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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땅 속에 묻어버린 달란트 (마 25: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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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속에 묻어버린 달란트 (마 25:14~30)


예전에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라는 유명한 학교가 있었습니다. 그 동리에는 아주 똑똑한 청년이 있었는데 집안이 몹시 가난해서 공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생계를 위해서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지만 아주 성실하고 충성스러운 청년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의 일과를 주인의 요강을 닦는 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요강을 얼마나 열심히 닦았던지 번쩍번쩍 빛이 나게 닦았습니다. 마치 밥그릇처럼 닦아놨습니다. 주인은 요강을 볼 때 마다 감탄하였습니다. 세상에 이런 머슴은 처음 봤습니다. 깨닫는 바가 있습니다. ‘이렇게 똑똑하고 성실한 청년을 남의 집 머슴일이나 하게 할 수 없지.’ 

이렇게 생각한 주인은 자기가 등록금을 대서 이 머슴을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유학을 보내주었습니다. 거기 가서 이 머슴은 열심히 공부하여 졸업을 하고 일본에 건너가서 유학을 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오산학교의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교장선생님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고당 조만식 선생님이십니다. 훌륭한 교육가요, 위대한 독립운동가입니다.

제자들이 종종 그에게 묻습니다. 선생님은 머슴 출신인데 어떻게 이렇게 교장선생님까지 될 수 있었습니까? 그러면 그는 웃으면서 말합니다. “여보게들, 성공하는 비결은 딴 데 있는 게 아니야. 자네들, 사회에 나가거든 요강부터 닦게나.” 요강을 닦는 것이 출세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남들이 가장 하기 싫어하는 일, 남들이 원치 않는 일들을 내가 열심히 할 때, 거기에 길이 열린다는 교훈을 남겨주었습니다. 그는 성실함과 충성스러움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 이 시대에도 바로 이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충성스러운 사람, 신실한 사람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가 바로 우리의 충성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어느 주인이 먼 나라로 여행을 가면서 종들을 불러서 자기 재산을 다 나눠주었습니다. 어떤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어떤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한 종에겐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아마 주인의 의도는 이것을 가지고 장사를 열심히 하던지, 투자를 하던지 해서 이윤을 많이 남기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즉시 그것을 가지고 투자를 했습니다. 장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곱절의 이윤을 남겼습니다. 다섯 달란트가 열 달란트가 되었습니다. 두 달란트가 네 달란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뭔가 기분이 좀 안 좋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섯 달란트 주는데 나는 왜 한 달란트 밖에 안 주는가?’ 그리고 그는 주인의 의도를 오해했습니다. ‘저 무서운 주인에게 괜히 잘못 투자하다가 원금마저 날리면 쫓겨나지. 그럴 바에야 땅 속에다 파묻어버리자.’ 그는 땅 속에 금 한 달란트를 파묻었습니다. 그리고 놀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때가 되자 주인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종들을 다 불러서 “이제 장사한 것을 가지고 와 보거라.”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에게 “제가 열심히 일해서 곱절을 남겼습니다. 여기 열 달란트가 있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내가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길 것이다.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것이다.” 칭찬했습니다. 축복했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종이 또 와서 네 달란트를 가지고 왔습니다. 주인은 똑같이 칭찬했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더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길 것이다.” 문제는 한 달란트 받은 종입니다. 그는 움찔움찔하면서 한 달란트를 가지고 왔습니다. 주인이 호통을 칩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나를 잘 몰랐구나! 네가 가진 이 한 달란트마저 뺏어서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줄 것이다.” “그리고 이 종을 내어쫓아서 바깥 어두운데에서 슬피 울면서 이를 갈게 하거라.”하고 그를 징계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이야기는 이 두 종류의 충성스러운 종과 악한 종의 이야기를 대조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칭찬받은 종이 있는가하면 책망 받은 종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입니까?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하늘나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때가 되면 다시 재림하십니다. 그 때 우리는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주님 앞에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그리고 이웃과 교회 앞에 어떻게 충성했는가를 검증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내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인정받을 것입니까? 아니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과 징계를 받을 것입니까?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보니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하면 주님 앞에 충성스러운 종이 될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는 충성의 영적 원리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원리는 청지기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청지기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다 하나님의 청지기들입니다. 청지기란 말은 자기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인의 것을 맡아서 관리하는 사람이 청지기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청지기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한번 봅니다. 14절 말씀을 읽어봅시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종들을 불러 소유를 맡겼는데 누구의 소유를 맡겼습니까? 자기의 소유입니다. 자기의 소유란 말은 종들의 소유입니까? 주인의 소유입니까? 주인의 소유입니다. 주인의 것을 종들에게 잠시 맡긴 것입니다. “너희들이 한번 맡아서 잘 관리해 보거라. 한 번 장사해서 이윤을 남겨보거라.”라는 말입니다.

