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세례 요한의 위대성 (마 3:1~12)

  • 잡초 잡초
  • 306
  • 0

첨부 1


세례 요한의 위대성 (마 3:1~12)

  
성경에는 위대한 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그 중에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는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이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에 대하여, (눅7: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라고 하셨다. 세례 요한은 오래 살지는 못했다. 

감옥에 갇혀 있다가, 목이 잘려 죽임당하는, 짧은 생애를 살다가 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선지자로 살다가 갔다. 이처럼 사람은 얼마나 오래 사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을 위해 살다가 죽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면 세례요한의 인생이, 왜 위대한가? 


1. 잘 먹고 오래 사는데, 인생을 걸지 않았다(4).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세례요한은 집안이 나쁘다거나, 가난해서 이렇게 지내지 않았다. 세례요한의 아버지는, 제사장 ‘사가랴’다. 

그 당시에 제사장은, 화려한 옷을 입었다. 음식도 아주 훌륭한 음식을 먹었다. 세례요한도 아버지 집에 머물러 있으면, 자신도 좋은 음식을 먹고, 화려한 옷도 입고,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으면서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좋은 환경을 주님을 위해 포기했다. 

그리스도인과 아닌 사람과의 차이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과거에 예수님을 알지 못했을 때에는 무엇을 먹느냐가 중요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무엇을 먹느냐 보다, 무엇을 위해 먹느냐가 중요하게 되었다. 무엇을 입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하여 입느냐가 중요하다. 

물질을 얼마나 버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하여 버느냐가 중요하다. 공부를 얼마나 잘하느냐가 중요하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공부하느냐가 중요하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하여 사느냐가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삶에 대한 목적과 의미를 새롭게 한다. 

만약 우리 가운데 아직도 돈을 얼마나 버느냐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또 여전히 무엇을 먹느냐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혹은 얼마나 더 공부를 잘하느냐에 관심을 쏟고 있다면, 얼마나 오래 사느냐에 더 큰 관심을 보이면, 아직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목적을 모르는 사람이다. 

요즘 너무나 먹고 살기 힘들어 하기에, 이런 설교를 하기가, 왠지 쉽지만은 않다. 사람은 누구나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소망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도나도 well being을 외친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몸에 좋다면 하면 열심히 찾아다닌다. 

그러나 오래 살았다고,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없다. 무엇을 먹고 누리며,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았느냐가 중요하다. 주님을 믿는 우리의 관심은, 잘 먹고 오래 사는데 있지 않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옛날에 비하면, 요즘은 먹고 살만한 세상이다. 먹을 것도 많아졌고, 생활도 참 편리해졌다. 그런데 범죄는 어렵게 살던 시절보다 오히려 더 많아졌다. 사람들은 사는 것이 재미없다면서, 술에 취하고 쾌락을 쫓아다닌다. 왜 사는 것이 재미가 없고, 일상적인 삶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할까요?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나요? 어떤 사람들은 죽지 못해서, 마지못해서, 힘들어서 겨우 살아간다고 말을 한다. 혹시 우리는 예배당에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아무런 기쁨과 감동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나요?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어도, 논밭에 식물이 없어도, 기뻐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기쁨이며, 날마다 소망이 생기고, 어떤 일을 해도 만족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나요? 혹시 왠지 허전하고, 힘겹고,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나요? 

그렇게 느낀다면, 사명이 없기 때문이다. 사명이 없으면 인생은 방황한다. 기쁨이 없고, 소망이 없다. 미래에 대해 불안하고 두렵다. 먹어도 배부르지 않다. 마셔도 목이 마르다. 오래 살아도 의미가 없다. 사명을 모르고 살면, 사람은 쾌락을 좇아서 산다. 

