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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창립] 건물보다 교인이 더 좋은 교회 (행 2: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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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보다 교인이 더 좋은 교회 (행 2:42~47)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

오늘은 우리 교회 재창립 5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저는 오늘 교회에 대한 분명한 주제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 “건물보다 교인이 더 좋은 교회”는 4년 전 예배당 본당 공사 완공을 위하여 건축헌금을 작정했던 주일의 설교 제목이었습니다. 다시 이 제목으로 설교하려는 것은 이것이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약속이기도 하고 또 사명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제 마음 깊은 곳에는 교회에 대한 깊은 상처가 있었습니다.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이 좋은 것은 잘 기억되지 않고 나쁜 것은 오래 기억되어서 그런지 목사 아들로서 어려서부터 교회에 대한 기억은 어른들이 늘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학생 때, 아버님은 교회 담임을 포기하고 청년 사역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교회를 담임하는 것이 무척 힘든 일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 후 아버님은 다시 목회를 시작하셨는데 나이가 드신 후 시작하신 개척이라 어려움이 많으셨습니다. 결국 개척이 너무 무리가 되셨는지, 어머니는 제가 신학교 4학년 때 심장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목사 안수를 받을 때 기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나의 숙명이라고 여기고 목사의 길을 걸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요한일서 4장 7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하신 말씀을 읽고 갑자기 서러움이 밀려오듯이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저는 그 때까지 제 마음 깊은 곳에 그렇게 큰 상처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은 제 마음의 상처를 건드리시려는 것이 아니라, 제 안에 있는 상처를 치유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에 사람에 대한 원망, 아픔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목회에 대한 꿈이 생겼습니다. 싸우는 교회라는 쓴 뿌리가 사랑과 기쁨이 충만한 천국같은 교회를 세우라는 소명이 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지금 우리 교회와 비교하면 외형으로는 너무나 초라한 교회였습니다. 교인 수나 건물이나 사역자나 어느 하나 변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교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는 것에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 교회인데, 오늘 성경을 읽어보면 그렇게 부러운 교회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읽은 것처럼 초대교회는 너무나도 놀라운 교회였습니다. 예배의 감격이 있었고 기도의 능력이 있었고 말씀을 사모함이 있었고, 기사와 표적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는 성도들이 서로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천국 같은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지금도 해결이 안된 문제인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빌레몬서에 보면 주인과 종의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엄격한 신분의 차별이 있었던 당시에 말입니다. 44-45절에 보면 부자와 가난한 자의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한 마디로 교인들 사이에 내 것 네 것이 없어지고, 서로 필요한대로 함께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국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초대교회는 정말 십자가 복음이 성도들의 삶 속에 그대로 나타나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구원받은 자가 늘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영생의 길을 묻는 부자 청년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너는 나를 좇으라.’는 말씀을 하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재산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예언이 초대교회에서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로마서 6장 6절에서 우리 옛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옛 사람이 죽지 않은 사람은 땅의 보물을 내어놓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옛 사람이 죽고 새 생명이 되신 예수님으로 살면 초막과 궁궐이 큰 차이가 없게 되고 가난함과 부함이 별 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정말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성령을 받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그 증거입니다. 
 
문제는 지금 이런 교회가 다시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지 못합니다. 이것은 성경에나 나오는 이야기지 실제로는 그런 교회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성경이 말하려는 것은 이런 교회가 결코 꿈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이런 교회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그저 알게 하기를 원하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지금도 우리 가운데 이와 같은 교회가 설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려는 것일까요?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지금도 교회는 이렇게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가 어떻게 이런 교회가 됐습니까? 사람들이 좋아서 그랬습니까? 그때는 사람들이 너무너무 좋은 형편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렇게 순해지게 된 것입니까? 초대교회에 이런 역사가 일어난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 때문입니다. 환경과 사람과 조건을 뛰어넘어서 성령이 역사하시니까 이런 교회가 된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금도 얼마든지 그런 교회가 세워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이야말로 성령의 역사가 더욱 강하게 나타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뿐만 아니고 지금도 우리 가운데 너무나 분명하게 전적으로 역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분명하게 갖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와 같은 교회가 지금도 세워질 수 있다는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1970년대 시카고에 있는 트리리티 신학교 교수였던 길버트 빌지키언이 학생들에게 “교회는 세상에 유일한 희망”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사도행전 2장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자주 언급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세워졌고 성도들 가슴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 했고 핍박과 환란 가운데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하였으며 모이기를 힘썼고 가난하고 약한 교인들의 삶을 서로 책임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공동체에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능력도 감동도 사랑도 없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날마다 더 증가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왜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나는 초대교회와 오늘의 교회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그때의 성령님과 지금의 성령님이 다르기 때문일까요? 성령의 능력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성령님은 똑같은 분이십니다.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지금도 성경 말씀대로 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지금도 진실로 믿고 성령님에게 완전히 순종하는 사람이 지금이라도 있다면, 성경에 약속하신 이 교회는 미국 땅에 그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감히 제안합니다. 성령님은 같은 성령님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동일한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정말 하나님께 순종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지금도 그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그 누군가가 이 비전의 횃불을 가슴에 담기를 바랍니다."
  
