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송년] 자유 (갈 4:4~7)

  • 잡초 잡초
  • 178
  • 0

첨부 1


자유 (갈 4:4~7)


1.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여러 신문과 방송에서 ‘오바마가 정말로 감사해야 될 사람은 로자 팍스’라는 말들이 쏟아졌습니다. 미국의 러셀 프리드먼이 쓴 <그들은 자유를 위해 버스를 타지 않았다>란 책을 보면, 백인의 인종차별에 저항한 흑인 여성 로자 팍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금부터 50여년 전만 하더라도 흑인들은 투표권도 없었고, 백인들로부터 많은 차별을 받았습니다. 백인 전용자판기가 있었습니다. 버스정류장도 백인전용 정류장과 흑인전용정류장이 구별되었습니다. 대학교 강의실에도 흑인학생들은 대기실에서 강의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 이후, 50여년만에 흑인 대통령이 나왔으니 세상이 변해도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하는 정도입니다. 
  
1955년 12월 1일, 로자 팍스(당시 41세)는 퇴근길 버스 안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종분리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몽고메리의 흑인 시민들은 로자 팍스의 재판일인 12월 5일 <버스안타기 운동>을 시작했고, 381일만에 흑인을 차별하던 인종분리법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버스 좌석에도 흑인은 맨 뒤에서부터 앉아오고 백인은 맨 앞에서부터 앉아왔는데, 그렇게 점점 많이 타면 만원이 되는 것입니다. 만원이 된 상태에서 흑인이 올라타면 서서 가면 되는데, 백인이 올라타면 흑인이 좌석을 비워주어야 했습니다. 

팍스는 백인 구역 맨뒤, 흑인 구역 맨 앞의 빈자리에 앉았습니다. 만원이 된 상태에서 백인 승객 1명이 올라탔습니다. 백인 운전기사가 뒷 자리 흑인을 향하여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모두 일어나! 자리를 비켜주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 다른 승객은 마지못해 머뭇머뭇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팍스는 일어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운전기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자리에 앉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내 권리요 .”라고 말했습니다. 
“안 일어나면 경찰을 불러 체포하라고 할 거야.” 
“그러세요.” 
그러자 로자 팍스는 체포되었습니다. 
로자 팍스가 경찰에 끌려갈 줄 알면서도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던 것은 자유가 그만큼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몽고메리 흑인들은 백인들과 동일한 시민으로서의 자유를 얻기 위해 버스 안타기 운동을 벌였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승리하였습니다. 


2. 우리는 지금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대통령을 마음대로 비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자유를 누리면 행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무겁고 답답합니다. 육체의 자유는 있지만, 영혼의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얽매여 있습니다. 

요한 8:34-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죄를 짓는 사람은 죄의 종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죄에 매여 살기 때문에 기쁨이 없습니다. 우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죄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롬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누가 여러분을 죄 있다고 정죄합니까? 사탄 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4-5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 아래” 라는 말은 율법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여, 율법의 노예, 율법의 저주 아래 있게 된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당시 갈라디아 교회의 상태를 아셔야 합니다. 바울 사도께서 갈라디아 교회를 개척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갈라디아 교회에 거짓 선생들이 들어와서 거짓 복음(가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구원받는다. 의롭게 된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가짜 복음을 전하는 거짓 교사들은 “아니다. 이방인인 너희들은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아야 하고, 구약성경의 율법을 다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 사도께서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가 갈라디아서입니다. 핵심 주제는 자유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었고, 참 자유를 얻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 대신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났다. 그러므로 더 이상 율법에 매일 필요가 없다.’ 

갈라디아서는 자유의 대헌장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의 율법을 다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떻게 율법을 다 지킬 수 있습니까? 그들은 모세오경에 있는 율법을 613가지나 되는 많은 규정으로 정리하였습니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규정이 248개이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규정이 365가지였습니다. 그 중에 하나인 안식일 규정만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39가지나 지켜야 안식일 규정을 지키는 것이 됩니다. 

한 예를 들면, 안식일에 무화과열매보다 무거운 것을 들게 되면 일이 됩니다. 아이를 출산하는 일과 같은 부득이한 일을 제외하고 일을 하는 것은 죄였습니다. 무화과열매 보다 훨씬 무거운 침상을 들고 가는 것은 안식일 법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정상적으로 생활하면서 어떻게 613가지나 되는 법규정을 다 지킬 수 있겠습니까? 전문적인 종교인들인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 외에는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법 규정은 지켰을지는 모르나, 그 법의 기본 정신인 사랑은 잃어버렸다고 예수님의 따가운 비판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율법에 매여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참 자유가 없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늘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신앙의 기쁨이 있을리 만무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율법에 매인 사람들을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율법을 보면서 우리는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아 죽임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율법에 매인 사람, 율법의 노예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를 두 가지에서 자유하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는, 죄에서의 자유입니다. 다른 하나는 율법에서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으면 죄책감에 사로잡힙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심으로 죄에서 벗어나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길은 예수님의 보혈을 믿고 우리가 지은 죄를 자백하면 됩니다. 