쾌락을 따라다니는 사람은, 더 큰 괴로움만 안게 된다. 사명을 모르고 살면, 욕심만 자꾸 커진다. 가져도 만족함이 없다. 더 가지려고, 더 누리려고, 더 소유하려고 욕심을 부리다가, 죄를 짓고, 결국 그 죄 때문에 망하게 된다. 돈과 명예, 인기에 목숨을 걸고, 오래 살기 위해, 먹는 것에 목숨을 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은 단 한 번이다. 단 한 번의 인생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다가, 이 세상을 떠나지 말고, 사명을 위해 사는 인생이 되시기 바란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인생이 되어, 귀하게 쓰임 받는 인생이기 되시기 바란다. 


2. 주의 길을 준비하는 사명을 위해 살았다(3).
 
우리는 세례 요한을 통해, 사명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고, 왜 세상에 보내셨는지 그 사명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예배당에서 이런 기도를 많이 한다. “물질의 축복을 주세요, 하는 일이 잘 되게 해 주세요, 결혼하게 해 주세요!”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부자가 되고, 만사형통하게 되는 것이 가장 큰 복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사명을 아는 것이다. 

‘이 일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나를 보내셨구나!, 나는 주님의 나라에 갈 때까지, 이 일을 해야겠구나!’ 이렇게 나의 사명을 깨달아야 한다. 사명은 나이와는 상관이 없다. 우리가 지금 처한 상황이나 조건은 중요하지 않다. 

그때가 언제든지, 그곳이 어느 곳이든지, 어떤 상황이든지, 우리는 사명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사명을 달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우리 모두에게는 이미 사명이 주어졌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다. 다만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사명을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 저에게 주신 사명을 알게 해 주세요. 하나님, 제게 주신 사명을 깨닫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란다. 사람들은 꿈과 비전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꿈을 꾸어라, 비전을 가져라.” 이런 메시지로 젊은이들에게 도전을 하게 한다. 

인생의 목표를 가지라는 말이다. 그러나 나 혼자 꾸는 꿈이 되어선 안 된다. 나 스스로 생각하는 꿈을 추구하면서 살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이되기 어렵다. 비전은 미래에 대한 계획이다. 미래에 대한 소망이다. 우리가 원하고 추구하는 미래를 꿈꾸며 살지 말라. 사명을 위해 사시기 바란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기 목숨을 바칠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이다. 사랑 때문에 죽어도 좋으니, 살아 있기만 해도 행복하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 일에 몰두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요즘 우리가 절실히 느끼는 일이다. 

“돈은 좀 적게 벌어도 좋으니, 제발 일자리만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자주 한다. 허송세월 하지 않고, 일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하다. 그런데 목숨을 바칠 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한다면, 얼마나 행복한가? 세례요한은 자신의 목숨을 바칠 만큼, 사랑하는 자를 위해 살다가 갔다. 

자기 임무와 사명을 알았으면, 그 일을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 군인에게 고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면, 그들은 목숨을 걸고, 고지를 점령해야 한다. 상상하고 꿈만 꾸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며,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베드로 사도와 안드레 사도는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물과 배를 버려둔 채,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들의 사명을 깨달았기에, 목숨처럼 소중히 여겼던 그물과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지만, 모두 다 버리고 떠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발견한 사람은, 밥 먹고 사는데, 목숨 걸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면, 기쁠 것 같은데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즐겁고 행복할 것 같은데, 막상 그 일을 하면, 그렇지 않다. 

거기에 더 욕심이 생기고, 만족함이 없다. 기쁨도 없다. 다른 사람과 경쟁하고,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빠지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발견하고, 그 일에 목숨을 걸기 바란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대로, 유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며 주님의 길을 준비했다. 그는 낙타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다. 세례 요한은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입고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이 아니었다. 

성공은 부와 사회적 지위를 얻는 것이다. 출세는 사회적으로 유명해지고, 지위가 높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명이 성공과 출세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사명을 위해 살면, 부자가 될 수도 있고, 유명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사명을 위해 살면, 가난하고, 무명하고, 고난과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다. 

