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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축복을 받는 방법 (창 2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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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창 27 : 1 - 10
제 목 : 주님의 축복을 받는 방법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축복이란 단어만큼, 참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단어도 없을 줄 안다.  
축복이란 말을 들으면, 그저 기분이 좋고, 마음이 흥분이 된다.  그래서 우리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내 일생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게 해 주옵소서.” 
야베스의 기도와 같이, 하나님이 복을 주시되, 근심 없는 복을 주시옵소서.  이런 소원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소원은, 아마 저와 여러분 모두가 가지고 있을 줄 압니다.  
아니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소원하는 내용일 줄로 압니다. 그러나 은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축복도, 우리가 소원한다고 해서 다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은혜를 받는데도 신앙적인 비결이 있듯이, 우리가 축복을 받는데도, 신앙의 비결이 있다는 것이다.  이 영적인 비밀, 이 신앙적인 비밀을 잘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결국 주님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이 새벽 시간이, 주님의 축복에 대한 영적인 비밀을 깨닫게 되는, 은혜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사건이 나온다.  어떤 사건인가? 야곱의 축복 강탈 사건이 나온다.  원래 장자의 축복은 누가 받아야 하는가?  첫 아들인, 에서가 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누가 받게 되었는가?  둘째 아들인 야곱이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사건이 있기 전에, 에서로부터 팥죽 한 그릇에 이미 장자의 축복권을 산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도 둘만의 일이지, 사실 아버지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누가 그 일로 인해, 아버지가 장자의  축복권을 둘째에게 주겠는가?   어림없는 소리인 것이다.  
그런데 결국에는, 둘째인 야곱에게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건을 바라보면서, 에서의 경솔함과 야곱의 축복에 대한 사모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우리도 축복에 대한 사모함을 가져야 한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  

그러나 이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정도로 교훈하기에는, 너무  아쉬운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 이상의 내용들이 있다는 것이다.  단순한 축복의 사모함이 아닌, 축복을 자신의 삶으로  연결시키는 실제적인 원리가, 이 본문에는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 원리 세 가지를, 이 새벽에 찾아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의 축복을 받는 첫 번째 원리가 무엇인가? 

주님께 별미의 헌신을,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헌신?  별미의 헌신.... 여러분, 헌신이라고 다 같은 헌신이겠는가?  어제 새벽에 우리가 바디메오의 헌신, 겉옷을 던져 버리는 헌신을 마지막에 다루었지만, 그 헌신은 주님의 은혜를 얻는데 필요한 헌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눈을 뜬 것은 은혜이지, 축복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 축복이 아닌가?  그가 눈을 뜨기는 했지만, 그의 삶이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갑자기 부자가 되어, 새 옷을 입게 되었다거나, 그가 갑자기  유명한 사람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지도자가 되었다가 하는 내용이 나타나지를 않는다.  그래서 은혜라는 것이다.  그러나 축복은 은혜와는 다르다.  축복은 즉각적인 변화가 뒤따른다.  신분이 상승하고, 주변 환경이 변하고, 모든 것이 아름답게 달라지게 된다.  
이런 변화 속에서, 존귀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 축복인 것이다.  

바디메오가 드린 헌신은, 그의 전부를 드린 것이었지만, 사실 누더기 아닌가?   실제 재산적인 가치는, 거의 없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헌신이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이런 헌신을 통해, 눈을 뜨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 무슨 은혜를 입게 되었는가?  주님의 제자가 되는 은혜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축복이라고 할 때는,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한다.  내 생각을 넘어선 그 무엇을 우리는 연상하게 되지 않는가?  모두가 부러워할만하고, 모두가 깜짝 놀랄 만한 축복, 이런 축복을 소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놀라운 축복, 그렇다면 내 인생에 어떻게 누릴 수 있을까?  
그 방법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별미의 헌신이라는 것이다.   4절 말씀을 보라.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말 그대로 쏟아 붇는 축복을 해  주겠다는 뜻이다.  이제까지와 다른 축복을 허락해 주겠다는 것이다. 

이런 놀라운 축복의 전제 조건이 무엇인가?  바로 별미의 헌신이라는 것이다.   이삭이 에서에게 말하기를, “나의 즐기는 별미” 라고   했는데, 그러면 이삭이 지금 에서에게 요구한 별미와, 전에 즐기던 별미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새 것과 헌 것이라는 차이가 있다. 

이삭이 요구한 별미는 무엇인가?  지금 사냥해서 잡은 고기를 가지고 만든 별미라는 것이다.  예전의 것이 아니라, 식어버린 것을  다시 덥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막 잡은 아주 신선한 고기로 만든 별미를 가져오라는 것이다.   이런 별미를 가져 올 때, 너를 마음껏 축복해 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서가 불이나케 사냥하러 달려가지 않았는가? 

