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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나의 헵시바, 나의 쁄라 (사 6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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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헵시바, 나의 쁄라 (사 62:1~5)

 
믿음의 사람은 어려울수록 긍정적인 플러스 사고를 해야 합니다.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2008년도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면서 지난 1년 동안을 되돌아봅니다. 기뻤던 사건, 우리를 감격케 했던 사건들도 많이 있었지만 반대로 우리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고 슬프게 했던 사건들이 머리 깊이 뇌리에 남아 있었습니다. 

세계경제 금융의 위기와 국내 경제와 금융에 불어 닥친 위기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츠리게 하고 있습니다. 정부당국자에서부터 국민 한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마음속에 근심이 생기고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나갈 수 있을지 안타까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경제가 침체되고 구조조정을 통해 직장을 잃고, 생계가 위협을 받고 부동산과 금융재산의 가치가 추락되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냉가슴을 앓듯이 쓸어내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위기와 위협을 경험하면서 우리가 돈과 재물에 대해서 너무 욕심을 부리고 탐욕스럽게 모으려고 했던 모습은 없었는지 반성해 봅니다. 명예와 권력을 너무 열심히 추구한 우리의 교만함은 없었는지 돌아봅니다. 

또한 우리를 오랫동안 불안하고 멍들게 했던 사건도 있었습니다. 광우병괴담을 통해서 확대된 촛불집회 사건입니다. 그것은 국민건강이라는 거대 담론을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이데올로기적인 음모도 담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참여했던 사람이나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 마음속에 씁쓸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그러면서 나쁜 전염병처럼 우리 사회를 휩쓸고 간 것이 있다면 다른 사람에 대한 비난과 조롱, 헛소문들 때문에 올바른 판단력을 상실하게 한 것이 우리 자신의 아픔이었습니다. 
  
또한 우리 국민 모두를 안타깝게 하고 우울하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인터넷을 통한 악플로 인해 유명연예인들이 자살한 사건들입니다. 우리국민들은 감정적으로 민감하고 때로는 격해지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장점이면서 동시에 약점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이런 감정적인 격동이 일어나면서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피곤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감정적인 격동 이전에 이성적인 판단이 우선되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성적인 판단과 더불어 감성적인 열정이 있을 때 우리가 성숙한 민족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일을 위해서 특히 믿음의 사람들이 감당해야할 소중한 역할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판단과 사고와 깊이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부정적으로 판단할 수도 있고 긍정적인 판단과 정서를 가지고 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하늘의 계시에 축복이 있기 때문에 보다 더 긍정적인 정서와 생각을 가지고 사물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두 가지 유형의 사고가 있는데 마이너스 사고와 플러스 사고입니다. “나는 너무 가난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이것은 자기 삶을 포기하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은 분명 현실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현실이 고착되어 버리는 마이너스적인 사고입니다. 똑같은 현실이지만 이렇게 바꿔서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는 근면을 배울 수가 있었어. 나는 가난했기 때문에 나와 같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내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할 수 있었어.”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플러스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갖는 생각이 우리 삶 전체를 붙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생활의 고통 중에서도 기도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었던 위기와 위협은 우리들이 겪는 이 시대의 위기와 비교해보면 말로 다할 수 없이 어렵고 피폐했습니다. 70년간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면서 민족의 정체성을 서서히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지도자들이 소멸되고 있었습니다.‘이 민족이 다시 세워질 수 있을까?’,‘우리가 예배드렸던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수 있을까?’라는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현실은 암담하고 참담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망보다는 절망 속에서 탄식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선조의 죄악을 기억했습니다. 그러면서 암담한 현실은 자기들의 죄악과 불의, 허물의 결과인 것을 뼈아프게 느끼면서 통회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의 종이 등장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가지고 자기 민족을 향해서 선언했습니다. 암담한 현실을 보면서 사람들은 아무 희망이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슬피 울며 앞이 캄캄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비참함 속에 들어와 있고, 짙은 안개처럼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고 말할 때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여호와의 종이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나는 시온의 의가 빛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이사야 62:1) 

자기민족을 사랑한 사람은 시온이 다시 빛을 발하도록 기도했습니다. 예루살렘의 구원의 역사가 횃불같이 나타나도록 잠잠하지 않겠다는 것이 여호와의 종의 마음이면서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세계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비가 막 쏟아지고 폭풍우 칠 것 같은 날에 비행기를 타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렇게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데 비행기가 뜰 수 있을까?’라고 걱정을 합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이륙하고 높이 올라가다가 비를 뿌리는 구름을 뚫고 올라가면 갑자기 환한 빛이 들어옵니다. 아주 맑고 찬란한 빛입니다. 하늘은 보이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파랗게 펼쳐진 코발트 빛깔의 세계가 보입니다. 그렇게 캄캄하다고 생각했던 구름은 마치 남극의 설원과 하얀 눈송이처럼 깔려 있습니다. 

힘들 때일수록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변화될 기대를 가집시다.

우리의 인생에도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이 캄캄하고 가능성이 없다고 탄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저 하늘에 빛과 태양이 있으므로 언젠가는 구름과 폭풍우가 멈추고 다시 태양이 비출 날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현실을 접근해 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는 10%~20%에 불과합니다. 나머지는 우리의 생각에 따라 달라집니다. 우리의 생각이 부정적이고 절망적이면 10%, 20%의 문제가 내 삶을 100%의 문제로 짓누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이 주신 빛과 새 약속을 발견하면 나를 짓눌렀던 문제들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어려움이 나를 나 되게 했다. 그런 고난과 참담한 길이 내 인생을 업그레이드하고 내 성품이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했다.” 
  