바울은 (행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에, 자신의 목숨도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사명을 위해 살자 이렇게 말했다. (딤후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위해 살면, 주님 나라에서 하나님께서 갚아주신다. 잘 먹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복이 아니다. 진정한 복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알고 사명을 감당하다가 죽는 것이다. 힘들어도, 피곤해도, 돈이 생기지 않아도,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위해 살자. 


3.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삶을 살았다(2). 

요한은 성전 안에 머물며, 편안하게 선포하지 않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오해한다. 예배당 안에서 머물며 목회를 하고, 교회 사역을 하며, 전도하는 일만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목사와 전도사 선교사만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선택된 특별한 사람들만,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사명을 주셨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삶을 살아야 함이 우리의 사명이다.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감도 사명이고, 의사로서 환자를 치료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감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다.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는 것도 사명이고, 음악을 통해 사람들에게 감동과 기쁨을 주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다.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삶이 사명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고, 세상으로 보내셨다. 세상에서 널리 쓰임 받고, 영향을 주라고,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라고 보내셨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고, 돈 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국회의원이 되고, 사장이 되고, 돈 많이 버는 의사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를 통해, 세상에 영향을 주고, 세상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다.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외쳐야 한다. 세례 요한이 유대광야에서 외쳤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을 향해 ‘회개하라!’고 외쳐야 한다. 회개하라는 외침은, 예배당 안에서만 외치는 소리도 아니고, 목사가 교인에게 외치는 소리도 아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가진 우리가, 세상에서 외쳐야 할 소리다. 

그러면 회개하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죄를 고백하라는 말인가? 다시는 죄짓지 말라는 의미인가? 회개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회개하다(메타노에오)는 메타(다르다) + 노에오(생각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니 회개하다는 뜻은 생각을 다르게 하라는 말이다. 올바른 생각을 하라는 말이다. 

자신의 잘못이나 죄 때문에, 후회하고 통곡함이 회개가 아니다. 우리는 집회나 모임을 통해, 은혜 받았을 때,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잘못이나 죄에 대해, 하나님께 고백하며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예배당 밖으로 나서면, 또다시 실패하고 넘어지고, 전과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자신을 발견한다. 

왜 그럴까? 후회하고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변화되지 않는다.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달라지지 않는다.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생각을 바꾸어야만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가치관과 기준을 바꾸어야 한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를 받고자 왔을 때, 요한은 이들을 보면서 이렇게 질타한다. 

(7) “독사의 자식들아!” 정말 심한 욕이다. 세례 요한의 분노가 그만큼 컸다.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회개는 형식적이었다. 변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다. 

진노를 피하려는 종교적 의식으로 세례를 생각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예배를 드리면서 기도하고 말씀을 들으면서, 진정 자신의 변화를 위해 기도하고, 예배하고, 말씀을 듣고 있나요? 잠시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예배드리고 있지는 않나요?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예배하는 중에, 나의 생각 속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일이 안 된다고, 남의 탓만 할 게 아니라, 모든 일에 좀 더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겠구나.” “내가 가진 돈을 아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겠구나.” “남에게 돈을 꾸고 갚지 않은 돈을 갚아야겠구나!” 

종업원의 월급도 제때 주지 않고, 부흥회에서 거액의 헌금을 하는 분들은, 임박한 진노를 피하기 위한, 종교적 행위의 하나다. 마치 무당이 돈을 받고, 잡신의 저주를 풀어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은 행위다. 무속종교에서는 사람들에게, 생각을 바꿔서 변화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무조건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된다. 그런데 내 생각이 변하면, 내가 달라지고, 내 가족이 달라지고, 사회가 변화고, 국가가 변화된다. 생각은 가치관을 만들고, 가치관은 행동을 만들고, 행동은 결과를 만든다. 즉 생각은 결과를 낳는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생각을 바꿔야 한다. 그러면 내 생각이 달라진다. 예수님을 믿는 정치인들은, 백성을 섬기는 정치를 해야지, 뇌물을 받지 말아야지,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말아야지, 소외된 사람들을 잘 돌아보고 더 많이 신경을 써야지…,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함이 회개며, 이런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사업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사업을 해야 한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데, 돈을 벌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줘야지. 종업원들을 배려하고, 세금을 정직하게 신고해서 영광 돌려야지!”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이렇게 하는 것이, 광야에서 외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잘못된 생각이나 가치관을 갖고 살지 말라고, 올바른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변화된 삶을 통해서, 세상을 행해 외칠 수 있어야 한다. 