예전에 시골에서 보면 좀 땅이 많은 분들은 자기가 농사를 다 못 지으니까 다른 소작인들에게 그 농토를 맡길 수가 있습니다. “자네가 10년 동안 좀 경작을 하게. 소출이 나면 8대 2로 주지. 8은 자네가 같고, 비료 값도 하고 생활비로 쓰고, 2만 나를 주게. 어떤 사람은 7대 3으로, 혹은 5대 5로 나누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원하면 다시 그 토지는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소작인의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청지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만물의 영장으로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온 우주를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이 자연을 다스리고 지배하도록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과 우주를 잘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잘 못 섬겼습니다. 청지기의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너무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해서 오존층이 파괴되어 암환자가 늘어나고, 저 북극의 빙하들이 막 녹아서 해수면이 높아지고 엘니뇨현상이 오고, 기후가 이상기후가 되었습니다. 공장에서 폐수를 배출해서 하천이 오염되어 고기가 죽었습니다. 지진이 일어나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여름이 길어지고, 사막화현상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청지기의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생명을 맡기셨습니다. 건강을 맡기셨습니다. 재능을 맡기셨습니다. 물질을 맡기셨습니다. 직업을 맡기셨습니다. 가족을 맡기셨습니다. 내게 있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다 내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의 것입니다. 내가 쓰는 동안에는 내 것처럼 쓰지만 때가 되면 주님 앞에 다시 다 돌려드려야 할 것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청지기의 삶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종조 착각한다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가족들이 여름휴가 때 콘도에 갈 때가 있습니다. 대명콘도니, 한화콘도니 가면 대게 그 안에 시설이 잘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밥도 해 먹을 수 있고, 가스레인지도 있고, 싱크대도 있고, 냉장고도 있고, TV도 있고, 침대도 있고, 이불도 있고, 베게까지 다 있습니다. 그저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다. 내 것처럼 다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올 때는 그대로 두고 와야 합니다. TV가 좋다고 가져오면 큰 일 나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떤 분들은 내가 쓴 밥그릇을 잘 닦아서 다른 사람이 쓰게 하는 것입니다. 수저도 잘 닦아 놓습니다. 다른 사람이 또 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내가 쓰고 있지만 때가 되면 나는 놓고 떠나가야 할 존재들인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내 것이라고 착각하는데 있습니다. 물질은 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내게 잠시 맡긴 것입니다. 이웃과 교회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라고 맡긴 것입니다. 많은 분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물질을 사기당해서 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 물질이 내 것이 아닌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식이 하락해서 그 물질이 깡통구좌가 된 이후에야 그 물질이 내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건강이 내 것인지 알았는데 암 선고를 받고나니까, 사형선고를 받고 나니까 건강이 내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생명이 내 것이 아닌 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청지기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을 때 건강이 있고, 물질이 있고, 시간이 있을 때, 기회가 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것을 잘 활용하는 청지기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용하셔야 합니다. 사용한 사람은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땅 속에 묻어둔 사람은 결국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남이 보지 못하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땅 속에 묻어두었다가 그는 결국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충성의 영적원리는 재능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기 재능대로 맡기셨습니다. 오늘 본문 15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각기 그 재능대로라고 하셨습니다. 재능이란 말 자체가 달란트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TV에 나오는 분들을 탤랜트라고 합니다. 탤랜트라는 말이 이 달란트에서 나온 말입니다. 