이 말이 거기 있던 학생들 중에서 한 사람의 가슴 속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렇구나! 하나님이 나를 이 일에 부르셨구나!' 그 사람이 바로 유명한 빌하이벨즈였습니다.
  
그가 20대 초반에 이 불을 가슴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처음에는 어려움이 참 많았습니다. 분열되는 갈등도 겪었습니다. 예배당 건축을 위해서 수많은 빚을 져야만 했습니다. 십년 동안 함께 일하였던 동역자들이 하루 아침에 떠나가는 고통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15년이 지난 다음 정말 '세상에 유일한 희망이 교회구나!' 라는 것을 검증해주는 교회가 섰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카고에 있는 유명한 교회인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처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까 이 말씀은 그대로 된다고 하는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이 중요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 한국 교회 성도들 안에 교회에 대한 아픔이 있습니다. ‘왜 교회가 이렇게 되어야 하는가?’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 안에 있는 교회에 대한 아픔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교회에 대한 사명으로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교회에 대한 아픔 때문에 교회를 위해서 더 간절하게 기도하고 그리고 그 기도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교회가 서는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비판하기만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천국같은 교회를 반드시 세우실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천국같은 교회, 이것은 제가 원하고 여러분이 원하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이 더 원하십니다. 

제가 예배당 완공을 위한 공사를 시작하려 할 때 큰 고민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 교회에 부임하기 얼마 전 폴란드에 선교 탐방을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폴란드  곳곳에 세우진 교회 건물은 다 크고 웅장했습니다. 교회는 재산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폴란드 사람들은 너무나 가난했습니다. 저는 그 때 교회 건물이 크다고 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 아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배당 건물 크게 짓는 계획을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 부임해 오게 된 것입니다. 이 교회에서는 엄청난 부채를 안고 예배당 공사를 마무리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큰 예배당을 지었다고 하나님께 영광이 돌리는 것이 아님을 보게 하시고, 왜 저에게 이런 큰 예배당 건축을 맡기셨나?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저희 교회 예배당 완공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건축은 본당만 남겨 놓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겐 오직 한 길 뿐입니다. 하루 속히 본당을 완공하는 것 뿐입니다. 건축해야 한다는 열정으로 해도 쉬운 일이 아닌데 할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런데 건축을 위하여 기도하다가 크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안목이었습니다. 저는 건축비 걱정을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건축비는 걱정거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걱정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깨닫게 하셨습니다. 교회 건물이 너무 크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건물은 큰데 교인들의 믿음은 작고 기도도 적고 사랑도 작을 때 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본당이 커도 교인들의 믿음이 본당 보다 더 크고,. 민족을 위한 기도가 본당보다 더 크고, 원수도 용서하고 어려운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본당보다 더 크면 아무 문제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큰 교회는 큰 교회 역할이 있고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 역할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사명을 주셨습니다. ‘너는 많은 공사비나 화려한 설비를 갖추어 짓는 예배당보다 교인들이 더 좋은 교회를 세울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이 그렇게 하시기 원하시는데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예배당 공사를 재개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교회로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그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건물이 아니라 교회다운 교회를 세워가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소홀히 하면 안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이 교회의 비전이 여러분 모두의 사명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주신 마음이라고 믿는다면 여러분, 속회에 참석하고 속회를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와 같이 세우는 일을 위해서 헌신해 주시기를 간절히 권합니다.
 
본문에 보면 초대교회는 교회에서도 모였지만 또 집에서도 모였다고 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46절)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 교회는 엄밀히 말하면 지금 우리가 주일예배를 드리는 이런 예배당 교회가 아니고 집에서 모이는 속회였던 것입니다. 초대교회와 같은 교회가 속회입니다. 

