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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을 섬기는 성도 (행 9: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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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행 9 : 23 - 31
제 목 : 세상을 섬기는 성도

오늘 본문은 사울이라고 한 청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후에 바울이란 이름으로 변화되어, 주님의 복음 사역에 힘쓰게 된 인물이지요.  
그런데 바울의 사역이 처음부터 평탄했습니까?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난 이후에, 오히려 자신의  사역이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어떤 곤경에 빠지게 됩니까?  자신의 존재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모두에게서, 외면당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원래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야말로 유대교 안에서 장래가 총망 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희망이었습니다.  
출신성분도 좋았을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잘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장차 유대교의 지도자로서 손색이 없는, 실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이후로, 유대교에 등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바울의 이런 모습을 본, 골수 유대인들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이후로, 바울은  유대인들의 굉장한 분노를 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들에게 살해의 위협을 받으면서 피해 다니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난보다, 더 힘든 것이 고난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자신이 회심한 이후에, 유대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전환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마저도 그에게 등을 돌린 채, 그의 회심을 인정하질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양쪽으로부터 인정받지를 못한 채, 그의 인생이 고립 당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불평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예전에 바울이   얼마나 잔인하고 끈질기게, 기독교인들을 잡아가고 괴롭혔습니까?  
이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도들은, 하나같이 바울의 회심을 인정하질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6절을 보세요.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여러분 당연한 것 아닙니까?   바울의 회심은, 안타깝게도 예수님과 본인만이 알고 있는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꼬꾸라졌지만, 아무도 그 음성을 듣지를 못했습니다.  단지 바울만 들었을 뿐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왜 바울이 말에서 떨어졌는지, 왜 그의 눈이 멀게 되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알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혼자만의 체험이었다는 겁니다.  

그런 가운데 그는 홀로, 주님의 제자로서의 길, 또 사도로서의 새로운 신앙의 길을 걸어갔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오는 모든 고난의 요소들을 그대로 감내하며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성도들 개개인의 신앙이, 바로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신앙을 선택했다는 것,   이 사건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했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따르던 세상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삶, 얼마나 버렸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예전과는 분명 다른 신앙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대하기를, 이렇게 신앙의 길을 가게 되면, 뭔가 인생에 아름다운 변화, 축복의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는데, 정작 우리의 삶을 보게 되면 어떻습니까?  내가 가진 이 신앙 때문에, 오히려 더 인생이 힘들고 어려운 경우를 많이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 때문에 주변 사람들, 동료나 친구들과의 관계가 어려워지거나, 심지어는 가족이나 친지들과의 관계까지도 어려워지는 경우가 생기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을 위한 선택이, 우리의 인생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내가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내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굳이 이런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되는데, 예수를 믿는 신앙 때문에, 또 신앙적 양심을 위한 결정 때문에, 세상의 가족이나 친구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무시  당하고, 그래서 때로는 고독을 겪게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모습을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은 신앙인이 되고, 주일마다 교회에 나오면서 불편하게 된 것은 없으십니까?  직장생활과 교회, 또 교회와 가정생활, 이런 생활들이 서로 맞물려서 잘 어울려지면 좋겠는데,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없었습니까?   열심히 사회생활하면서 살아가는데 있어서, 내가 기진 이 신앙이, 때로는 거추장스럽다고 느낄 때가 없었습니까?   
어떤 경우에는 교회만 벗어나면, 너무나 다른 자신의 모습 때문에, 교회에 오는 것이 자신을 더욱 더 힘들게 만드는, 그런 분들도 계실 줄 압니다. 

