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미 6:6~8)

  • 잡초 잡초
  • 436
  • 0

첨부 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미 6:6~8)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자기 주변 환경에 책임을 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주변 환경은 변하게 되어있는 법입니다. 이 말을 더 심도 있게 생각해 보면 내 주변을 보면 내가 한 행위를 알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쉬운 예로 내가 만나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친절하게 하면 내가 남에게 친절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왠지 모든 사람이 나를 싫어하고 나로부터 멀어지려고 하고 영 반가워하지 않는다면 내가 뭔가 잘못하고 사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이 철이 들어갈수록 내 책임과 그 원인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누가 나에게 대해 무슨 시비의 말을 하느냐, 나를 능욕한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내서 보응하고야 말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성숙한 사람은 그 문제의 근원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찾아 고치려하는 사람이 건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 이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경제의 문제도, 정치의 문제도, 인간관계의 문제도 그 근본원인으로 돌아가서 생각할 줄 아는 그것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늘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을 그가<무엇을, 얼마나 가졌냐>고 하는 소유에 따라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가장 하등한 평가기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좀 더 상향시켜서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바로<그가 무엇을 생각하느냐>입니다. 그의 철학입니다. 그의 지식이 무엇이냐 입니다. 그의 사상 속에 무엇이 들어있느냐에 따라서 사람은 평가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친구 세 사람이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당시에는 은행이 없던 때라 그들은 가지고 있던 돈을 함께 모아 은밀한 장소에 묻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밤중에 그 돈을 훔쳐 자기만 아는 곳에다 숨겨 놓았습니다. 

며칠 후 세 친구는 당시의 솔로몬 왕을 찾아가서 그들 중에 누가 범인인지를 판정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솔로몬 왕은 세 친구에게 문제를 내면서 각자가 답을 해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돈 많고 예쁜 아가씨가 마을 청년에게 시집가기로 약속을 해놓고 그 후 아가씨는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고 약혼한 청년을 찾아가 위자료를 요구하면 주겠으니 파혼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청년은 위자료 따위는 필요 없다고 하면서 파혼에 동의해 주었다. 그런데 그 아가씨는 어떤 노인에게 유괴 되었다. 그 노인이 몸값으로 많은 돈을 요구하자 자기와 결혼하려다가 파혼을 당한 남자도 위자료를 받지 않고 나를 놓아주었으니 당신도 나를 놓아달라고 간청했고 이에 노인은 아무 말 없이 아가씨를 놓아주었다. 이 가운데서 누가 제일 칭찬 받아야 할 사람인지 답하라."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첫째 사나이는 파혼을 당하면서 위자료도 받지 않은 청년이 상대방의 의사를 무시하면서까지 무리하게 결혼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칭찬 받아야한다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사나이는 사랑 없는 결혼을 취소하는 용기를 가졌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현명함을 가졌기 때문에 아가씨야말로 칭찬 받아야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세 번째 사나이는 말이 안 되는 바보 같은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약혼한 청년은 파혼해 주면서 한 푼의 돈도 받지 않은 바보이고, 노인은 돈 때문에 유괴해 놓고 한 푼도 안 받고 그냥 되돌려 보내는 바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멍청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욕을 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솔로몬 왕은 세 번째 사나이를 범인으로 지목합니다. 그 이유는 두 사람은 약혼자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인간관계와 애정에 대해서 의식하고 이야기하는데 세 번째 사람은 오로지 처음부터 끝까지 돈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기 때문에 틀림없는 범인이라고 정확히 결판을 내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의 생각이 문제입니다. 무엇에 매여 살고 그의 사상이 무엇에 물들어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생각이 머무는 곳에 내 인격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방식을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긴[데카르트(Descartes]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철학자다운 명제로 유명해졌습니다만 문제는 그 생각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기독교가 번성했던 중세시대였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을 때 데카르트는 신의 의지에 의해 사람이 움직인다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이지 신이 자신을 존재하라 해서 존재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물론 사람의 생각이란 중요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란 다른 한편으로는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역시 인간에 대한 평가는<무엇을 생각하느냐>에만 따라서도 절대적으로 평가할 것이 못됩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고 선한 의도를 지녔다 할지라도 그것이 불완전한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평가하는데 그보다 진일보하여<그가 무엇을 행하느냐>로 보게 됩니다. 알기는 알고 생각은 있는데 행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알 길이 없습니다. 

