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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 (삼상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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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요나단의 우정 (삼상 18:1~5)


한 해의 마지막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늘 변명처럼 하는 말이지만 한 해를 시작한지가 어제 같은데 벌써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주일에 정리하고 정산해야 할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오늘은 우리 자신들의 인간관계를 뒤돌아보고자 합니다.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     

먼 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 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도, ‘너뿐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깨지는 순간 구명대 서로 양보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너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 “아니오.”하고 가만히 머리를 흔들고,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런 친구를 가졌습니까?”(질문) 

인생 6,70평생을 살아오면서 이런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하고 또 한해를 보내고 있습니까? 
이런 친구는 어디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눈물과 땀과 기도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참된 우정을 이야기할 때 생각나는 성경의 인물들이 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어느 모로 보나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사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뜨겁게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했습니다. 

보십시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에 “다윗이 무슨 죄가 있다고 죽이려고 하십니까?” 라고 아버지 사울왕의 뜻을 거절하였고, 다윗이 꼼짝없이 죽게 되었을 때에도 요나단은 다윗을 안전하게 도망치도록 배려했습니다.

반면, 다윗은 그 요나단의 은혜를 잊지 못해 왕이 되었을 때, 요나단의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절음발이 므비보셋을 자기상에서 먹게 했습니다. 

자기를 끝까지 괴롭힌 사울 왕을 생각하면 그의 핏줄인 므비보셋을 보는 것만으로도 지긋지긋하겠지만 다윗은 정성스럽게 그를 돌보았습니다. 

그 장면을 성경을 통해 보겠습니다. 
삼하 9:6-8절입니다.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타나서 엎드려 절하니........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찌니라.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1. 먼저, 다윗과 요나단의 배경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배경을 살펴보면, 우리는 두 사람이 서로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사이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1) 신분상으로 현저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요나단은 그 당시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사울왕의 아들이었습니다. 
반면 다윗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여덟 째 아들로서 들판에서 양을 치는 목자였습니다. 
군주사회에서 다윗은 종에 불과했습니다. 

다윗이 어느 정도로 알려지지 않았느냐 하면, 목동 다윗이 블레셋 장군 골리앗과 싸우러 나아갈 때, 사울 왕이 군대장관 아브넬에게 ‘이 소년이 뉘 아들이냐’라고 묻습니다.(삼상 17:55) 

그때 아브넬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왕이여. 왕의 사심으로 맹세 하옵나니,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그 정도로 다윗은 무명의 사람이었습니다.
또 다윗이 큰 전공을 세웠기 때문에 사울 왕이 자기 딸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다윗이 자기 처지를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삼상 18:18절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누구며 이스라엘 중에 내 친속이나 내 아비 집이 무엇이관대 내가 왕의 사위가 되리이까?” 

이 말은 “나의 신분으로 어떻게 왕의 사위가 될 수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신분으로 볼 때, 두 사람은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사이였습니다. 


2)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였습니다. 

요나단은 장차 사울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세자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전쟁터마다 승리함으로써 백성의 지지를 얻으며 지도자로 부상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점차 사울의 왕권에 가장 위협이 되는 정적이 되어갔습니다. 

전쟁터에서 사울왕과 다윗이 귀환할 때, 여인들이 길거리에 나와서 칭송하며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그 노랫말은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였습니다. 

누가 더 훌륭했다는 얘기입니까?(질문) 
다윗이 훌륭했다는 말이지요. 

사울왕은 이 말에 심히 불쾌해져서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을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하고 그날부터 다윗을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요나단이 다윗을 자꾸만 편드니까 사울이 이렇게 화를 냈습니다.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이새의 아들이(다윗)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는 것을 왜 모르느냐?(삼상 20:30-31)” 

이 말은 “ 이 철부지야. 정적을 그렇게 키우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니 다윗과 요나단은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정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과 요나단은 뜨거운 사랑과 깊은 이해로 관계를 맺어갔습니다. 
그 관계가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서로를 자기 생명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 생명관계를 증언하는 성경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찾아 읽어 봅시다. 
삼상 18:1절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삼상 18:3절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삼상 20:17절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우리는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했다”고 했지 "다윗이 요나단을 사랑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요나단은 다윗보다 힘 있는 윗자리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랑의 관계는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나눔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믿음이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먼저 교회에 먼저 나온 자가 나중 온 자에게, 물질적인 여유가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나이가 많은 자가 어린 자에게,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 교회 바깥의 사람에게, 따뜻한 웃음이 있는 자가 웃음을 잃은 자에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자가 불행한 처지에 있는 자에게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자기에게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서 없는 자를 사랑하십시오. 


2. 저는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묵상하면서 ‘어떻게 그런 관계를 맺고 유지할 수 있을까’를 발견해보려고 성경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도 이런 저런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만남은 필요에 의해 만났다가 서로의 필요가 다했을 때는 끊어지기도 합니다. 
어떤 만남은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 할 정도로 원수가 되어 헤어지기도 합니다. 
어떤 만남은 처음에는 죽을 둥 살 둥하다가 금방 싸늘해지기도 합니다. 

어떻게 다윗과 요나단은 서로를 자기 생명처럼 여기는 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까요? 
그 관계의 핵심은 하나님 중심이었다는 점입니다. 

삼상 20:23절 “너(다윗)와 내(요나단)가 말한 일에 대하여는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영원토록 계시느니라.” 

삼상 20:42절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지 않은 관계는 길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지 않은 관계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성령을 중심으로 하지 않은 관계는 깊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지 않은 관계는 물질적으로 손해가 나면, 인격적으로 피해가 오면, 정신적으로 부담스러우면 끊어지고 맙니다. 