차라리 교회에 가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살든지 그렇게 신경 안 쓰고 살 수  있는데, 교회만 가면 뭐 회개해라. 선하게 살아라. 용서하며 손해 보며 살아라.  서로 섬기며 사랑하면서 살아라!  주님을 위해 희생하며 헌신하며 살아라.  실제 생활 속에서 그렇게 살아가지를 못하는데, 교회만 오면 자신에게 감당치 못할 짐을 지우는 것 같아 싫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는 것 자체가, 이제는 너무나도 힘이 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내게 신앙이 아예 없었다면, 아니면 이제라도 신앙을 포기하고 자유롭게 살아  간다면, 오늘과 같은 수요예배에도 안 나와도 될 것이고, 주일마다 교회에 나온다고,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이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또 교회에서 요구하는 봉사나 헌신, 전도, 이런 것들에 대한 부담도 떨쳐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삶의 많은 부분에서 이런 불편을 느끼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포기하고 싶어도, 이제는 포기할 수 없는 신앙의 삶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 내가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졌던 무지개 빛 찬란한 인생의 꿈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오히려 신앙과 세상 사이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불쌍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 가운데서도, 아직까지도 신앙생활을 하면, 내 인생에 무한한 은혜와 축복이 쏟아질 것이라고 기대하며 살아가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런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막연하게 기대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기대하는 것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를 두려워하거나, 거부한다면,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결코 믿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막연한 기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히 11장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이라고 했지, “기대는 바라는 것들의 실상” 이라고, 말하고 있지를 않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신의 소망한 것에 대한 대가를, 분명 지불하는 용기와 헌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그는 믿음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막 10 : 29절, 30절 말씀을 보세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했습니다.  축복을 백배나 받는데, 또 무엇을 받는다고 했습니까?  핍박도 겸하여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을 따르는 신앙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대가를 치른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가 소망했던 은혜나, 축복, 능력이    내 삶에 나타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롬 8 : 18절에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아멘!!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을 믿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내 삶이 더 편해지고, 더 부유해지고, 더 떵떵거리며 살수 있다는 생각을, 이제는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려놓음의 신앙, 아니 더 내려 놓음의 신앙...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삶 속에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의 제자들처럼, 예수를 믿음으로 더 불편해진 삶 속에서 오히려 기쁨을 누리고, 예수를 믿음으로 더 가난해진 삶 속에서 오히려 자족하며 만족을 누리고, 그리고 주를 닮아가기 위해 더 낮아진 삶 속에서, 남을 섬기는 삶 속에서 더욱 큰 행복과 기쁨을 경험하며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삶이란 무엇입니까?  신앙의 삶은, 곧 주님을 위한 희생의 삶이며, 또 형제와 이웃을 위한, 나눔과 섬김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겠다고,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사람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렇게 많지를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명이란 찬양을 잘 알지요.  요즘 우리 교회에서 자주 부르는 찬양인데요, 제 개인적으로도 참 좋아하는 찬양입니다. 
주님이 홀로 가신 그길, 나도 따라 가오.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그 길을 나도 가오.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아버지 나를 보내주오.  
나는 달려가겠소.   목숨도 아끼지 않겠소.  나를 보내주오. 
여러분, 과연 이 찬양과 같은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되겠습니까?  만약에 이런 길을 자청하여 가겠다고, 교회를 찾아 나온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 사람이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만큼 이해가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 가운데, 혹 예수를 믿는 것이, 곧 자기 가 잘되는 길인 줄 알고 온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속은 것입니다.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먼저는 주를 위해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것이고, 또한 세상을 위한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것이란 것을, 이제라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 설교를 들으면서, “야 이거 내가 예수를 잘못 믿은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드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런 분들은 일찌감치 다른 종교를 찾아보는 것이 더 좋을 듯싶습니다.  

