 정리해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내가 그런 멋진 일들을 처리하면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나 이웃들과 그리고 가족과 얼마나 친밀한 교제를 가졌으며 그로 인하여 서로에게 격려와 기쁨을 주는 관계였는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무엇을 했느냐 보다는 그 일을 해온 나는 어떤 사람이었느냐는 물음입니다.   

지나온 일년 동안 하나님 앞에서 나는 누구였습니까?  배우자와 자녀와 부모에게 그리고 친구와 이웃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주님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는데, 이 세상의 풍조는 천하를 손에 넣으려고 죄 없는 수많은 영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평온한 가정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도 갈망하는 성공과 승리를 위하여 앞뒤 안 가리고 헤쳐나가는 동안 내 손에 들린 칼과 창에 찔리고 상하여 신음하며 죽어가는 영혼은 없었는가 먼저 살필 줄 아는 지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직 성공적인 결과를 중요시하는 이 세상 가치를 맹종하기보다는 그 과정 속에서 경험하는 하나님과 이웃들과의 만남과 관계에 우리의 눈을 맞추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작년에 이어 아직도 반기독교 정서가 여전히 강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이 놀라운 비밀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음을 따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소금의 맛을 잃어버렸기 때문 아닌가요?   아니, 복음대로 살았다면 그럴 리가 없는데 복음을 밀쳐두고 세상의 가치와 기준을 따라 성공하는 삶을 살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마지막 주일에 우리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금년 한 해가 주의 말씀과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행복한 시간들이었습니까?  그래서 일년이 언제 이처럼 빨리 지나갔는지 아쉬운 시간이었습니까?  '그리스도를 본 받는 교회’라고 정한 우리 교회의 목표처럼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 살기를 힘쓰면서 하나님과 이웃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셨습니까?   그리하여 나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향기가 외부인에게 전하여지고 복음이 한층 더 실제적으로 전하여졌습니까?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 은혜가 넘치는 말과 삶을 통하여 소금의 맛을 제대로 내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 바랍니다.    이것이 짧은 우리의 인생 가운데 세월을 아끼며 사는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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