창2장에 나온 아담과 하와의 인간관계를 보면 이 이치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 하나님이 계실 때, 서로를 향하여 고백하기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참 좋은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여 그 사이에 하나님이 떠났을 때 서로를 향하여 뭐라고 비난했는지 아십니까? 

“저것 때문에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의 관계가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처럼 되었으면 합니다. 
사실 현대인의 삶에서 교우관계처럼 소중한 관계가 어디 있겠습니까? 

문자 그대로 ‘요람에서 무덤까지’입니다. 
가정에 아기가 탄생하여 ‘아기 축복식’을 할 때 모든 교우들이 기도하고 박수를 치며 축복합니다. 
한 사람이 이 땅의 삶을 마감하고 천국으로 이민 갈 때 교우들은 마지막 걸음을 아쉬워하면 눈가를 적십니다. 

우리말에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지만 아파트 앞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조차 모르는데 이웃사촌은 무슨 이웃사촌입니까?  
친척도 예전 같은 친척이 아닙니다. 
일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하는 사이인데 언제 정이 들어 살가운 친척이 되겠습니까? 
현대인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관계는 매주일 한번 씩 만나는 교우관계입니다. 
이렇게 자주 만나는 관계가 없어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교우관계를 소중히 여기시길 바랍니다. 
다시 안 볼 사람처럼 대하지 마십시오. 
 

3. 좋은 교우관계를 위해 몇 가지 제안합니다. 

속도원 사이에, 선교회원 사이에, 교사와 학생 사이에, 찬양대원 사이에, 각 부서와 위원회 회원 사이에 적용해보십시오. 

1) 기쁨도 함께, 슬픔도 함께 하기. 

인간성이 타락하다보니까 우리의 인격은 남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내 배가 아프고, 남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슬그머니 고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천박해졌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심성이 피폐되었습니다! 
‘기쁨을 같이 나누면 배로 늘어나고, 슬픔을 같이 나누면 반으로 줄어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슬픈 일을 당했을 때 같이 펑펑 울어주면 슬픔의 바다가 될 것 같지요? 
그러나 이상하게도 슬픔은 가시게 되고 마음에는 평안이 찾아듭니다. 

인도의 성자 ‘썬다 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히말라야 산기슭에 눈이 쌓였습니다. 
겨울바람이 매섭습니다. 
눈길을 헤치고 산을 넘던 사람이 그만 길을 잘못 들어 눈 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잠시 후 뒤따라오던 사람은 지레 겁을 먹고, 다른 길로 도망가듯 지나쳤습니다. 
그 다음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썬 다싱이 산을 넘다가 눈 속에 빠져 얼어 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들쳐 업고 산을 기어오릅니다. 
땀이 흐릅니다. 
업은 자와 업힌 자의 따뜻한 체온이 교류됩니다. 
히말라야의 혹독한 추위도 함께 있는 두 사람의 체온을 못 당합니다. 
고난을 함께하고 슬픔을 함께 했을 때 오는 축복입니다! 

산등성이에 못 미쳐 싸늘하게 얼어붙은 두 사람의 시체가 있었습니다. 
혼자 살겠다고 도망쳤던 먼저 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전4:11-12절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 하느니라. “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다’는 이치,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해낸다.’는 진리를 새겨봅시다. 

너와 나만의 두 겹 줄만이 아니라, 고래심줄보다 더 질긴 하나님을 모시고 삼겹줄을 이루어서 둘도 없는 귀하고 아름다운 교우관계를 맺어갑시다. 


2) 하루에 한 번씩 기도하기 

저는 기도만큼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보고 “목사님, 많이 힘드시지요?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라고 물어오면, 
한 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기도해주십시오”라고 부탁합니다. 

기도가 최고예요! 
기도는 하나님을 통째로 안겨주는 것입니다. 
위대한 신앙인들의 면면을 살펴보십시오. 
많은 학식이 없어도, 많은 재능은 없어도 위대한 신앙의 삶을 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 없이 위대한 신앙의 삶을 산 사람이 없어요. 
사도바울의 편지들을 보면, 그 능력 많은 사도바울도, 그 학식 많은 사도바울도, 뭐가 그렇게 부족한지 편지마다 교회의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마 18:19절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3) 1주일에 한 번씩 전화하기 

오늘날처럼 통신시설이 발달한 때가 없지만, 오늘날처럼 따뜻한 사람의 목소리가 그리운 때가 없습니다. 
옛날에는 전화기 같은 통신시설이 없이 살아도 고독이나 소외감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오늘 날에는 전화기를 손에 들고 살지만 속내를 드러내고 편안히 말할 사람이 없습니다. 

군중속의 고독! 
현대인의 비극입니다. 

같은 분야에 섬기는 교우들 사이에 따뜻한 체온이 담긴 통화를 적어도 한 주에 한 번씩 주고받게 되길 바랍니다. 

새신자가 6개월 안에 6명의 교우들과 사귀어야 그 교회에 안착할 수 있다는 ‘1:6 이론’이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도 ‘다음에 해야지’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한해가 마감됩니다. 
지금 시작하십시오! 

‘지금하십시오’라는 시가 있습니다.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오늘 맑은 하늘이지만 내일은 구름이 낄지 모릅니다. 
어제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니 지금 하십시오. 

친절한 말 한마디가 생각나거든 지금 말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안 될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곁에 있지 않습니다.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미소를 짓고 싶거든 지금 웃어주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떠나기 전에 장미는 피고 가슴이 설렐 때 지금 당신의 미소를 지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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