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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예수님을 품에 안은 사람 (눅 2:22~32,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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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품에 안은 사람 (눅 2:22~32,39~40)


오늘은 2008년도 마지막 송년주일입니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사랑하는 성도님들과 함께 한 해를 보내고 송년주일을 지키며 하나님께 예배하게 된 것, 돌이켜 보니 하나님께서 주신 큰 축복이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옆에 앉아 계신 교우들을 한 번 인사하시겠습니까? 한 해 동안 함께 해 주신 것 고맙습니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오늘이 2008년도 송년주일이기도 하지만, 교회력으로는 성탄절 후 첫 번째 주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탄절 이후에 있었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관심 가지셨던 인물이 누구인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관심 가지시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보십시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아무리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떤 특정한 한 인물을 통해서만 일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뛰어나고 걸출한 특정 위인들을 통해서 계속 일하시지 않습니다. 때로 그러실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연약한 자, 보잘 것 없는 자,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여 일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8편 다윗의 시를 보면, 다윗이 노래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어린 아이와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시고, 원수와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 했습니다(시 8, 2).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늘 조심해야 할 것은, 어떤 한 위대한 人物이나 특정인에게 우리의 관심을 집중하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도리어 때마다 일마다 多樣한 人才들을 부르시고 세우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시는 그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켜야 합니다(하나님께 시선을 집중해야). 

예수님의 성탄을 위해서는, 다윗의 자손 요셉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요셉과 정혼한 처녀 마리아를 몸을 빌려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소식을 제일 먼저 듣고, 경배한 자들은 베들레헴 들녘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입니다. 동방박사들도 왕의 별, 이상하고 큰 별을 관측하고는 별을 보고 찾아와서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예물을 드렸습니다. 

성탄 후 40일 정결예식의 날이 되자, 하나님은 또 다른 중요한 두 인물을 쓰셨습니다. ‘시므온’이라는 예루살렘 사람과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고 하는 女 선지자입니다. 이 두 사람들도 역시,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정말 오랫동안 준비 된, 하나님께서 눈여겨보시던 인물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탄생 후 40일이 되었을 때, 왜 ‘시므온’과 ‘안나’라는 두 인물을 쓰셨는지?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일하실 수밖에 없으셨는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인물들을 통하여서 이 땅에 임하게 되는지? ‘시므온’과 ‘안나’ 두 인물은, 어쩌다가 하나님께 쓰임 받은 인물이 아닙니다. 카이로스의 때(‘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때, 행동하시는 때, 개입하시는 때)에 쓰임 받은 인물들입니다.
 

[시므온과 안나 두 인물의 배경이 되는, 정결예식 이야기]

누가복음을 기록한 저자는 다른 복음서의 저자와는 달리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정결예식을 특별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본문을 유의해서 보면, 정결예식 그 자체에만 있지 않습니다. 정결예식을 행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온 요셉과 마리아, 예수님은 ‘시므온’이라는 예루살렘 사람과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여 선지자 ‘안나’라는 인물의 배경이야기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시므온’과 ‘안나’라는 두 인물이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약성경 레위기 12장에 기록된 모세의 율법을 보면,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그 어머니는 40일이 지나고, 산혈이 그칠 때, 정결예식을 하기 위해서 ‘번제물’과 ‘속죄제물’을 준비해서 성전에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22절 말씀을 보면,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라는 말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데리고 정결예식을 행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유를, 누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獻兒式),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눅 2, 23-24, 무려 세 번씩이나 반복, “율법의 관례대로”).

이것은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것과도 일치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율법서(토라)나 선지자(선지서)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라는 것이지요. 온전케 하시는 자이십니다. 율법주의자가 아닙니다. 형식적인 율법의 지킴이도 아닙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성취하시기 위함입니다.

정결예식의 날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두 가지 예식을 행합니다. (1) 번제를 드립니다. 헌신의 제사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獻兒式입니다. 이 때, 제물은 일 년 된 어린 양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모님들은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제물로 드렸습니다. (2) 속죄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속죄제사는 드렸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이 정결예식이 시므온과 안나 두 사람의 배경이야기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시므온과 안나라는 두 인물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루살렘 성전에 그 날에, 정결예식을 행하러 올라온 사람이,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뿐이었을까요? 그렇잖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정결예식을 위하여 올라왔습니다. 문제는, 그 수많은 사람들 중 그 누구 한 사람도, 정결예식을 집행하는 제사장 그 누구 한 사람도, 요셉과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가 세상의 주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주권자시라는 것을 알아보는 자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만일, ‘시므온’과 ‘안나’조차도 품위 있고, 고상해 보이는 부모들이 안고 온 아이들 속에서 예수님을 찾았더라면, 마리아와 요셉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님󰡕을 찬송할 수 있었을까요? 정결예물로, 일 년 된 어린 양도 아닌 가난하여 산비둘기 한 쌍이나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고 성전에 올라온 초라하고 볼품없는 갈릴리 나사렛 출신 요셉과 마리아가 안고 온 아기를, 主님으로 알아보고 하나님를 찬송하며 감사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없습니다. 

