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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소원의 항구를 바라보며 (시 107: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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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의 항구를 바라보며 (시 107:23~32) 

 
❚낭만적인 항해?

여러분은 ‘항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드넓은 바다, 망망대해 위를 한 척의 배를 타고 항해하는 멋진 장면이 떠오르십니까? 돛을 올려 순풍을 맞으며 미끄러지듯 항해하는 장면이 떠오를지도 모르지요. 이처럼 ‘항해’는 낭만적이고 멋진 느낌을 주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멋지고 낭만적인 느낌은 폭풍을 안 만난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합니다. 아무리 멋진 항해, 낭만적인 여행도 망망대해 한 가운데서 폭풍을 만나는 순간 다 깨지고 맙니다. 그때부터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집채 만 한 파도가 배를 때리면 내가 탄 배는 마치 장난감처럼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곧바로 수직 낙하합니다. 배 안으로 물은 쏟아져 들어오고 돛대는 부러지고 노를 아무리 저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게 목숨 걸고 폭풍과 싸우다가 벗어나면 다행이지만 수많은 배는 그 폭풍을 견디지 못하고 뒤집어지거나 바닷속 깊이 영원히 침몰하고 맙니다. 그래서 뱃사람이나 어부들에게 ‘항해’라는 낱말은 결코 낭만적인 말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죽느냐 사느냐 생존의 문제입니다.

텔레비전도 없는 궁색한 시골에서 자란 뉴질랜드 처녀가 자전거를 타고 유럽을 돌아다니다가, 어느 항구에서 요트 선장의 모험담에 넋을 잃게 됩니다. 하룻밤 사이에 뱃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그녀는 그 요트에 조리사로 취업했다가 선장과 결혼했습니다. 나오미 제임스라는 이름을 가진 아가씨입니다. 

1976년 어느 날, 이 젊은 아내가 느닷없이 남편에게 선언했습니다. 요트를 몰고 혼자 세계를 일주하는 단독 항해에 도전하겠노라고 말입니다. 남편은 이해하고 허락했지만, 사람들은 다 코웃음을 쳤습니다. “여자 혼자서? 말이나 되는 소리요?” 프랜시스 치체스터라는 이가 역사상 최초로 요트 단독 세계 일주에 성공한 때가 1968년입니다. 그 뒤로 고작 몇 사람, 그것도 남자들만 그 일을 해냈을 뿐인데 감히 ‘여자’가 그런 생각을 하다니 말입니다. 게다가 그녀는 요트를 탄 지 겨우 1년 반밖에 안 되어서 아직 뱃멀미를 하는 데다, 혼자 요트를 몬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겁 없는 여인은 1977년 9월 9일, 길이 17m 짜리 ‘익스프레스 크루세이더’호를 몰고 항해를 시작합니다. 첫날부터 화물선과 부딪칠 뻔한 위기를 겪으면서 항해 기간 내내 숱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얼마 안지나 조타기와 무전기가 고장 났고, 여러 날 무풍지대에 갇혀 공포에 떨기도 했습니다. 남태평양에서는 파도에 휩쓸려 요트가 뒤집혔다가 한참 만에 바로 섰습니다. 바람이 변덕을 부리는 통에 남자도 힘들다는 ‘돛 바꿔 달기’를 하루에 열네 번이나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 제임스는 끝내 해냈습니다. 

그녀는 1978년 6월 6일 272일 만에 드디어 영국에 귀환함으로써 치체스터가 세운 275일 기록을 깨뜨렸습니다. 그녀가 홀로 목숨을 걸고 요트로 세계 일주를 하며 파도와 싸우며 그 수많은 어려움과 싸울 때 그녀의 마음속에 늘 그리던 모습은 무엇일까요? 마지막에 세계 일주를 마치고 도달할 그 항구였을 것입니다. 그 항구에 도착해 이루게 될 일을 꿈꾸며 힘든 항해를 이겨냈을 것입니다. 마치 어느 등산가에게 “왜 목숨을 걸고 산에 오르십니까?” 하고 물었을 때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오릅니다” 하고 대답한 것처럼 이 여인은 “항구가 거기 있기 때문에” 그 항해를 해낸 것입니다.


