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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광야생활 같은 인생 (신 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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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생활 같은 인생 (신 8:1~3)


오늘은 금년도 마지막 주일입니다. 올해는 여느 해 보다 더 다사다난(多事多難)하였던 한 해였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큰 사건을 몇 가지만 들면, 정권이 진보에서 보수로 바뀌고 새 대통령이 취임한 것과, 5월초부터 시작해서 석 달이 넘도록 계속되었던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와, 남북관계가 극도로 경색된 것과, 그리고 미국 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외에도 정치, 경제, 사회, 교육 할 것 없이 모든 분야에 걸쳐서 많은 변화와 그로 인한 진통이 있었고, 연말인 지금까지도 여전히 어려움이 지속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가하면, 개인적인 삶에도 차이가 나긴 하겠지만 저와 성도님들이나 나름대로 다사다난하게 보낸 한 해라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매년 연말이 되면 느끼는 것은 특별히 힘든 해가 있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수월했다고 생각되는 해는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순탄한 시기가 계속되다가도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갑작스레 다가오고, 그 반대로 어려운 시기가 계속되다가도 다시금 순탄한 시기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고 말씀했다고 생각합니다. 맑은 날과 흐린 날이 교차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좀 더 살아보면 삶이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는 솔로몬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나 봅니다. 그는 말하기를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이 많으리니 그 날을 생각할지로다 장래 일은 다 헛되도다”(전 11:8)고 했습니다.

창세기 47장에 보면, 야곱이 요셉의 주선으로 애굽의 바로를 만났을 때, 바로가 야곱에게 “당신의 연세가 얼마입니까?”라고 묻자, 야곱이 대답하기를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입니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험난한 세월을 살아왔으면 그렇게 대답했을까요? 그러나 어디 야곱의 생애만 그렇겠습니까?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모든 사람의 나그네 길이 험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세상 사람들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의 경우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똑같이 겪는 삶의 어려움이지만 성도들에게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고난을 통해서 성도들을 연단하십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성도들이 겪는 삶의 어려움을 일컬어 연단이라고 말합니다. 연단(鍊鍛)을 글자를 바꾸어 단련(鍛鍊)이라고도 하는데, 쇠를 불에 달구어 단단하게 만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풀무질을 해서 뜨겁게 달군 화로 속에 쇠붙이를 넣어 벌겋게 달군 다음에 그 쇠를 모루에 놓고 쇠망치로 두들깁니다. 그러고는 물속에 넣어 식힌 다음에, 또 다시 불속에 넣어 달구어서 쇠망치로 두들기고 물속에 넣는 과정을 되풀이하면 쇠의 성질이 단단하게 바뀌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래 연단을 한 쇠라야 보검을 만들 수 있고, 쓸 만한 농기구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연약한 우리를 고난이라는 풀무 불을 통해서 이모저모로 연단하십니다. 그리하여 작은 시험 앞에서도 맥없이 넘어지던 사람이 연단을 통해서 어떤 시험도 능히 이겨내는 강한 신앙인으로 바뀌게 됩니다. 

다윗 왕을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이 불순종하자 사무엘 선지자를 이새의 집에 보내어 홍안의 소년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는 다윗을 사울 왕 대신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시겠다는 표시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고 나자 하나님의 신이 다윗과 함께 하셨으므로 그는 전장에 나가 골리앗을 물리치고 위기에 처한 나라를 건져냈습니다. 사울 왕의 총애를 받아 공주인 미갈과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아직도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근 십년에 걸쳐서 다윗에게 혹독한 연단의 과정을 거치게 하셨습니다. 사울 왕의 칼날을 피해서 황량한 광야의 동굴 속에 숨어 지내기도 하고, 이방나라인 모압에 가서 머물기도 하고, 심지어는 원수의 나라인 블레셋의 왕 라기스에게 몸을 의탁하기도 했습니다. 굶기도 하고, 배신도 당하고,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 같은 혹독한 시련을 통해서 연단을 잘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을 폐하시고 다윗을 선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이는 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상(天上) 회의에서 천사들과 사단 앞에서 욥을 칭찬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욥기 1장 8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욥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같은 욥에게는 아무런 시련이 없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욥기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그 후에 욥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으리만치 엄청난 고난에 직면했습니다. 그 많던 가축과 종들을 강도떼에게 하루아침에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욥에게는 아들이 일곱이요 딸이 셋이 있었는데, 어느 날 열 자녀가 맏형 집에 모여 잔치하다가 갑자기 불어 닥친 태풍에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몰사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욥은 상피증(象皮症)이라는 고약한 병에 걸려서 온 몸의 피부가 마치 코끼리 피부처럼 딱딱하게 되고 물집이 생겼다가 터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어찌나 가렵던지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조각으로 몸을 긁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욥의 처지가 너무 비참하게 되자 “그래도 당신이 순전함을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습니다. 멀리서 소문을 듣고 위문 차 찾아온 세 친구도 욥의 형편을 보고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생각을 바꾸어서 이는 필경 욥이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하면서 욥에게 죄를 자백하라고 윽박질렀습니다. 그러한 욥의 심정이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그러나 욥은 자기가 받는 고난의 원인은 모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으로서 그 고난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내립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 과연, 욥은 그 모든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냈으며,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되었고, 병이 물러가고 건강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이전보다 갑절의 복을 받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경의 인물들 뿐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도 연단을 위한 시련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때로 우리의 범죄로 인해 고난 받을 때도 있지만, 죄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다가오는가 하고 당황해 하지 마시고 욥과 같이 신앙의 연단을 위해 주신 기회로 알고 끝까지 믿음으로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사도 베드로는 환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12)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

