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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능력을 받는 방법 (마 28: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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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마 28 : 16 - 20
제 목 : 주님의 능력을 받는 방법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열 두 제자들을 택하셨다.  
예수님이 그들을 택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주님과 함께 사역을 하기 위함인 것이다. 아멘!! 
이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무슨 다른 목적이 있었겠는가?  그들 면모를 보라. 
뭐하나 볼 만한 것이 없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만 해도 그렇잖는가?  그가 내 세울만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가 무슨 대학을 나왔나?  갈릴리 수산대학? 그저 무식하기 그지없는, 성질 급하고, 매사에 실수투성이인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제자인 베드로가 이 모양이니, 다른 제자들은 오죽했겠는가?  다 거기서 거기인 사람들, 그 나물에 그 밥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부족한 사람들을, 주님은 제자로 택하셨는가?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슨 목적? 그들을 장차 영적인 지도자로 세우기 위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그들을, 세상적으로 유능한 사람으로 세우려고 하셨다면,   굳이 이들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보기에 좀 반듯하고, 용모가  준수한, 그리고 재능과 실력을 겸비한 사람들을 찾아 택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주님의 능력있는 가르침과, 그들의 기본 이상의 실력이 만나면, 그 시너지 효과가 얼마이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하시질 아니했다는 것이다.  왜?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를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실제로 경험해 보지 않는가?  
사람이 똑똑하면, 지도자의 말을 잘 안 따르게 된다.  
또 똑똑한 사람들만 모아놓고 일을 해보라. 이들이 잘 연합이 되고 하나가 되겠는가?  택도 없는 소리다.  절대 잘 연합되질 않는다.  
그러면 주님의 사역이, 죽도 밥도 안 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의 성격을 잘 알고 있고, 또 사람들의 생리를 잘 아는 주님이, 이런 실수를 하겠는가?  그래서 주님은 사람들 가운데, 아예 모자란 사람, 부족한 사람, 못난 사람, 전혀 자신에 대해 자랑  하거나, 주장할 수 없는, 이런 사람들을 모아놓고서, 이들과 함께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3년 동안 이들과 함께 하며, 가르치지 않았는가?  
왜 3년인가?  이 3년이란 시간은,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까지의  정해진 시간이었지만, 이 짧은 3년만으로도, 주님이 택하신 열 두 제자들이, 변화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엔, 사람이 변화되는데 3년이란 세월은,   극히 짧은 시간이다.  사람이 근본적으로 변화될 수 있는 시간  으로는 부족한 시간이다.   그런데 주님은 해 내셨다는 것이다.  
주님의 능력이 대단했기 때문인가?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주님이 택하신 그 제자들이, 그만큼 부족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실로 아무것도 내 세울만한 것이 없는, 그래서 겸손하게 주님이 가르쳐주신 모든 것을, 그대로 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이처럼 3년이란 짧은 시간이지만, 그들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제자의 조건은, 실력이 아니라, 겸손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멘!!  주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아멘하며,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   그리고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는 가운데, 언제나 주님의 능력을 덧입고자 하는 의지의 마음, 이런 겸손한 모습이 있을 때, 비로소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믿습니까?  

고전 1 : 27절 이하에 보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할렐루야!!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미련한 것들, 약한 것들, 천한 것들, 멸시 받는 것들이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먼저는 주님이 택하신 제자들이요, 다음은 오늘날 구원으로 부르신 성도들, 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뜻하는 줄로 믿는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처지와 형편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내가 스스로를 볼 때에, 잘 나 보여도, 좀 있는 것 같이 여겨져도, 실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은 착각 속에 살아간다.  자기가 잘 난 줄   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좀 은혜 주시고, 축복해 주시면, 그냥 자기가 잘 나서 그런 줄 알고, 은근한 교만 가운데, 자기를 자랑하며 살아갈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 주시고, 축복해 주신 것이, 그것으로 내가 나를 자랑하라고 하는 목적을 가지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받는 그 은혜와 축복을 통해, 주님의 이름이 드러나고, 주님의  이름이 자랑되어지고, 주님이 영광 받으시기 위한 목적으로 주신 것이지, 결코 내 자랑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목적을 성도들이, 자주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어떻게 되는가?  그 은혜와 축복이 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어지는 가운데, 세상으로 흘러가고,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은혜의 통로가 되고, 축복의 통로가 되어져야 하는데, 내 속에 그만 이 모든 것이 갇혀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여러분, 고인 것은 어떻게 되는가?  결국 썩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고, 축복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만나가 그것을 증거 해 주지 않는가?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령한 음식이다.  그런데 그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지 않았을 때는 썩고 말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루 먹을 것만 거둬가라고 했다.  
그런데 욕심이 이틀, 사흘 먹을 것을 거둬서 들어갔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되었나?  하루 먹을 양식 외에는, 다 썩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이,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축복을, 이처럼 상하게 하고, 썩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고후 6 : 1절에서 말씀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하지 말라?  헛되이 받지 말라. 
무슨 뜻인가?  그릇된 데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직 주신 목적을 따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2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할렐루야!!!  

여기 보면, 두 가지 은혜의 때가 나오는데, 이 은혜의 때를 맞는   대상이 틀린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은혜의 때는, 그 대상이 바로 나 자신이다. 
그래서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먼저 은혜를 베풀고, 나를 먼저 구원해 주셨다는 뜻이다.  

그런데 두 번째 나오는 은혜의 때는,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가? 
내가 아닌, 남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은 누가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인가?  내가 아닌 남이라는  것이다.  아멘!!   지금은 또 누가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인가?  내가 아닌 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통해, 남이 은혜를 받고, 무엇을 통해, 남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인가?  