‘시므온’을 보십시오. 그는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결코 유명하지 않던 감추어진 평범한 인물입니다. 그는, 인생 늘그막에 이르기까지(본문의 증언을 보면), 정결예식을 위하여 성전으로 들어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보고 그를 증언할 때까지, 평생을 기다리는 삶을 산 사람입니다. 성경의 증언을 보십시오.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정황을 보면 시므온이 얼마를 기다리던 자입니까? 그의 平生이, 예수님 보기만을 기다리며 산 사람입니다. 본문이 그 사실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성령께서 시므온의 인생에 늘 함께 계셨습니다. 그 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성령께서 그에게 뭐라 하셨습니까?), 그가 主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 합니다. 성령께서 지시하신 주님을 볼 때가 되자, 성령께서 시므온을 感動시켜 그를 성전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 때(카이로스의 때), 마침 예수님의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기 위해 󰡔그 아기󰡕를 데리고 성전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한 눈에 알아보았습니다. 평생의 소원이 성취되는 순간입니다. 이 순간을 위해서, 기다림의 인생을 살아온 그가 아니었습니까? 

그러니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잖습니까?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보자마자 곧바로 그를 품에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노래합니다.

[主宰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시므온’이라는 인물을 특별하게 쓰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성탄하신지 40일 되도록 아직까지 그 어느 누구도 公開的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을 증언한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종교의 심장부가 아닙니까? 이스라엘의 종교와 신앙과 삶을 통괄하고, 유대종교의 본거지입니다. 바로 그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주의 구원으로󰡕 선포할 자가 누구였겠습니까? 만민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으로 선포할 자가 누구였겠습니까? 󰡔이방을 비추는 빛󰡕으로 선포할 자가 누구였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선포할 자가 누구였겠습니까? 시므온 아니고 또 누가 있었겠습니까?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영적인 어두움이 깊고 깊어진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주목하신 사람은 예루살렘 사람 ‘시므온’이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기 때문입니까? 그는 유대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인 유명명사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義로운 자였습니다. 敬虔한 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며 산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므온을 주목하셨고, 그를 그 때에 쓰신 것입니다. 그 불신앙의 시대에 말입니다. 그 패역의 시대에 말입니다. 헛된 욕망과 꿈을 꾸고 있던 유대종교 지도자들의 틈바구니에서 말입니다(여 선지자 ‘안나’도 마찬가지 인물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선포하고, 고백하는 사람의 인생은 尊貴합니다. 어디에서요? 시므온처럼, 안나처럼—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율법주의 유대종교—의 본거지에서 말입니다. 불신앙의 시대에서 말입니다. 패역의 시대에서 말입니다. 

평생을 무명인으로 살아도, 기다리며 산다하여도, 하나님께서 주신 使命, 그 중요한 사명의 시간에, 단 한 번만이라도 쓰임을 받고 죽는다 해도, 그 사람의 人生은 존귀합니다. 시므온은, 성령께서 “主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그 한 마디 부르심의 말씀에 자기 人生 全部를 걸고 산 사람입니다.

초라한 부모님의 품에 안겨 정결예식을 행하기 위해 성전으로 들어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남들은 다 몰라보았지만, 시므온은 그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主님으로, 그리스도로, 이스라엘의 위로자로, 萬民의 구원자로, 異邦의 빛으로,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증언하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과 관심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두십시다. 하나님께서 내게 하라고 명하신 그 부르심이 무엇인지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부르심과 사명을 깨닫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의 삶과 인생을 한 번 걸어보지 않겠습니까? 내 인생의 가치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자리에 있고, 사명을 감당하는 삶에서 결정이 됩니다.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자리는 각자 다릅니다]

세례 요한의 부르심의 자리가 있고, 그의 사명의 자리가 있습니다. 시므온 은 세례 요한과 같은 삶을 산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평생 은둔의 삶을 살다가, 한 번 쓰임 받은 인물입니다. 그런가 하면, 세례 요한은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였고, 요단강에서 온 유대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자였습니다. 요셉의 부르심이 있고, 마리아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평생을 기다리며 살다가, 성전에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품에 안고, 하나님께 찬송하며 감사하면서, 예수님을 증언하였던 시므온의 삶을 누가 無意味하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17장을 보면,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대제사장적인 기도를 드리실 때,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 4-5). 얼마나 위대한 기도입니까? 우리의 마지막 기도도 주님과 같이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시므온 같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 각자의 부르심의 자리에 서십시오. 하박국 선지자는 위기의 때에, 불확실성의 시대에,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선지자로서 내가 서야할 그 자리) 城樓에 서리라 (거기 서서 무엇하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했습니다. 그 때 주신 하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義人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셨습니다(합 2, 1-4).

使命에 다시 한 번 우리의 인생을 걸어 보십시다. 젊으신 분도, 연로하신 분도, 모두 다 사명에 우리의 인생을 걸어보십시다. 부르심의 자리에서, 주어진 使命을 감당하며 살면, 우리는 우리 인생의 全部를 이루는 것입니다. 

쿠바의 혁명가였던 체 게바라(Che Guevara)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사회주의 혁명가입니다. 평생 보장된 의사의 삶을 포기하고 혁명가의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쓴 “나의 삶”이란 글에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내 나이, 열다섯 살 때 나는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하는가를 놓고 깊이 고민했다. 그리고 그 죽음조차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이상을 찾게 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체 게바라는 자신의 이상으로 생각했던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것입니다.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서도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혁명가도 있는 데,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예수님을 위해서 어떤 삶을 사는 자입니까? 

주님, 우리도 시므온과 같은 의로움과 경건한 믿음의 사람 되게 하옵소서. 主님을 갈망함이 내 인생의 소원이 되게 하옵소서. 앞으로는 주님을 품에 안고, 증언하는 자 되기를 소원합니다. 내가 가진 물질로, 지식으로, 재능으로, 일터에서, 주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 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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