우리는 이런 결정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내 자리가 너무 어둡지 않느냐? 무슨 빛이 있다고 말하느냐? 내가 이렇게 우울하고 음침한데 어떻게 내 얼굴로 밝은 미소를 지으라고 강요하느냐?” 우리 속에는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내 안에는 두 가지 모습의 내가 있습니다. 나를 학대하고 부정적으로 보며 내 주위 환경이 어둡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내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또 하나는 나를 격려하는 나입니다. 내게 희망을 주며 한번 도전해 보라고 격려하는 나입니다. 
  
육체의 공중부양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정신적인 공중부양이 가능합니다. 정신적이고 영적인 공중부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잠시 불평하는 나, 실망하는 나, 좌절하는 나를 잠깐 떠나 위에서 내려 보십시오.‘야, 그렇게 무너질 수 있냐? 다시 일어나라. 다시 하늘을 봐라. 네 세계, 구름 밑의 세계 속에서 멈춰 있지 말고 구름 위의 찬란한 태양을 봐라.’
  
이런 마음으로 우리는 나 자신을 위로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수직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수평적인 삶의 자리가 힘들 때 우리는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이 땅이 다시 변화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습니다. 
  
왜 우리의 인생을 포기합니까? 왜 우리가 가진 가능성이 절망이라고 말합니까? 그것은 이런 고난과 어려움이 지속될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지 않습니까? 저 찬란한 태양을 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하늘의 계시를 확인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렵고 힘들 때 부딪쳐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을 펴서 읽고 예배드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습니다. 

어려움에 처할 때 환경 탓, 부모 탓,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지 마십시오.

오늘 여호와의 종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생각을 깨닫고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는 또 여호와의 손에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이사야 62:3) 

사람들은 “너 별거 아니야. 넌 볼품없어. 넌 다 조각났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종이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손으로 만든 면류관이야. 네가 왕관이야. 너는 소중한 존재야.”이사야는 격려와 축복, 약속의 메시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절망과 낙심할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떤 태도를 하고 있을까요? ‘왜 이런 폭풍우가 내게만 불지? 왜 나에게만 이런 어려움이 닥치지? 왜 다른 사람은 잘 나가는데 자꾸 내게만 장애물이 생기지?’라고 환경 탓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 탓을 합니다. 누군가가 25살이 넘으면 부모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깨닫는 것은 20살이 넘으면 부모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는  왜 날 가난하게 태어나게 했어요? 왜 날 공부 못하게 만들었어요? 왜 내가 잘못된 길로 갈 때 막지 못했어요?” 이렇게 투정을 부리는 것은 10대까지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20살이 넘으면 내가 노력하며 공부해야 합니다. 내 손과 발이 땀 흘려 수고해야 합니다. 새로운 장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립니다.‘내가 안 되는 것은 저 사람이 내 것을 다 가지고 갔기 때문이야. 저 사람이 성공했기 때문에 내가 실패한 거야.’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삶의 주인공이 되기를 포기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수동적으로 상황에 자기를 맡기고 자기 합리화의 변명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신의 부정적인 삶의 태도를 변명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속에는 자존감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도전할 의식도 없고 부정적인 생각에 저항할 능력도 스스로 포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생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나’라는 존재는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공부해야 하고 내가 시간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내가 직장에 나가야 하고 내가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 엄마 아빠가 아무리 예수를 잘 믿어도 나는 도움을 받을 뿐입니다. 내 입으로 고백하며 예배드려야 합니다. 내가 기도하고 말씀을 펴서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내 입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중 하나는 창세기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빼앗아 가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고 걱정하시면서도 기다리십니다. 인간적인 표현으로 우리들 때문에 몸살을 앓으면서도 우리를 사랑으로 초청하십니다. 예수님도 강제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20)  

우리를 자랑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으십시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내면의 세계에서 결심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 세상의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내가 결심해야 합니다. 내가 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로 결심하게 하옵소서. 내가 이 지상에서 눈에 보이는 상황만 보지 않고 하늘의 세계를 바라보며 결심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결심하게 하옵소서.”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펴서 읽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해주십니다.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이사야 62:4) 

헵시바는 ‘너는 나의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쁄라는 ‘너는 나와 결혼한 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기쁨이다. 너는 나와 결혼한 자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는 모습을 보시면서 우리를 자랑하고 싶어 하십니다. 마치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를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자랑하고 싶어 하십니다. “보아라. 내 기쁨이다. 내 사랑하는 자다.” 
  
우리는 하나님께 다시 이 고백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는 하나님의 기쁨이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향하여, 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나의 사건이 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어떻게 내 삶에 변화를 주는 하나님의 사건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믿겠습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과 결혼한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영원한 신랑입니다.” 성경은 신랑이 신부를 기뻐하듯이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한해를 지내면서 가졌던 모든 무거운 짐과 아픔들, 외로움과 슬픔들, 탄식과 미움들, 분노와 의심을 다 털어 보내십시오. 그리고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내 사랑하는 자”, “나의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신 약속을 가슴에 안고 다시 생명의 주님과 더불어 인생을 새롭게 열어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나의 헵시바, 나의 쁄라, 나의 기쁨. 나의 사랑”이라고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우리 삶에서 경험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눈으로 외적인 것만 보면 부정적인 것만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가슴에 품으면 위기와 아픔이 언젠가는 사라지고 더 큰 미래의 약속이 우리에게 펼쳐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집니다. 이러한 믿음의 약속을 품고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자,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로 세움 받을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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