금 한 달란트는 육천 데나리온, 일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그러니까 하루 10만원으로 계산하면 1달란트는 약 6억이 되는 돈입니다. 적은 돈이 아닙니다. 돈으로 계산하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건 돈의 액수의 차이라기보다는 각자 사람에게 주신 재능의 차이입니다. 각기 재능대로, 각기 다른 은사와 기술을 주셨습니다. 각기 다른 환경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가운데 그것을 가지고 잘 활용해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께 이윤을 남겨드려야 합니다. 각기 재능대로 주셨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에게 준 것이 내게 없다고 불평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다 필요한 대로 적절하게 그 뜻대로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실 자기의 재능을 개발하지 못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재능을 그것이 뭔지 모르고 일생을 살다가 돌아가신 분들이 있습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그 많은 재능들을 공동묘지에 묻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 안에서 여러분이 가진 하나님이 주신 재능들을 발견하고 개발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 은사를 개발해야 합니다. 그 재능대로 우리는 봉사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내가 못 가졌다고 불평할 것 없습니다. 내게는 하나님만이 내게 주신 또 다른 독특한 은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다가 비참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비교하지 마십시오. 비교는 늘 불행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환경이 다르고, 재능이 다르고, 직장이 다르고, 가족이 달라도, 그 안에서 우리는 최선을 다할 때,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고, 하나님의 칭찬이 있는 것입니다. ‘왜 저 사람은 저런데 왜 나는 이럽니까?’ 아닙니다. 비교하면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미국에 한 목사님이 시골 동리에 목회를 하러 갔는데 아주 그 동네에 깡패로 유명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것을 마음대로 강탈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형이 어느 날 죽었습니다. 동생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에게 부탁을 합니다. “목사님! 우리 형님의 장례식을 좀 치러주세요. 우리 형님의 장례식만 잘 치러주면 앞으로 교회가 건축할 때 제가 한 몫을 헌금하겠습니다.” 그 목사님은 거부할 수가 없어서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형님에게 반드시 성자라는 칭호를 꼭 붙여주십시오.” 

참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장례식 집례를 거행합니다. 그리고 이야기 했습니다. 
“여러분! 아무개 형제는 이렇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는 살았을 때 행실이 바르지 못하고,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었습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이 빨리 불러 가신 것이 잘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땅 속에 이 형제는 여기 살아있는 이 동생에 비하면 그래도 성자와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멋진 귀결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위기를 무사히 극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비교하면 비참해집니다. 비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셔서 하나밖에 없는 존재로 지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게 주신 재능은 존귀한 것입니다. 그걸 가지고 주님을 충성함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첫 번째 원리는 청지기의 원리, 두 번째 원리는 재능의 원리, 세 번째 원리는 활용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재능을 잘 활용할 때 거기에 주님의 축복과 칭찬이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신체도 그렇습니다. 학교 다닐 때 주로 오른팔로 가방을 많이 들고 다녔습니다. 그럼 오른팔이 굵어집니다. 많이 쓰는 팔이 굵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신체부위의 어떤 부분도 내가 많이 사용하면 그 부분이 발전하고 강해집니다. 그러나 사용하지 않으면 쇠퇴합니다. 우리 재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재능은 땅 속에 묻어두면 안 됩니다. 그것을 가지고 활용할 때 그것이 점점 더 능력 있는 은사와 재능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의 은사가 있는 분들은 열심히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럴 때 더 능력 있는 기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봉사에 재능 있는 분들은 열심히 봉사하실 때 더 능력 이는 봉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전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활용하지 않고 땅 속에 묻어두면 사장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 교우들 중에 방언의 은사를 받은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사를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방언을 통해서 우리가 많은 시간 주님과 교제할 때 여러분은 더 신령한 은사들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신 은사를 활용하십시오. 그것이 축복인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럽니다. “저는 시간도 없고, 몸도 약하고, 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네요.”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토요일 우리 여신도회원들이 10시쯤 되면 여기 나오셔서 이곳을 다 닦고 쓸고 계십니다. 한번 와서 거들고 협력해도 그것이 아름다운 봉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은 꼭 새벽기도 나오셨다가 이 강단에 오셔서 여기를 깨끗하게 다 닦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누가 그 봉사한다고 말릴 사람이 없습니다. 또 어떤 집사님은 이 예배가 한 부 끝나고 나면 떨어진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돌아다니며 다 줍습니다. 다음 예배를 위해서. 아름다운 봉사입니다.