에서의 축복의 빼앗을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9절 말씀을 보라. “염소 떼에 가서, 거기서 염소의 좋은 새끼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부친을 위하여, 그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야곱의 편을 든 리브가가, 무엇을 가지고 별미를 만들겠다고 했나?  염소 떼 중에 있는 가장 좋은 새끼를 가지고 오면, 별미를 만들겠는 것이다.  그녀 역시도, 남편 이삭이 가장 좋은 것을 원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곱도 급하게 어머니의 말대로 하지 않았는가?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깨달을 수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기 전에도, 먼저 이런 귀한 헌신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이다. 

“야, 아무개 장로야, 야 아무개 권사야, 야, 아무개 집사야, 내가 너에게 이제까지 주지 않았던, 크고 놀라운 축복을 주려고 하는데, 내 일생에 가장 귀한 것으로 내게 헌신해 봐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겠다.”  할렐루야!!!  
이런 요청을 하실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 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는가?  주저할 것인가?  그렇다면 참 영적인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눈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 무지한 사람이고, 어리석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앞에 굴러들어 온 복을, 지 발로 스스로 차 버리는 사람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라.  에서가 어떤 사람인가?  장자의 축복권을 기껏 팥죽 한 그릇에 쉽게 팔아버린 어리석은 위인이 아닌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버지 이삭이 너로 마음껏 축복하게 하라 말하며, 특별한 별미를 원했을 때, 토 하나 달지 않고, 그대로 사냥터로 달려가기 않았는가?   그런데 이런 신앙마저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애당초 축복은 글러 먹은 것이다. 

혹 여러분 주변에 이런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불러도   좋을 것 같다.  한번 따라 하자. 
“이런 에서만도 못한 놈” 
혹 여러분이 이런 상태에 있는가?  그럼 여러분을 향해 이런 소리  해야 한다. “이런 에서만도 못한 놈”  여기에 하나 더 붙여야 한다. “지지리 복도 없는 놈”  오늘 여러분 가운데는, 한 사람도 이런 사람 없기를 바란다.  주를 위한 헌신을 즐겨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일생에 주님 원하시는 별미를, 요구하는 순간마다 드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많이 드리면, 많이 받게 되는 줄 믿는다.  큰 것 드리면, 큰 것 받게 되는 줄 믿는다.  귀한 것 드리면, 귀한 것 받게 되는 줄로 믿는다. 신앙의 원리, 축복의 원리는,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이다.  아멘!!  몇 배를 거두는가?  최소 30배다.  몇 배?  60배,  몇 배?  100배다.

지금 이런 별미를 요구하는 이삭이, 사실 이런 축복의 주인공이   아닌가?  창 26 : 12, 13절을 보라.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할렐루야!!!  
때를 따라 별미를 드릴 줄 아는 신앙이 되어, 이런 놀라운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놀라운 주님의 축복의 받을 수 있는, 두 번째 원리는 무엇인가? 
남이 드리기 전에, 내가 먼저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귀한 것, 좋은 것, 많은 것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드리는 때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때를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결국 누가 이삭의 축복을 받게 되었는가?  
야곱인가?  에서인가?  야곱이다.  야곱이 장자의 축복권을 샀기 때문인가?  물론 신학적으로 따지면, 그렇게 답을 할 수 있겠지만, 신앙적인 원리로 따지자면, 그런 이유가 아니라, 먼저 드린 자에게 축복이 넘어갔던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중에 별미를 드린 에서는 어떻게 되었는가?  
똑같은 별미를, 아니 더 좋은 별미를, 왜 더 좋은 별미인가?  
평소에 에서가 이런 별미를 드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곱이 드린 별미보다 에서가 드린 별미가 더 이삭의 입에 맞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야곱을 축복해 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왜?  그가 먼저 별미를 가져왔기 때문에, 야곱이 찬스에 강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찬스에 강한 신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들 보다 한발 더 빠른 헌신, 남이 하는 것을 보고 뒤 따르는 헌신이 아니라, 내가 먼저 행하는 헌신, 이런 헌신이 여러분에게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란다.  