요일 1:7 “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또, 율법에서 자유해야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녀도 무엇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 이것은 율법입니다. 주일을 지켜야 한다, 십일조를 해야 한다, 교회에 봉사해야 한다, 전도를 해야 한다는 등. 

올해 마지막 주일을 보내면서 우리는 이런 율법들을 다 지키지 못한 무거운 마음이 있습니다. 이런 율법이 잘못은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참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우리 힘으로는 다 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내 의지로, 내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하면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바리새인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잘 하면 교만해지고 못 하면 열등감에 빠집니다. 잘 해도 문제고 못 해도 문제입니다. 
오늘날 교인들 중에 이런 율법주의자가 너무나 많습니다. 저도 한 때 그랬습니다. 그래서 교만했습니다. ‘나는 열심히 봉사했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나는 전도를 했다. 나는 금식도 했다. 나는 건축헌금을 얼마를 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교만한 것인지 알지 못한채 오랜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런 저와 같은 사람을 위하여 바울 사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말씀을 청년시절부터 너무나 자주 외웠고, 이 말씀에 은혜도 받았는데, 이 말씀이 저의 교만을 깨닫게 해주지는 못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이 말씀이 저의 교만을 깨닫게 해주는 말씀임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다. 이제는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오직 내 안에 예수님께서 살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의 은혜로 내가 사는 것이다. 나는 오직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님의 능력과 사랑, 그의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이것은 내가 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죽었으니까, 내 안에 살아계시는 예수님께서 나를 통하여 무엇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 내가 자랑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자랑할 뿐입니다. 이것을 깨닫는데 수십년의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참으로 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신학교에서는 신학적으로만 알았습니다. 율법으로 사는 게 아니라 은혜로 산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조금 몸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같은 분들이 많이 계실 것으로 압니다. 
율법으로 살지 말고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내가 뭘 하려고 하는 사람은 다 율법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고, 내 안에 살아계시는 예수님의 은혜로 하려고 하는 사람, 이 사람이 은혜로 사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율법으로 살지 말고 은혜로 살아라. 
율법은 내가 사는 것이고, 은혜는 주님이 사시는 것입니다. 
율법은 내 자랑이 되는 것이고, 은혜는 주님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3. 다시 본문 7절로 돌아갑시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같은 일을 해도 종과 아들의 차이가 있습니다. 종은 수동적으로 합니다. 시켜서 합니다. 아들은 능동적으로 합니다. 자기가 알아서 합니다. 여러분은 종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자유에는 두 가지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엇을 위한 자유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미 얻은 자유입니다. 이 자유를 얻은 성도는 이제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은 자유를 얻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참 자유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감으로 누리게 되었습니다. 죄에서 해방된 우리는 이미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참 자유는 복된 삶을 위한 자유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갈 자유, 섬기는 자유, 봉사의 자유, 전도하는 자유 등 주님을 위한 자유. 이것이 진정한 자유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갈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진정한 자유는 기꺼이 주님의 종이 되고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되어 섬기는 자유입니다. 

마틴 루터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기쁨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종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그럴 때, 자기중심, 자기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 자신에게 집착하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자아에 얽매인 사람, 자아의 노예입니다. 자신을 벗어나 기꺼이 다른 사람의 종이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매주 토요일마다 교구별로 돌아가며 교회당 청소를 하고 있는데, 저는 기꺼이 청소하며 섬기는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을 보면서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그렇게 일하면서도 기쁘게 일합니다. 1교구, 2교구, 3교구 모두 장로님들께서 앞장서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오셔서 청소를 하시는데 얼마나 감동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렇다. 이분들이 진정한 자유인이다. 

예수를 믿음으로 죄에서 자유하게 되는 수동적인 자유는 영원한 자유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한 자유, 거룩함을 위한 자유, 섬기는 자유 등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유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자꾸 소멸됩니다. 예수를 믿어 진정한 자유인이 되었지만, 마음이 괴롭고, 마음이 어두워지는 것은 적극적인 자유, 섬기는 자유,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4.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신앙의 모습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가 죄책감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기쁨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들의 자원하는 감사의 찬양과 헌신을 받기 원하십니다.
셋째, 율법적인 두려움에 기초한 신앙생활은 신앙을 경직되게 하고, 남을 정죄하게 하며, 자신을 교만하게 하며 자랑하게 합니다. 
넷째,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자원하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깨닫는 것으로부터 신앙을 시작하여야합니다.
다섯째, 그 은혜에 감사하여 다른 사람을 섬김으로 진정한 자유를 지속적으로 누리시기를 원하십니다. 
(오재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