❚성경에 나온 항해

성경에는 항해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항해를 거의 안 했기 때문입니다. 바다가 있어야 항해를 하지 않겠습니까?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나 특히 섬나라인 일본이나 영국은 항해를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사면이 다 바다인데 바다를 통하지 않고는 다른 나라에 갈 수도, 무역을 할 수도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해상무역이 발달하고 항해술이 발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물론 바다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요. 서쪽으로 지중해가 있습니다만 그 지중해 해변지역은 거의 다 블레셋이나 가나안 사람 같은 이방인들이 차지하고 있었기에 이스라엘은 거의 항해를 하지 않고 살았던 것입니다. 고작해야 항해에 대한 내용은 성경 몇 군데 나올 뿐인데 그나마 요나서에서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해” 배를 타고 달아나다가 여호와가 보내신 폭풍을 만난 이야기도 보면 그 배를 탄 곳도 욥바라는 이방 땅 항구이고 그 배를 몬 뱃사람들 모두가 이방 사람들입니다. 

또 신약의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가 폭풍을 맞는 이야기가 몇 번 나오는데 그것도 갈릴리라는 커다란 호수에서 일어난 일이지 바다에서 일어난 일은 아닌 것입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항해는 낯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시편 107편을 읽어보면 희한하게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토록 낯선 항해 이야기를 너무도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읽어보면 이 이야기는 실제 배를 타고 항해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선 23절을 읽어 보십시다.
 
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 아, 그렇구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배를’이 아니라 ‘배들’을 바다에 띄운다는 말을 보면 아, 이 사람이 꽤 많은 배들을 바다에 띄워서 큰물, 즉 넒은 바다에서 일을 하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여러 척의 배를 가지고 대해를 오가며 장사하는 해상 무역업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 척의 배를 운영하며 해상무역을 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도 아니면 모’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요즈음처럼 철로 만든 거대한 배도 아니고 나무로 만들고 돛을 단 배기 때문에 폭풍이라도 만나면 십중팔구 침몰하게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이런 배를 노리는 해적들이 당시 지중해에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단 한 척이라도 폭풍을 만나거나 해적을 만나지 않고 무사히 상품들을 가득 싣고 돌아온다면 그 한 척 때문에 엄청난 이익을 얻게 됩니다. 다른 배를 다 잃어도 될 만한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니 이 해상 무역업은 당시로서는 일종의 도박이었던 셈입니다. 제가 왜 “도 아니면 모”라고 표현했는지 이해가 가시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이들이 가장 두려워 한 폭풍을 만났을 때의 상황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25절부터 볼까요?

25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26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나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도다 27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

이렇게 항해를 나갔다가 큰 폭풍을 만나면 엄청난 광풍이 불고 바다 물결이 일어서 배가 그 파도에 휩쓸려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그 다음 순간 저 바닷속 깊이 처박히게 됩니다. 27절에 나온 것처럼 그 솟구치고 떨어지는 배 안에서 선원들은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게 됩니다. 