교회를 오래도록 다닌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알고 복음도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너무나 잘 압니다. 성경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전도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전문가처럼 잘 압니다. 기도해야한다는 것도, 봉사해야 한다는 원리도 알고, 성도의 교제도 외칩니다. 그러나 현장에는 코빼기도 안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지식, 그의 말이 아니라 그의 행동거지가 문제입니다. 뭐 안다고 떠드는데 행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행위에 따라서 평가되어 집니다. 그런데 보세요. 행동으로 표현되기까지가 문제입니다. 사랑이 없는 행동이 문제요, 책임 없는 행동이 문제입니다. 그런고로 <무엇을 행했느냐>이전에<그 마음에 얼마나 사랑했느냐?>.<그 속에 얼마나 사랑이 담겼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자[어거스틴]은 말합니다. "인간은 알고 있는 것에 의하여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한다. "행동에는 거짓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엔 거짓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사랑에 의하여>그를 평가 할 수 있어야합니다. 무엇을 사랑하느냐? 누구를 사랑하느냐? 왜 사랑하고 있느냐? 입니다. 

사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한 것만큼만 알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해서 행한 일 만큼만 가치가 있는 것이요, 사랑 아닌 것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결국 사랑이란 진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진실입니다. 내가 가진 외부적인 조건들로 나를 감출 수 없는 것이며, 과장된 행동으로 나를 숨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식적인 열심이나, 형식에 지나지 않는 일상화 된 모습들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진실을 원하십니다. 오늘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주시는 본문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것은 진심이 있는 속사람이요, 사랑의 진실이 있는 영적인 삶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할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 용서함 받고자 자기들 나름으로 가장 귀한 번제물과 가장 많은 번제물로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고자하는 어리석은 행위로 책망 받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에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율법에서 송아지를 가장 귀한 제물로 규정하고 있고(출29:10-14; 레8:2) 당시 송아지로 제물을 드렸다 하면 모두가 인정해주는 제사였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마음이 드러나 있는 부분입니다.  자신들의 죄악 된 행위에 대해 참 회개는 하지 않고 단지 좋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줄로 생각하는 실로 어리석고도 무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 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은 무엇을 뜻합니까? 많은 제물을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또한 그 많은 제물이 드려짐으로 동시에 자신들의 수만 가지 죄악이 용서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유치한 생각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더군다나 기가 막힌 것은"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드릴까"하고 있습니다. 

착각해도 유분수지 이게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무지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것은 실제로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방 신[몰렉]을 숭배하던 때에 사람을 불태우는 방법(렘7:31)으로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절대로 금지하셨던 가증한 행위였습니다.(레18:21;왕하16:3;사57:5)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교적인 제사를 생각한 것은 그들이 이방의 우상숭배행위에 얼마나 젖어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올바른 신앙지식이 없는 무조건적인 신앙열심은 때로 무서운 죄악행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배워야합니다. 그래서 훈련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라도 적당히 죄짓고 살면서 주일 예배 한번 잘 드리는 것으로 일 주일의 죄를 씻음 받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자기가 짓는 죄와 예배에 참석하는 횟수로 충분히 보상 받을 수 있다고 여기며 살지는 않습니까? 또한 회개의 기도를 드리기 보다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물로, 혹은 헌금으로 죄에 대한 보상을 이루려고 하는 어리석음은 없습니까? 오늘 무지몽매한 이스라엘과 같은 삶으로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한다면 잘못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래자로 혹은 영업상대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지 모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요, 업신여기는 행위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나에게 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합니다. 그것은 8절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 곧, <정직>과 <신실>과 <사랑>입니다. 

인도의 민족운동 지도자요 사상가인[마하트마 간디(Gandi, Mohandas Karamchand)]라는 사람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한평생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일한 사람입니다. 그의 글에 유명한 글이 있습니다. "내가 한번 거짓말을 해서 나라가 독립된다 해도 그럴 수 없노라! 왜냐하면 거짓말로 세워진 나라는 망하기 때문이다." 

여러분, 애국도 정직함으로 말미암는 것이요, 생각과 사상도 진실함으로 시작 되어야합니다. 정직하다는 것은 신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실함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올발라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진실해야 하겠습니다. 주님 오시는 이 계절에 그 분을 부끄럽지 않게 맞이할 만큼의 신앙이 되어 있는지,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믿음인지를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 봐야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거짓과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 감추어 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속으로 지은 죄를 알량하게 보이는 행위로 덮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용납하시지도, 원하시지도 않습니다. 오직 신실과 정직만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삶이요, 곧<하나님이 나에게 구하시는 것>들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