이 말씀과 같이, 시련이 다가올 때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여기지 마시고, 나를 한 단계 더 성숙시키기 위해서 연단하시는 줄 아시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요즘은 시련에 대하여 왜곡된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유약해서 시련을 참아 내려는 의지를 발동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 너무 쉽게 생을 포기하는 편을 택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시련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이치를 자연계를 통해서도 보여주십니다. 

어제 낮에 쌍암 공원을 산책하러 갔는데 바람이 어찌나 차갑던지 겨울 맛이 물씬 났습니다. 그런데 호숫가에 서 있는 벚나무들을 보니까 가지마다 꽃눈이 달려 있었습니다. 아직 가장 추운 시기가 두 달이나 남아 있는데, 가지마다 꽃눈을 달고 있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궁금해서 나무에 관한 책을 찾아보았더니, 봄철에 꽃을 피우는 나무들은 꽃눈의 분화를 마친 상태로 겨울을 난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겨울의 어려움을 겪어내야 새 봄에 꽃을 피울 것을 기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나무가 ‘겨울은 너무 추우니까 꽃눈을 만들지 말고 따뜻한 봄이 오면 그 때가서 만들지’, 그러면 그 나무는 봄이 되어도 꽃을 피울 수 없을 것입니다. 나무들도 그렇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의 삶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이 다가올 때 나에게 왜 이런 일이 닥쳐오느냐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연단의 기회로 알고 끝까지 믿음으로 이겨내심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성도들의 인생은 이스라엘 자손의 광야생활과 같습니다.

성도들의 인생은 광야의 여정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성도님들도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를 한 후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해방되었습니다. 모세의 인도 아래 출애굽 한 이스라엘 자손은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호렙산에서 세일산을 지나 가나안 접경 지역인 가데스 바네아까지 가는 데는 열 하룻길이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고 성막을 만드는 등 여러 가지 준비를 하느라 호헵산 아래에서 일 년 가까이 머물렀지만, 그 기간을 감안하더라도 광야생활은 일 년 남짓이면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무려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광야에서 보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족속들을 겁내어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자손은 아직 가나안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이 드러났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자손을 연단시켜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광야생활을 하게 하신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려면 그만한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마음의 준비가 없이 큰 축복을 받으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서 오히려 그 축복 때문에 망하는 일이 생기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면서 아무 준비도 갖추지 못한 이스라엘 자손을 40년 광야생활을 통해서 준비시키셨던 것입니다.

모세는 광야생활 40년이 끝나갈 무렵에,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고별 설교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선민에게 광야생활을 하게 하신 이유를 이 같이 말씀했습니다. 