뒤 늦게 도착한 에서가, 아버지 이삭에게 별미를 갖다 드렸다. 
그리고 나를 마음껏 축복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나?  여러분, 27 : 33절 말씀을 다같이 한번 읽어보자.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가로되,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   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여기서 중요한 말은 무엇인가?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라는 말씀이다.  “너 오기 전에”  무슨 말인가?  “네가 헌신하기 전에” 라는 말인 것이다.  이미 늦었다는 것이다.  이미 다른 사람의 헌신을 기뻐 받은 터이라.  네 헌신을 받아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받아도, 너에게 줄 축복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예 헌신하지 않는 사람은 더 미련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에서가 아버지의 은혜를 받지 않은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 헌신으로 인해 은혜는 받았다.  그 집의 모든 것을 주관하게 되는 은혜는 받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것을 받아 누리고, 주관하게 되는 축복은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것은 자신의 소유로 삼고, 주관하게 되는 은혜는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작은 축복은 받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원래 하나님이 주시고자한 큰 축복은, 끝내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축복은, 먼저 별미로 헌신한, 야곱의 몫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소망한다면, 이 원리를 반드시 깨닫고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란다.  

마지막 세 번째로, 주님의 축복을 얻는 원리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축복을, 영적인 축복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야곱이 받은 축복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소망하는 육신적인 축복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실제 그가 받은 축복이 무엇인가?  세상적인 축복으로는 솔직히 별로 받은 것이 없다. 이 사건 이후로 그는 당장에 집에서 도망 나오게 되지 않았는가?  아무것도 가져 나온 것이 없다.  
나중에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한 재물 모았다.  그러나 그 재물의 축적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기보다는, 야곱의 수완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결국은 다 에서에게 돌아가게 되지 않았는가? 

야곱의 인생은, 그야말로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모습을 볼 때엔, 오히려 에서가 축복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야곱이 저주를 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야곱을 지켜보고 계셨고, 그를 붙잡고 계셨고, 그를 인도해 가고 계셨다는 것이다.  

에서에게는 없는 하나님이, 야곱에게는 있었다는 것이다. 할렐루야!!  롬 9 : 13절에 보라. “기록 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하나님이 야곱만을 사랑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 이것이 바로 야곱이 받은 축복인데, 이 축복은 세상적인 개념의 축복이 아니라, 영적인 개념의 축복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야곱이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축복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겠는가?  과연 우리와 같이 일반적인, 세상적인 축복으로 이해했을까?  아니면,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자신이 받은 축복이, 세상적인 축복이 아니라, 영적인 축복이요,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는 축복으로 이해했을까?  이것이 궁금하지 않는가? 
야곱은 후자의 축복, 영적인 축복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안 그랬다면, 집에서 도망가듯 쫓겨나가는 즉시, 하나님을 향해 항의 했을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 원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체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이 평생에 걸쳐 모은 재물을, 다 형 에서에게 주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이에 대한 불평 한 마디가 없다.  그리고 완전히 홀로 남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지 않았는가?  
어디에서?  얍복 강가에서...  그 때도 이런 원망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오히려 그는 그 대면의 시간을, 자신에게 허락한 영적인 축복을 확인하고, 확정하는 시간으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창 32 : 26절을 보라.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무슨 축복을 달라는 것인가?  영적인 축복을 달라는 것이다.  그 축복 확인해 주고, 확정해 주지 아니하면, 절대 못 놓겠다는 것이다.  죽어도 못 놓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때, 하나님이 지어준 이름이 무엇인가?  
이스라엘이란 이름이다.  그 이름의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  여러분 이 이름이 얼마나 놀라운 이름인가?  이 이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으로 네가 하는 기도는 내가 다 들어 주겠다.  할렐루야!!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기 자식들, 열 두명을 다 불러 모아다 놓고, 그들을 향한 기도를 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축복의 기도만 아니라, 저주의 기도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모든 기도가, 실제로 그대로 다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무엇인가?  야곱이 그토록 갈망하던, 영적인 축복이었다는  것이다.  지금 현재보다는, 나중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더 잘되기를 바랬던, 야곱의 소망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 열 두 자녀들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형성하게 되었고, 또 그 자손들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이루게 되었고, 또 그 민족이 오늘날 세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각 부문에서 독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놀라운 축복의 역사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어디서 출발하게 되었나?  아버지 이삭에서, 가장 귀한 것을 대접해 드리는, 별미의 헌신에서, 또 누구보다 앞 선 헌신  으로서 이루어낸 축복이라는 것이다.   

오늘 여러분에게도 이런 귀한 헌신과, 한발 앞 선 헌신이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부분, 야곱이 그토록 소망했던 축복은, 이 세상에서 당장 부요하게 지내고, 존귀하게 되어지는 일회성 축복이기 보다는, 자신의 후대에 영원토록 이어지는 영적인 축복을   더 소망했다는 사실을, 우리도 인식하면서, 이런 귀한 축복을 소망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린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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