그 가치관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내 생각을 바로 할 수 있는 기준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의 기준이 되고, 그로 인해 우리의 삶이 변화되어야 한다. 이것이 곧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예배당에서 말씀을 듣고, ‘아멘’하면서 감동받는데 끝나지 않고, 은혜를 받은 말씀이 나의 생각과 가치관을 변화시키고, 그것이 곧 삶의 변화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가량 술집을 하는 사람이,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다면, 손해 보더라도 생각과 가치관을 바꾸어, 그만 두었다면 온전한 회개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세상은 이기주의로 가득 차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유익과 이익만을 추구한다. 어떻게 하든 자신은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한다. 마음에는 욕심과 탐욕이 가득하다. 

세상이 그렇다고, 세상을 멀리하고, 예배당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우리는 먼저 변화된 삶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살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외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서로 싸우고 다투고 분열하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 회개할 수 없다. 문제가 생기고 갈등이 있어도, 우리가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며, 사랑하는 삶을 살면,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무언가 다르구나,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고 만든다. 

이렇게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해,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세상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나의 말이 아니라, 나의 변화된 행동이다. 그러면 내 삶의 태도가 언제 달라지나? 생각이 달라지면 가치관이 달라지고, 행동도 달라진다. 그래서 이 사회에 영향을 주기 바란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겠다. 세계에서 가장 국민소득이 높은 노르웨이는, 가난한 사람이나 걸인이 없는 나라다. 가장 교육열이 높고 문맹이 없는 나라, 뛰어난 복지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여성의 사회참여가 활발하다. 그러나 200여 년 전만 해도, 노르웨이는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였다. 

대부분의 국민이 문맹이었고, 국내에서 다른 도시로 여행할 때에도,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하는 나라였다. 이런 노르웨이를 지금의 노르웨이로 바꾼 사람이, 농장에서 일하는 ‘한스 넬슨 하우게’라는 20살 청년이었다. 

어느 날 글도 읽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하던 그에게, 어떤 사람이 성경책을 주면서 “이것은 삶의 모든 분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그 후 그 청년은, 성경을 읽기 위해 글을 배웠고,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면서, 그의 삶이 완전히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는 주변사람들에게, 자신이 새롭게 발견한 것을 나누기 시작했고, 그 영향으로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변화를 일으키며, 나아가 노르웨이를 흔들게 된다. 이것이 바로 ‘노르웨이의 하우게 부흥’이라는 부흥의 시작이다. 

하우게는 성경에 나오는 삶의 원리들을 스스로 공부하며, 연구하기 시작했고, 이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정부의 허락 없이 여행하다가, 감옥에 갇혀 17년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감옥은 그를 완전히 가두지 못했다. 그는 감옥에서 무려 120권이 넘는 책을 썼다. 

이렇게 쓴 책들은 은밀히 반출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고, 그의 책을 읽은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게 되었고, 그래서 나라 전체가 바뀌게 되었다. 물론 하우게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노르웨이가 바뀌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복은, 대대로 흘러간다. 

그는 죽었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외친 결과, 더욱 크게 자라서 노르웨이가 변화되었고, 선진국이 되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연구하자. 그리하여 변화된 생각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 회개하라고 외치자.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해, 세상에 외치기 바란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