얼마 전 우리 교회 교역자들을 다 데리고 놀이동산에 갔습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데 무섭다고 안타는 사람들이 제법 있더군요. 담임목사인 저도 용감하게 타는데 말입니다. 누구라고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무섭기는 무서워요. 롤러코스터를 타면 갑자기 밑으로 쳐 박히듯 내려갈 때 완전히 숨이 멎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한 번 그러고 나면 그 다음에는 오히려 올라갈 때가 더 무섭습니다. 이렇게 솟구쳐 올라가면 언젠간 다시 밑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하니 더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무사히 롤러코스트를 타고 내려오는 사람들 중에는 정말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니 놀이기구를 타도 이렇게 무서운데 바다에서 파도를 만났을 때 위로 솟구치고 다시 아래로 떨어질 때 느끼는 공포는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래서 26절에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도다”라고까지 묘사한 것입니다. 정말 영혼이 다 녹아버릴 정도로 극도의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이젠 끝이구나, 나는 이제 끝났구나” 하고 완전히 절망하며 모든 희망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순간에 도대체 누가 나를 도울 수 있겠으며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인생과 항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왜 “인생은 항해와도 같다”는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어느 해 어느 날인가 우리는 인생의 항구를 출발해서 항해를 시작합니다. 어느 때는 순풍에 돛단 듯 잔잔한 수면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기도 하지만 우리 인생 항해가 그렇게 순탄하게만 끝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느 날 예기치 않게 폭풍이 찾아옵니다. 조금 파도가 높구나, 바람이 좀 세구나 싶을 정도로 끝나기도 합니다. 배 멀미 조금 하면 끝나지요. 하지만 인생의 어느 날 문득 찾아온 폭풍은 정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타격을 줍니다. 집채만 한 파도에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곧바로 바닥도 모를 저 아래로 곤두박질치듯 떨어집니다. 이럴 때면 정말 그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내 영혼이 다 녹아버리고 맙니다. “이젠 끝이구나, 끝장이구나” 완전히 절망하고 포기하게 됩니다. 이런 순간에 도대체 누가 나를 도울 수 있겠으며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혹시 여러분 가운데 과거에 이런 인생의 폭풍을 만나본 분들이 있습니까? 폭풍의 세기만 좀 다를 뿐 누구나 한번쯤은 그런 경험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그 폭풍을 이겨내고 헤쳐 나왔기 때문에 이 자리에 계신 것이지요. 하지만 많은 분들은 그 폭풍을 만나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인생이 침몰하고 맙니다. 교회에서도 인생의 폭풍을 만나기 전에는 이 자리에 앉아계시더니 이제는 보이지 않는 분들이 계셔서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또 인생의 폭풍을 비록 헤쳐 나오기는 했지만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고 너무 상처와 타격이 커서 지금도 회복 중에 있는 분도 있습니다. 문제는 언제 또다시 그런 인생의 폭풍이 닥쳐올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언제 갑자기 닥쳐올지, 또 그 때는 과연 내가 그 폭풍을 이겨낼 수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인생은 참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는 항해입니다.

더 큰 문제는 지금 현재 그런 폭풍을 맞고 있는 분들입니다. 우리 교회 많은 환자들이 있습니다. 엊그제도 김순남 집사님을 심방하고 왔습니다. 대전에 있는 동생 분 집에 계십니다. 동생이 사모고 제부가 목사님입니다. 폐암 수술 후 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으라고 해서 내일부터 항암주사를 맞게 됩니다. 무척이나 실망하고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기도가 많이 필요합니다. 김 집사님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암이나 여러 질병으로 인해 인생의 큰 폭풍과 싸우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경제적인 문제나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로 폭풍을 만나고 있습니다. 폭풍의 종류도 너무 많고 태풍 이름도 다 다른 것처럼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폭풍은 너무 많고 다양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너무 힘들고 무섭습니다. 이겨내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이러다가 정말 내 인생이 침몰하고 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럴 때 도대체 누가 내게 희망을 줄 수 있겠습니까? 나를, 내 인생을 이 무서운 폭풍에서 건져낼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겠습니까? 이럴 때는 남편도 아내도 가족도, 심지어 나를 위해 기도한다는 목회자나 성도들조차도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완전 절망입니다.


❚소원의 항구로

그런데 그 해답이 바로 오늘 말씀에 나옵니다. 완전히 절망하는 그 순간, 그 누구도 이 무서운 인생의 폭풍에서 나를 건질 수 없다고 포기하고 저 바닷속 깊이 가라앉아가는 그 순간 이 말씀이 우리에게 답을 줍니다. 누가, 오직 어떤 분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특이한 것은 ‘여호와’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는 것입니다. 24절에서도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본다”는 말이 나오고, 특히 25절에 보면 그들이 항해 중에 만나는 커다란 폭풍을 “여호와께서 명하신즉 광풍이 일어난다”고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바다에서 일어나는 폭풍과 인생의 폭풍 모두가 하나님의 소관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그 어떤 폭풍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일어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폭풍도, 바람과 파도도, 그 넓은 바다도 모두가 우주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5절에도 “여호와께서 명하신 즉 광풍이 일어난다”고 한 것이고 요나서 1장 4절에도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그 무서운 폭풍을 다스릴 분, 그 거센 바람과 집채만 한 파도를 잠잠케 하실 분은 오직 그것을 만드시고 움직이시는 분, 여호와 하나님 한분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28~29절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28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29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예전에 이런 인생의 폭풍을 경험했던 분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인생의 폭풍이 또 닥쳐올지 몰라 불안한 분들, 특별히 현재 인생의 무서운 폭풍에 휩쓸려 파도와 물결에 고통당하고 있는 분들 모두 기억하십시오. 폭풍과 바다와 우주만물이 다 창조주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듯이 우리 인생 전체도, 그리고 그 인생 중에 찾아오는 폭풍도 모두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인생의 폭풍을 다스릴 분, 잠잠케 하실 분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마가복음 4장 35절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널 때 갑자기 큰 광풍이 일어납니다. 물결이 배에 부딪쳐 배에 물이 가득 차고 곧 가라앉게 생겼습니다. 제자들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물결과 싸우는데 배 안에 타고 계신 주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주무시고 계십니다. 어떻게 보면 참 야속한 일입니다. 