여러분이 교회 전체를 사도행전과 같은 교회로 어떻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속회는 얼마든지 성경적인 교회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이 부르셨다고 믿는다면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여러분이 정말 헌신한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신다고 믿는다면 여러분 속회는 사도행전과 같은 교회가 됩니다. 그리고 그 속회가 모여서 선한목자 교회가 그와 같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교회의 변화는 속회에서 시작됩니다. 여러분이 교회 전체를 변화시킬 수 없지만 속회는 얼마든지 성경대로 만들 수 있습니다. 

어느 교우가 속회 예배를 안 나오는데 이유가 부담스럽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기 집에서도 모여야 하겠는데 집 형편을 공개하는 것도 부담스럽고 대접하는 것도 부담스럽고 집을 치워야 하는 것이 귀찮고 사람과의 관계가 어려울까봐 아예 속회에 나가지 않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주일예배만 열심히 나오는 분이 있습니다. 참 안된 분입니다. 그는 진정한 교회의 축복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속회를 소홀히 여기는 사람은 가정이 부담스럽다고 혼자 사는 사람과 같습니다. 속회에 참석하는 일이 신경 쓰이고 부담스럽고 귀찮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회는 영적으로는 가정과 같습니다. 

여러분, 선한목자 교회에 등록하셨지만 속회 안에 연결되지 않으신 분들은 엄밀히 말하면 선한목자 교회 교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교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아니고 교인들과 성도의 교제로 연결되어져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속회 관계가 교인 됨의 기초인 것입니다. 

여러분, 가족을 생각해 보십시오. 가족이 있다는 것이 어떤 때는 부담스러울 때가 있지 않습니까? 가족이 있기 때문에 어떤 때는 책임을 져야 되지 않습니까? 가족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 어떤 때는 마음대로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가족을 버리고 혼자 있으면 행복합니까? 그렇지 않듯이, 여러분이 진정한 교회 관계를 맺어놓지 않으면 교회를 통해서 주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 놓져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천국에 가기 전에 이 세상에서 천국을 조금이라도 맛보게 하기 위해서 모이게 한 곳이 교회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속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혼자서 누리는 천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혼자 있는 곳은 주변 환경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천국이 될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가졌느냐, 얼마나 주변 환경이 좋으냐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닙니다. 함께 누리고 즐거워 할 사람과 함께 있어야 천국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주시는 것은 전적으로 성도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기대를 가지고 속회에 참석해 보면 처음에는 낯설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고 사람에게 찔리기도 하는 단계를 거칩니다. 그러나 이 때 포기하면 절대로 천국을 누리지 못합니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 천국에서 만날 때 부담된다, 신경 쓰인다, 귀찮다고 속회 관계를 내려놓고 혼자만 있었던 분들은 얼마나 마음이 불편하겠습니까? 조금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단순히 그저 은혜로운 속회에 참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 같은 교회를 만드는 사명으로 속회에 오시기 바랍니다.  이 일은 여러분의 능력으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믿음과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 교회가, 속회가, 오늘 성경에 나오는 초대교회 같이 될 수 있습니까?
성령의 역사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목사님이 빌리그래함 목사님에게 “교회에 부흥을 일으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그 목사님에게 대답하였답니다. “목사님 자신이 방해만 하지 않으면 됩니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환경 여건 사람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가 있다면 오직 하나입니다. 우리 자신이 십자가에서 처리되지 않는 것만 문제일 뿐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만 분명히 붙잡고 오직 성령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반드시 천국같은 교회가 이루어집니다. 
속회에 참석하는 것도 성령님께 순종해 보시기 바랍니다. 

유명한 소설가 정연희씨는 인텔리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동안 겉으로는 화려했지만 내면으로는 철저하게 실패자의 삶을 살면서 방황했었습니다. 그때 복음을 전해주는 친구들 때문에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확신없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런 중에 그녀가 큰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었는데. 생명은 잃지 않았으나 얼굴은 몹시 흉하게 일그러졌습니다. 