여러분! 그 봉사한다고 말릴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시비 걸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얼마든지 봉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추운 겨울에도 교통 안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주차 봉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주방에서 설거지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꽃꽂이하는 분들이 있고, 찬양, 성가대 준비하는 분들이 있고, 안내하는 분들이 있고 참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뭐든지 각기 할 수 있는 일들을 봉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샘이 솟아올라도 그 샘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 샘은 빨리 고갈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샘을 자꾸 사용할 때 그 샘은 더 아름답고 맑은 물을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장례식에 동행하는 것도 큰 봉사입니다. 성경에 보니까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라”고 했습니다.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함께 가서 울어주는 것 큰 봉사입니다. 

여러분들이 올 한해를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번 자신에게 되물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청지기였는가? 나는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왔는가를 한번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핑계대지 마십시오. 어떤 분들은 자기에게 이런 일을 안 맡겨서 못한다고 그러고, 이런 직분을 안 줘서 못한다고 그럽니다. 여러분! 봉사하고 충성하는데 직분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배에 참석해서 기도하고, 교회를 청소하고 전도하는데 직분이 그렇게 필요합니까? 꼭 집사님, 권사님이 되셔야만 봉사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재직은 재직으로서 의미가 있습니다만 평신도도 얼마든지 봉사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늘 핑계를 잘 댑니다. 이렇게 한 달란트를 땅 속에 파묻은 종처럼 주님 앞에 와서 핑계를 댑니다. “당신은 무서운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무서워서, 이 원금을 잃어버리면 혼날까봐 내가 땅 속에 파묻어 두었습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조엘 오스틴 목사님이라고 유명한 목사님이 계시는데 그분이 이런 재밌는 이야기를 합니다.

부부가 아침에 식사를 하는데 남편이 식탁에 앉아있자 부인이 프라이팬을 가지고 와서 남편 뒤통수를 한 번 칩니다. 남편이 깜짝 놀라서 왜 뒤통수를 치냐고 물었습니다.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합니다. “당신 주머니에서 미스 루키라는 여자 이름이 나왔는데 이게 누구 이름이야?” 남편이 엉겁결에 그럽니다. “내가 지난주에 경마장에 갔다 왔잖아. 그 말 이름이 루키래. 미스 루키. 말 이름이야.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더 큰 프라이팬을 가지고 와서 남편 뒤통수를 또 한 대 쳤습니다. “아니 왜 때리는 거야?” 그랬더니 “당신 말한테서 전화 왔어.” 이래저래 핑계를 대다가 결국 걸려버리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봉사하지 못하고 충성하지 못하는 분들 다 핑계가 있습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주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재능과 달란트, 기회를 다 땅 속에 묻어두고 있다가 결국 자기 충성까지도 묻어버린 것입니다. 땅 속에 충성을 묻어버린 사람들, 주님 앞에 징계와 책망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왕 봉사할 거, 열심히 봉사하십시오. 그것이 주님 앞에 떳떳하게 서는 길입니다.