주님 당시에도, 이런 헛된 기대를 품고 주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헌신과 희생을 말씀하실 때, 그들은 이 말씀이 어렵다 말하며, 다 떠나가 버렸습니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여러분, 누가 많이 물러갔다고 했습니까?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그때 주님이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지요?   “너희도 가려느냐?”  
이 질문에 베드로가 뭐라고 대답을 합니까?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아멘!!! 
이런 베드로와 같은 신앙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 모두의 입술에도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는 것이, 이렇듯 주님을 섬기고, 세상을    섬기는 삶의 자리로에 부르심이라는 것을, 이 시간 여러분의 심령 속에, 다시 한번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먼저 교회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 하고 있는  성도들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를 향하신,  첫 번째 주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형제 우애....  
그래야 자녀들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편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예수의 피로 하나 되어진, 형제와 자매인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누구이겠습니까?  
우리 성도들의 아버지인 것입니다.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아버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당신이 피 값으로 사신 교회를 바라보실 때, 가장 소원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녀들인 우리 성도들이 화목하게 지내 것 아겠습니까?  
서로 돌아보며 우애 있게 지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의 뜻을 따르고, 세상을 섬기는 성도의 삶을 이야기 할 때에,   가장 먼저 나타내야 할 것은, 교회 안에 있는 공동체를, 지금 나와 함께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을, 사랑과 관심으로 잘 섬겨가며 세워가는 모습이 있을 때, 주님은 무엇보다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 공동체가, 비로소 온전한 교회로, 하나님께 인정받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세요.  회심한 바울이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었습니까?   너무나도 어려웠습니다.   왜입니까?  
기존 교회 성도들의 배척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물론 예루살렘 교회는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했습니다.  예전에 바울이 한 짓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지요.    바울의 손에 죽어간 성도들이 얼마이며, 또 감옥에 갇힌 성도들의 수가 얼마  입니까?  생각하면 정말 치가 떨리지요.  그러나 그럴지라도, 바울을 보내신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안다면, 그렇게 배척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전에는 유대교인이었습니다.  만약에 그 모습 그대로 교회 안에 들어왔다면, 배척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은 이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고 있고, 또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 줄 것을 요청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배척한다는 것은, 그를 보내신 주님을 배척하는 것이나, 다름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을 누구보다도 따뜻하게 맞아주고, 그를 감싸주며 격려하며, 바울을 세워줘야 할 사람들이, 바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는 겁니다.  만약에 이런 상황으로 끝나  버렸다면, 그들이 바울을 배척하고, 교회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바울은 신앙의 회의 속에, 어쩌면 인생을 방황  했을지도 모르고, 또 예루살렘 교회는, 바울을 받아들이지 못한 죄로 인하여,  주님의 책망을 듣는 가운데, 큰 환난을 겪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이렇게 끝나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예루살렘 교회에 속한 한 사람이, 이런 결과를 막았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회심한 바울을 알아주지 않았을 때, 그를 알아 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누구입니까?    바로 바나나였다는, 아니 바나바였다는 것입니다. 
회심이후 진퇴양난의 곤경에 빠진 바울을 구원해 주고, 그를 일으켜 교회의 일원으로 세워준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회심과 결단과, 또 바울의 그리스도인 됨의 놀라운 의미를 알아 준 사람, 그가 바로 바나바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신앙의 진실성을, 이 한 사람 바나바는 알아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7절 말씀을 보세요.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바나바의 이런 신앙적 노력이, 바울이라고 하는 한 사람을 살려준 것입니다.  왜 살려주었다고 표현하느냐?  바울의 경우를 보세요.  바울은 이제 예수를   선택함으로, 이전까지의 육신의 삶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새롭게 거듭난 가운데 새 사람으로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 성도들이 받아주지 않음으로 그를 내친다면, 그는 그 교회 성도들로 인해, 또 한번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무엇이 죽게 됩니까?  그의 안에 새롭게 탄생되어진 영성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찌 되겠습니까?   그의 육도 죽고, 영도 죽게 되는 것입니다. 다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세상과 교회에도 발붙일 곳이 없는, 불쌍한 인생,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오늘 우리 공동체 안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이에 대한 책임을 우리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책망을 피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서로를 돌아보는 것, 이것은 단순한 교제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거룩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 주변을 한번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서로를 아주 그윽한 눈빛으로, 아주 다정한 눈빛으로 한번 바라보세요. 여러분이 바라보고 있는 그 사람이, 지금 여러분 곁에 있는 그 사람들이,  주님이 찾고 계신 바로 그 사람이며, 주님이 필요로 교회에 보내신 여러분의 동역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리고 지금 여러분이 바라보는 그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를 왜 이 교회로 보내셨던 것일까?  왜 내가 이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지금  여러분이 바라보는 이 형제와 자매를 위해 이 교회로 보내셨다는 것이다. 아멘!!!   지금 이 분들을 내가 섬기기 위해, 이 공동체 안에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주일학교 부서에서 봉사하는 교사들도 있을 줄 압니다. 
왜 여러분이 그 부서에서 봉사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주일학교 각 부서에 교사로 세움을 입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주일학교 부서에서 만나는 한 사람, 한 아이를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맡고 있는 반 아이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들 곁에 왜 여러분이 있는 것입니까?  그 한 아이를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대신해 그 아이를  양육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 부서에 보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이를, 여러분이 맡고 있는 그 한 아이를, 결국에는 당신의 나라를 위해 크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상상해 보세요.  그 아이에 대한 장래에 대한 꿈을 꿔 보세요.  내가 가르친 아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상에서 활약하게 되는, 멀지 않은 미래를 꿈꾸어 보십시오.  
이것이 교사의 비전인 것입니다.  이것이 교사의 사명인 것입니다. 