“1)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3)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광야생활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시험에 불합격했기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우선, 그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이지, 이스라엘 자손의 공로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내려 바로를 굴복시키셨고, 홍해를 갈라 그 사이에 난 길로 선민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들을 두려워해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의 불순종하는 마음과 불신을 제거하시고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즐거이 준행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연단을 통과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광야생활을 하던 40년 동안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이셨습니다. 만나는 밭에서 재배하는 곡식이 아닙니다. 밭에 곡식을 심어 거두려고 해도 광야에는 비가 오지 않으므로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몇 안 되는 오아시스에서 곡식을 재배할지라도 200만이 넘는 큰 백성에게 필요한 식량을 확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웃 나라에 가서 곡식을 사올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시지 않으면 꼼짝없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40년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단 한 사람도 영양실조로 죽은 자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마다 하늘에서 이슬을 내리듯 만나를 내려주셨기 때문입니다. 만나는 안식일 예비일 아침에만 이틀 분을 거두는 것이 허락되었을 뿐, 평일에는 그 날의 만나만 거두어야 했습니다. 백성 중에 이 명령을 어기고 여러 날 분을 거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이튿날 보니까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나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매일 아침마다 그 날의 양식으로 내려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하도록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만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먹고 사는 문제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겸손하게 만드시기 위해 광야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것일까요? 그 마음이 교만한 것이 원인입니다.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자기의 생각에 맞으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고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면 여지없이 불순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하여 불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었을지라도, 하나님의 기준에 미달하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고달픔과 결핍을 통해서 이 백성의 마음을 겸손하게 만드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광야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길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순종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광야에서는 양식 뿐 아니라 마실 물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 나오게 해 주셨습니다. 또한 광야에는 낮에는 뜨거운 태양빛이 내리쬐고, 밤이 되면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춥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차일을 펴서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난방을 해 주셔서 추위를 면케 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일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자기들의 수완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려고 하셨습니다. 만나와 생수, 구름기둥 불기둥은 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겪는 시험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무엇이냐 하면 “떡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경제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경제 문제를 하나님 섬기는 것보다 더 중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경제 문제를 하나님 섬기는 것보다 앞에 두면, 그 사람의 신앙은 퇴보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일에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하나님을 섬기는 데 두면,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먹이셨던 하나님께서 사람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의 경제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성도들의 지상의 삶은 이스라엘 자손의 광야생활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생활을 은혜롭게 하려면 우리의 삶 전부를 하나님께 맡기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그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십시오. 그리할 때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성도들은 광야의 연단을 통해서 천국 백성의 자질을 갖추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은 곧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러기에 빌립보서 3장 20절에 보니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성도들은 천국에 들어가서 살기에 합당한 자질을 갖추어야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야 합니다. 성도들에게 지상의 삶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기간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이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이 말씀을 한번 뒤집어서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자는 복이 없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 될 수 없음이요”라고 바꾸어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 시민이 된 사람은 예수님의 겸손하심을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겸손과 거리가 먼 삶을 살다가 천국에 들어가면 저절로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겸손한 사람이 되어서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광야의 연단을 거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최고의 지성이라고 말하는 이어령 교수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그가 예수님을 믿게 된 사연은 이렇습니다. 하와이에 살고 있는 그 분의 따님이 갑상선암 수술을 했는데 얼마 후에 재발이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망막이 손상되어 앞을 보지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때 이어령 교수는 딸이 시력을 잃게 되어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지식과 돈이 딸을 구하지 못한 것은 곧 자기의 무력함이 증명된 것이라고 하면서 딸이 믿는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하와이의 한 작은 교회에 가서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의 사랑하는 딸 민아에게서 빛을 거두시지 않는다면, 남은 삶을 주님의 종으로 살겠나이다.” 

그렇게 기도하고 나서 얼마 지나서부터 시력이 조금씩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딸을 데리고 한국에 와서 수술하려고 병원을 찾았더니 의사가 망막이 다 나았다고 진단했습니다. 그 후로, 이어령 교수는 국내외 여러 곳으로 다니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간증하는데 힘쓰고 있습니다. 딸에게 닥친 비극적인 운명이 이어령 교수의 교만을 깨뜨려 주님 앞에 손들고 나오게 하였고, 그 일로 주님을 만나고 기적을 체험하였으며, 하나님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이 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가 당면했던 시련이 오히려 새 생명을 얻게 했을 뿐 아니라 지적인 교만을 깨뜨려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하는 귀한 기회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련이 다가올 때 ‘아, 하나님께서 아직도 나에게 남아있는 세속적인 성품을 깨뜨리시고 천국 시민의 자질을 갖추게 하시려고 연단을 주시는구나’ 라고 생각하시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로 시련을 감당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능히 감당하고도 남음이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의 목적은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천국 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는데 힘써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천국 시민의 자질을 갖추게 하시기 위해 연단의 과정을 거치게 하십니다. 우리가 연단을 통해서 겸손을 배우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법을 배울 때 하나님의 복스러운 약속을 현실로 받아 누리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연단의 목적이 지극히 선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시련이 다가올 때 겁내지 말고 우리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손길로 알고 기쁨으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라고 한 시편 기자와 같은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광야 같은 인생길을 가는 동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항상 순종함으로 매일 같이 구름기둥, 불기둥의 보호와 신령한 만나와 생수를 공급받는 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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