어떤 큰 대갓집에 사는 하녀가 있었는데 하녀는 늘 힘들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저녁까지 일을 합니다. 마님이 늘 새벽 닭 우는 소리에 일어납니다. 일어난 마님은 하녀들을 다 깨워 새벽부터 일을 시킵니다. 하녀들은 ‘저 닭만 없어지면 우리 마님이 좀 늦게 일어날 텐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날 마님이 시장에 간 사이에 그 닭을 잡아서 삶아 먹어버렸습니다. 마님이 와서 닭을 찾으니 하녀들은 모른다고 오리발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다음날부터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전에는 마님이 밤에는 주무시다가 새벽에 닭 우는 소리에 일어나서 하녀들을 깨우는데,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깨우는 것입니다. 새벽 2시에도 깨우고, 잠에서 깨기만 하면 하녀들을 깨우는 것입니다. 하녀들은 더 괴로워서 후회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충성할 수 있을 때, 봉사할 수 있을 때 성실함으로 섬기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1947년 미국 시카고 근교에 위스콘신 주라는 곳에 태양계를 연구하는 천체연구소에 유명한 과학자로 첸드리스카 박사가 있었습니다. 이 첸드리스카 박사에게 어느 날 가까이 있던 시카고 대학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박사님! 겨울방학에 강좌가 있는데 박사님이 오셔서 좀 물리학 강좌를 해 주십시오.” 그래서 이 박사가 승낙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주 후에 또 전화가 왔습니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습니다.” “아니, 왜 그렇습니까?” “강의 신청을 받아봤더니 두 명의 학생만 신청을 했습니다. 한 두 시간을 차를 타고 오셔서 강의를 해야 할 텐데 그 두 학생 때문에 그 먼 길을 오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박사님은 “그러지 말고 그 학생들 신상명세서를 나에게 팩스로 보내주시오.”하고 그 학생들을 면밀히 살펴보고 승낙을 했습니다. “내가 강의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유명한 박사님은 겨울동안 그 눈이 많이 오는데 두 시간씩 차를 몰고 가서 두 명의 학생을 앉혀놓고 열강을 했습니다. 성실하게 강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습니다.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는 자리에 두명의 과학자가 섰습니다. 기자가 소감을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되었습니까?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그들은 말합니다. 바로 10년 전에 그 눈이 오는 겨울에 우리 두 사람을 앉혀 놓고 열강을 하신 첸드리스카 박사님 때문입니다. 그 분의 성실한 강의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적으면 적은대로 우리가 최선을 다할 때 거기에 기쁨이 있고, 거기에 열매가 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라면 적은 학생을 놓고도 내가 열심히 가르칠 때, 그 가운데 대통령이 나올지, 목사님이 나올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구역장님들도 그렇습니다. “목사님! 우리 구역은 구역식구 몇 명 되지도 않는데, 그 구역예배 드리면 뭐합니까?” 아닙니다. 구역식구 한 명이면 구역장하고 둘이 드리십시오. 두 사람이 열심히 성경공부하면 정말 그 분이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를 통하여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여신도회는 너무 인원이 적어서 재미가 없어요.” 아닙니다. 열 명이 넘으면 좋지만 세 명이 되어도 괜찮습니다. 적으면 적은대로 더 친근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나가서 전도하고 더 빨리 많은 여신도들을 확충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우리는 핑계를 대서는 안 됩니다.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따라 우리는 목적을 향해서, 우리의 삶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사무엘상 6장에 보면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블레셋의 벧세메스까지 가는 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마리의 소, 새끼소를 갓 때어낸 암소들입니다. 그들은 수레를 끌고 하나님의 법궤를 태우고 벧세메스까지 가는데, 뒤에서 새끼소들이 울어도 뒤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앞을 향해서 곧바로 나아갑니다. 벧세메스에 도착해서 하나님의 법궤를 내려놓은 후에는 그 수레를 깨트리고 이 소 두 마리는 재물로 잡아서 하나님 앞에 드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충성을 다한 아름다운 소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일생은 어떻게 드리시겠습니까? 똑같은 재능, 똑같은 기회, 똑같은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어떤 이들은 그 모든 것을 낭비하다가 땅 속에 충성까지 파묻었고, 주님 앞에 설 때에 책망밖에 받을 것이 없습니다. 많이 받은 자는, 많이 맡은 자는 많이 책망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집사님보단 권사님의 책임이 더 큽니다. 권사님보다는 장로님의 책임이 더 큽니다. 장로님보다는 목회자의 책임이 더 클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책임이 무겁다면 그 무거운 책임감을 내가 감당하기 위해서 더 노력하고 더 기도하고 더 땀 흘리고 더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직분은 계급이 아닙니다. 집사님이 권사 되었다고 무슨 계급장 하나 더 붙었습니까? 권사님이 장로님이 되었다고 계급장이 더 붙었습니까? 아닙니다. 더 충성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직분인 것입니다. 내가 그 자리에서 정말 최선을 다해서 주신 달란트대로 열심히 일해서 곱절의 이윤을 남길 때, 우린 주님 앞에 떳떳이 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올 한해를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충성하셨습니까? 성실하셨습니까? 방관자로 살아오셨습니까? 우리에게 새해가 주어졌습니다. 다시금 우리에게 새해를 주시는 주님 앞에 감사하면서 정말 새해에는 죽도록 충성함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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