그녀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고쳐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얼산 기도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그 분위기에 적응이 안되는 것입니다. 다 광신자같았습니다. 북치고 손뼉치며 찬송하는 것도 소리 지르며 통성기도하는 것을 보면서 ‘이 자리는 내가 올 곳이 아니다. 나는 이런 사람들과는 달라. 이 무슨 경건치 못하고 교양없는 사람들의 광란이란 말인가.’ 하고 기도원에서 내려오려고 하는데 왠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만을 책망하시는 것 처럼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매일 맨 뒷자리에 참석하여 집회 구경꾼이 되었습니다. 말씀도 듣고, 간증도 듣고, 방언하는 것도 보고, 예언하는 것도 보고, 입신하는 장면, 통회하는 모습 등을 보았지만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우습기만 하였습니다. 통성기도할 때 모두 지붕이 떠나가라고 목숨을 다해 “주여!”를 외치는데. 그녀는 조용하며 교양있는 여자가 되어 차악 가라앉은 목소리로 들릴듯 말듯 “주님!”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날 집회 때 정연희씨는 비참한 심경이 되어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나는 왜 이럴까?’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니 자기 자신만 이방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에는 처음으로 앞자리에 나가 앉았습니다. 드디어 통성기도 시간이 되었습니다. 강사 목사님께서 “모두 두 손을 들고 주여! 부르짖되 세 번을 그렇게 하시오!” 하였을 때 순간 고민이 되었습니다. 도무지 남들 처럼 두 손을 들고 소리를 지르지는 못할 것 같았습니다. 창피해서 입니다. ‘나 같은 여자가 어떻게 저 사람들 처럼 한단 말인가?’ 

그 때 그녀는 ‘이것은 아니다!’ 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자신이 순종을 하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날은 급했습니다. 목숨이 걸려 있다고 느껴질 만큼 급박했습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하다가 ‘해산하는 고통으로 부르짖으라.’하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녀는 ‘그렇다. 죽는다고 생각하자! 죽자! 죽자! 죽는데 수치가 어디 있고 자존심이 어디 있나?’ 그래서 통성기도를 알리는 종소리가 나는 순간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두 손을 한껏 쳐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죽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만 완전히 복종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절대적인 표현으로 “주여!” 하고 소리쳤습니다. 태어난 이래 최초로 주님을 진심으로, 정말 진심으로 갈망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제대로 불러 본 것입니다.
 
그 한 마디의 부르짖음으로 정연희씨에게는 성령의 역사가 임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잊어버렸을 정도로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고 그 자리에서 모든 인간적인 교만, 가식, 고집, 어리석음을 다 회개했습니다. 더러운 것이 다 쏟아져 나왔습니다. 언제 집회가 끝났는지 모르게 끝났습니다. 
그런데 방으로 돌아와서 보니 교통사고로 흉하였던 얼굴이 깨끗이 고침 받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의 역사는 단순히 사람의 얼굴만 치유하겠습니까? 얼마든지 교회도 치유하는 것입니다. 내 얼굴이 이그러졌을 때만 안타깝게 성령을 갈망하며 기도할 것입니까? 교회 얼굴이 이그러진 것을 위하여 기도하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정연희라고 하는 소설가가 경험했던 성령 체험을 여러분에게 들려드리고 싶은 것이 아니고, 내 얼굴이 일그러진 것으로 인해서 그렇게 안타까울 수 있다면 교회 얼굴이 일그러진 것으로 인한 안타까움은 왜 안 생기느냐 말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교회 이미지에 대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 얼굴이 일그러진 것 이상으로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언제까지 이렇게 가야 합니까?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어야 하는데. 이 민족의 소망은 정말 교회 밖에는 없는데 하나님 언제까지 이렇게 가야 합니까?” 

여러분, 먼저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바로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바라볼 때 빛과 소금으로 보도록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그 교회 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 에대한 이야기를 듣고 감동 받아서 날마다 사람들이 더해 오도록 하나님은 계획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그것을 진짜 자기 문제 처럼 여기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내 얼굴 일그러진 것 고쳐달라고 부르짖는 것 이상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세상에 알려져있는 모습 바로 잡아지도록 믿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에 대하여 상처가 있습니까? 그러면 그것을 여러분에게 주신 상처를 사명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것 때문에 교회를 세워야 하는 것 속회부터 시작하십시오. 속회에 참석하지 않고 계신 분 있습니까? 은혜로운 교회에 내가 그냥 참여하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운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사는 길입니다. 

교회에 대한 마음에 부담을 주신 분이 있습니까? 선한목자 교회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까?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마음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이 시간에 우리 하나님 앞에 성령의 역사를 기도합시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정말 건물보다도 교인이 더 좋은 교회가 되게 해주옵소서.” 이것은 만만치 않은 기도 제목입니다. 우리 교회 건물 규모나 시설이 모든 사람들이 다 부러워할만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교인은 그보다 더 좋다. 이것은 꿈과 같은 사명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해주실 일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제 기도하실 때 교회를 위해서 오늘 간절한 기도를 부탁 드립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는 교회가 서게 되기를 원합니다. 나를 쓰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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