또 여러분 가운데는 주변의 이웃을, 또는 가족이나 친척들을 전도한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들을 왜 전도하셨습니까?   무슨 이유로, 무슨 목적으로... 
단순히 교회에 초청해서 예배 한번 드리게 하는 목적입니까?  
그건 전도가 아니지요.   그가 교회 안에서 예배를 통해, 예수를 만나도록   이끄는 것이 전도인 것입니다.  또한 그가 결국에는, 자신과 같이 다른 사람들을 전도하며, 하나님께 쓰임 받는 만드는 것이 전도인 것입니다.  

안드레가 그의 형제 베드로를 전도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기 위해 전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그에게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그 공동체 안에서, 누구보다도, 이 베드로를 잘 섬겼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섬겼습니까?  
베드로가 주님의 수제자가 될 때까지...  

자신을 넘어서, 자신이 전도한 베드로가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제자가 되기까지, 그가 세상에 나가 위대한 사도로 활약하며, 한번 전도할 때마다, 3천 명씩 회심하며 돌이키는 역사를 일으키기까지, 베드로를 섬겨가며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누가요?   그의 형제 안드레가....   

형제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 아니냐?   이런 소리 하는 사람은, 뭘 몰라도 한 참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심리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자신보다 높아지면 배가 아프게 되어 있습니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라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이, 자기와 가까운 사람이, 자신보다 높아진다면, 견디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안드레는 전혀 그런 내색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일을 기뻐했고,  바로 이렇게 되기까지, 그가 베드로를 위해 수고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안드레는,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에는 열 두 제자 중에 가장 미약한 존재로 나타나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아주 강력한 신앙의 영향력을 가진, 주님의 제자였다는 것입니다.  

유대의 역사가인 에우세비우스의 책에 보면, 나중에 가룟유다 대신에 제자로  뽑힌 맛디아가, 아프리카 선교 현장에서 식인종에게 잡혀 먹히는 순교를 당하게 되었을 때, 기적적으로 나타나 그를 구원해 낸 사람이 안드레였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마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날 때, 성령의 이끄심으로 시공을 초월해서 만나게 되었던 것처럼, 그렇게 아프리카로 가게 되지 않았는가?  
생각해 봅니다만, 어찌 되었건 맛디아를 구하기 위해 급파된 사람이, 바로  안드레였다는 것입니다.  

그가 거기서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맛디아만 구원한 것이 아니라, 아예   그 선교현장에 눌러 앉아 있으면서, 그 식인종들을 섬기며,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을 기어코 회심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우리는 베드로만 위대한 줄 안다. 그만 많은 사람들을 회심시킨 줄 압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아니 베드로보다 더 위대한 일을, 안드레는 자신의 사역을 통해, 충실히 이루어냈다는 것입니다.  