내가 이미 받은 그 은혜를 통해서, 내가 이미 받은 그 축복을   통해서, 남에게 은혜를 끼치고, 그 축복을 나눠주면서, 사람들에게   주님의 은혜를 알게 하고, 주님의 구원의 역사를, 체험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인가?  바로 전도라는 것이다.  믿습니까? 
이런 은혜와 축복의 나눔을 통해, 주님이 목적하신 전도의 사역이 힘 있게 펼쳐져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  여러분이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축복을 받아 누려야 하는 것이다.  무슨 목적으로?  전도를 위한 목적으로....  오늘 여러분들이, 먼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충만하게 받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린다.  

하나님의 은혜도, 하나님의 축복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될 때,   그것이 내게 능력이 되는 것이다. 은혜 가운데 여러분, 교만하지 마라.  여러분, 축복 가운데 교만하지 마라.  여러분이 잘 나서  주신 것 아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남들보다 잘 해서, 상급으로 주셨다.  이런 생각도 버려야 한다.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 얼마든지 있다.  엘리야가 자기 하나 외에는 주의 일을 하는 자가 없다고, 당당하게 하나님께 말했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몇 명이라고 했는가?   칠천 명, 자그마치 칠천 명....  

여러분 엘리야가 이런 숫자를, 상상이나 했겠는가?  
“오직 나만 남았거늘”   자기만 일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이 무엇인가?  교만이다.  그냥 교만이 아니다.  왕 교만인 것이다. 이 교만이, 결국 그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의 대결에서도, 이겼던 그입니다. 그런데 이런 교만함이 그 마음 가운데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세벨이라고 하는 왕후 한 사람을 못 이겨서, 도망을 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교만이 능력을 빼앗아 간 것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3년 동안 주님과 함께 하면서, 제자로서의 기본적인 역량은 이미 다 갖추었다. 
말씀에도 능했고, 나름 기도에도 능했다. 그리고 제자로서의 지위도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다.  그런데 그들이 이런 위치에서, 무엇에   관심을 가졌는가?   자신의 지위가 지금 현재보다, 더 높아지는데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다툼을 벌이지 않았는가?  심지어는 부모까지  동원해, 주님께 높은 자리를 청탁하는 모습까지도 보였다.  
이게 뭡니까?   추태인 것입니다.  그들의 욕심인 것입니다. 
그들은 더 주님의 은혜를 받기를 원했고, 더 주님의 축복을 받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더 많이 받는 은혜와 축복이, 그들을 더 실력 있게 만들고, 그것이 그들을 더 위대하게 만드는 줄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능력은,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에 있었는가?  순종에 있었다는 것이다.  아멘!!  누구에게 대한 순종인가?  주님 말씀에 대한 순종...  주님의 뜻에 따르는 순종... 

그렇다면,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제자들에게 늘 주님이 말씀하신 내용이 무엇인가?   
전도의 사명인 것이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이것이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런데 제자들이, 이런 원초적인 사명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주님이 능력을 주시겠는가?  
능력 줘봐야 엉뚱한 데 쓸 것이 뻔한 일인데..  안 준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받는 은혜와 축복이 있었지만, 주님 명령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저 그 은혜와 축복 속에, 자신의 위치만이 더 높아지기만을 바랬던 제자들에는, 주님이 능력을 주시지 아니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게 이미 주신 은혜와 축복에 대해, 늘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내게 주신 은사 가지고, 내게 주신 물질 가지고, 내게 주신 건강 가지고, 오직 겸손한 가운데, 주의 일에 사용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린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주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라.  주님이 택하신 열 두 명의 제자들,   그들의 신앙의 행적이 어떠한가?  여전이 무능력한 가운데,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주님을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던 것을, 우리는 보게 되지 않는가?  

여러분 16, 17절 말씀을 보라.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말씀을 가만히 보라.  제자들이 “예수의 명하신 산에 이르러” 라고 했다.   그들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말씀을 보라.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라고 했다.  그들이 예수님을 경배했다고 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행하고, 또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경배하는 모습, 이것이 얼마나 귀한   신앙의 모습인가?   그런데 그 신앙이, 온전한 신앙이었는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부활하신 주님의 존재를 아직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제자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이 어찌 그들을 신뢰하고, 그들에게 능력을 주실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다시 그들에게, 신앙의 본질이 무엇임을 강조해 주고 있지 않는가?  무엇을 강조해 주고 있는가?  전도의 사명을 강조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주님이 전도의 사명을, 이처럼 제자들에게 강조하고 있는가?  제자들이 다른 주님의 명령에 다 순종해도, 또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경배하는 신앙이 있을지라도, 이 전도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들은 결코 능력을 행할 수 없기 때문  이라는 것이다.  여전히 무능력한 모습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  주님이 그들에게는, 능력을 주시지 않기 때문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어떤 성도들에게 능력을 주시는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되, 전도의 명령을 순종하며, 한 생명을 살리는데 힘쓰는 성도들에게 능력을 주시는 줄 믿는다.  

18절에 보라.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주님이 전도하는 성도들에게 어떤 능력을 주시고자 하는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라고 했다.  
이 놀라운 권세를 전도하는 성도들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아멘!!  또 20절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할렐루야!!  이런 주님의 늘 함께 하심과 지키심의   은혜가 누구에게 임한다는 이야긴가?  주님의 명령을 받들어 순종하되, 오직 전도하는 일에 순종하는 성도들에게, 이러한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믿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은, 늘 겸손한 가운데, 주님이 주신 은혜와 축복을 가지고, 우리 주변을 늘 돌아보며, 남은 생애 오직 전도와 선교하는 일에 힘쓰면서, 이런 주님의 놀라운 권세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고, 지켜 주시는 은혜를, 늘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린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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