우리도 이런 일을 얼마나 많이 경험합니까? 나는 인생의 폭풍과 죽어라고 싸우고 있는데 예수님은 무슨 일 있냐는 듯 아무 반응도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힘든데 알고나 계신지, 주무시고 계시는지 아무 반응도 없는 것입니다. 너무 섭섭하고 너무 답답합니다. 제가 힘들게 투병하고 있는 분들을 심방 가면 가끔 그런 말들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원망스러워요. 왜 하필 납니까?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깁니까? 그리고 왜 아무리 몸부림쳐도 아무 응답도 없습니까? 너무 답답하고 너무 섭섭합니다.” 충분히 이런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무시고 계신 것처럼 보이지만 그분은 지금 다른 곳에 계신 것이 아니라 내가 타고 있는 배 안에 계십니다. 내 인생의 배에 함께 타고 계시며, 내가 지금 맞고 있는 이 인생의 폭풍도 함께 맞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분들이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혼자 폭풍과 싸웁니다. 자기 힘으로 이겨내 보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안 되는 것이지요. 방법은 하나입니다. 제자들처럼 배 안에 계신 예수님을 깨우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외쳤습니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않으십니까?”(막 4:38) 

우리도 내 인생의 배에 함께 타고 계신 주님을 깨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치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지금 죽게 되었습니다. 주님밖에는 절 구해 주실 분이 없습니다. 살려주세요.” 하고 매달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예수님은 바람을 향해 바다를 향해 꾸짖으십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폭풍은 즉시 잠잠해 집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그 분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에게도 아버지의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꾸 내 배 안에 예수님이 계신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분이 지금 내 인생의 배에 함께 타고 계시며 내가 맞는 폭풍도 함께 맞고 계신다는 것을 잊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지금 주무시고 계신다며, 내 아픔을 모르신다며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 맺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긴 항해를 하다보면 폭풍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미 만났던 분도, 현재 만나고 있는 분도 있습니다. 국가적인 폭풍을 만나기도 합니다. 올해 세계적 경제위기 때문에 IMF 때보다 더 힘들었다고들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절망과 아픔을 겪고 그 중에는 이미 침몰한 분도 여럿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이렇게 위로합니다. 내년에는 좀 나아지겠지, 몇 년 만 잘 참으면 좋아질 거야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만에 말씀이라고, 내년에는 더 힘들어진다고, 이러다가 정말 끝장날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사람이 그 큰 폭풍을 스스로 헤쳐 나갑니까? 그 큰 파도 앞에서 우리는 개미 한 마리만도 못한 존재인데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오직 여호와 하나님으로만 가능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인 시편 107편 30-31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30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31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여기서 ‘바라는 항구’라고 되어 있는데 전에 우리가 읽던 개역성경에는 ‘소원의 항구’라고 나와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소원의 항구’라는 말이 훨씬 좋습니다. 왜요? 아무리 큰 폭풍을 만나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요 나아가 마지막에 우리가 다다르게 될 그 항구, 소원의 항구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절망 중에도 포기할 수 없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사다난하고 힘들었던 이 2008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오늘, 우리는 눈앞에 닥쳐오는 큰 파도를 보며 두려워 떠는 것이 아니라 그 파도 뒤에서 그 파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내 인생의 배에 함께 타고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큰 폭풍을 헤치고 끝내 도달하게 될 소원의 항구를 바라보며 폭풍을 이겨내고 승리하는 소망의 그리스도인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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