안드레가 그 식인종이 들끓는 선교현장에, 굳이 남아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자기를 그 곳에 보내주신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맛디아 한 사람을 구원해 내기 위한 목적이 아닌, 그의 사역을 도와 그 식인종을 섬기며 복음을 전하라고, 자신을 그곳에 보내신 줄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 잔인무도한 식인종이 회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이 되어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처럼 안드레는 사람을 세우고, 살리는 데 주님으로부터 언제나 쓰임 받았던 사람이었던 것을, 알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나바도 마찬가집니다.  바나바를 통해서 사울이 비로소 바울 될 수 있었습니다. 안드레를 통해서 무식하고 다혈질인 베드로가, 비로소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다혈질이란 말이 무슨 말입니까?  
쉽게 말하면, 성질 더럽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그를 전도한 안드레로 말미암아 위대한 사도가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섬김의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이 두 사람 다, 자신들과 함께 한 그 사람들의 현재 모습을 바라보지 않고, 장래에 주님이 그들을 크게 쓰실 모습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들을 섬겼기 때문에, 이런 놀라운 결과가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 옆에 있는 성도들을 섬기며, 그들을 위한 꿈을 꾸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중에 교사가 있습니까?  여러분이 교사로 맡고 있는 반 아이들, 그 아이들을 위한 꿈을 꾸시길 바랍니다.  
또 여러분이 전도한 분들이 계십니까?  전도한 그분들이 장차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을 것을 상상하며, 그분들을 위한 꿈을 꾸시길 바랍니다.  

이런 꿈을 꾸는 사람들, 바로 이런 성도들이 세상을 섬기는 사람들이고,   또한 세상을 위한 꿈을 꾸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저와 여러분 모두가 가져야 할, 거룩한 비전이라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세상을 위한 꿈을 꾼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꿈을 꿉니다.  세상을 살린다고 말하면서, 실상은 자기 자신을 살릴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섬김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여러분, 하나님이 사랑하신 세상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 지구 땅덩어리를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나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 참으로 보잘것없는 나, 죄 많고, 흠 많은 나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은 이 땅에 오셨고, 그 험악한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므로 세상은 월드가 아니라, 휴먼인 것입니다.  
땅이 아니라, 사람인 것입니다.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는, 창세기에 나타난 태초의 명령도, 결국 사람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또 나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이 땅에서 이루시기 위해, 그토록 위대한 사랑으로 나를 섬기시며, 오늘날까지 나를 이끌어 주셨는데, 그 사랑과 그 은혜를 입은 우리들이, 내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서, 관심이 없고, 섬김이 없다고 한다면,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아는 성도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묻고 계십니다.  계속해서 자기만족과,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내 곁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 그들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붙여주신 사람들인 줄 알고, 그들을 향한 비전을 가지고, 그들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마음을 나누며, 섬기며 살아갈 것인가?   이것을 하나님은 묻고 계십니다. 

내 주변의 형제와 자매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내 주변의 이웃들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마음을 드리며, 작은 사랑이라도 나누고 섬기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에게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그들은 평생에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기억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이름으로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선한 욕심을, 우리는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기억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아름답게 기억되는 것입니다. 

함께 그리스도인 된 교회 안의 성도들을 돌아보는 사람이, 결국 세상을 돌아보며  섬기는 사람인 것입니다.   또 신앙 안에서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내 주변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복음을 전함으로 전도해서, 그들을 기어코 라도 하나님의 일군으로 만들어 가는 사람, 이런 사람이 또한 세상을 섬기는 성도들인 것입니다.  

세상을 섬기는 사람이, 세상에 기억되는 사람이며, 세상을 실망하게 하지 않게 만드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아름답게 변화시켜 나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서 바나바처럼, 또는 안드레처럼, 내 주변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이 붙여 주신 귀한 사람들인 줄 알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까지, 또한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게 되게 까지, 그들을 사랑하며 섬겨갈 수 있는, 주님의 신실한 제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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