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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마리아의 찬가 (눅 1:4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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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찬가 (눅 1:46~56) 
  

우리는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 ”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 말을 진심으로 믿으십니까? 혹시 순서를 따라 습관적으로 외우지는 않습니까? 만일 우리가 진심으로 믿지 않는다면 성탄절은 무의미해집니다. 십자가도 무의미하고, 천국도 나와 상관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처녀의 몸에 잉태되어 사람이 된 것도 큰 기적이지만, 그것을 믿는 것도 큰 기적입니다.   

사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특히 요즘처럼 이성을 숭상하는 시대에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동정녀 잉태를 의심합니다. 심지어는 빈정거리며 부정합니다. 어떻게 처녀가 아이를 낳느냐 이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생아니 뭐니 별소리를 다하게 되는 겁니다. 무슨 생각을 하든 무슨 소리를 하든, 그것은 본인의 선택이고 자유지만, 그 결과와 책임도 자신의 몫임을 알아야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까다로운 청년이 새로 왔습니다. 동정녀 탄생 설교를 들었는데,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에게 다가가 따지듯 물었습니다. “아니, 목사님! 처녀가 아이를 낳다니 도대체 그게 말이 됩니까?” 목사님이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혀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데, 옆에 서 있던 장로님이 보다 못해 나섰습니다. “여보시오! 아니,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도 가만히 있는데, 당신이 뭔데 야단이요?”  

정말 그 말이 맞죠. 동정녀 잉태 사실을 믿기 어려웠던 사람은 누구보다 요셉이었을 겁니다.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의 배가 불러오는 것을 보고 얼마나 갈등이 심했겠습니까? 천사가 나타나서 차근차근 경위를 설명해 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도저히 믿을 수 없었을 겁니다. 이처럼 가장 믿기 어려운 입장에 있던 요셉이 믿었다면, 못 믿을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탄절에 있어 가장 큰 기적은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 아니라, 요셉이 그것을 그대로 믿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동정녀 마리아의 잉태를 그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성탄절이 우리에게 진정한 축복이 됩니다.   

오늘 본문은 마리아가 잉태한 후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지어 부른 시점은 ‘수태고지’(受胎告知 Annunciation) 직후입니다. ‘수태고지’라 함은 천사 가브리엘이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성령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잉태될 것을 알려준 사건(눅1:26~38)을 가리킵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서 잉태 사실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정말 믿기 어려웠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뭐라고 말하죠? 마리아의 친척인 엘리사벳이 노인인데도 잉태했다는 겁니다. 엘리사벳은 제사장 사가랴의 부인으로 늙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불임증 환자였습니다. 그러다 늘그막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들을 잉태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잘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뭐가 불가능하겠느냐 이겁니다. 마리아에게도 그런 기적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그 말을 듣고 너무 신기해서 엘리사벳의 집으로 급히 달려갑니다.   

엘리사벳을 만나보니 정말 임신 중이었습니다.(눅1:39~45 참조) 더욱 신기한 것은 태중에 있는 아이(장차 세례 요한)가 마리아의 잉태를 알아보고 뛰놉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기뻐합니다. 그런 가운데 지은 노래가 바로 본문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흔히 ‘마리아의 찬가’(The Magnificat)라고 부릅니다. 

마리아가 이때 얼마나 기뻐했는지 그의 고백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46절~47절. “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 ” 마리아의 심령이 큰 기쁨으로 약동하고 있습니다.   


[1] 마리아에게 임한 은혜 : 여자 중에 가장 복된 사람   

그러면 구체적으로 마리아가 그렇게 기뻐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에게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같이 천한 사람에게 그 큰 은혜가 임했다고 생각하니 주제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기쁨이 솟구쳤습니다.   

마리아에게 임한 은혜는 한 마디로 세상의 모든 여자들 중에 가장 큰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마리아는 감격 어린 어조로 노래합니다. 48절(하). “ ...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자신이 앞으로 영원토록 복 있는 사람이라고 칭송이 자자할 것을 확신했습니다. 

이런 사실은 이미 천사가 수태고지 하면서 마리아에게 밝힌 바 있습니다. 눅1:28 “ ...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선택되어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된 영광이 얼마나 큰지 암시합니다.   

또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났을 때 맞이하면서 축원한 말이 눅1:42~43에 나옵니다. “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 ’라는 말은 세상의 모든 여자들 중에 가장 복되다는 겁니다. 심지어 마리아를 가리켜 ‘내 주의 어머니’라고 표현하며 그 만남 자체를 영광스럽게 여깁니다. 당시 사회적 신분으로 보면 두 사람은 하늘 땅 차이입니다. 제사장 가문은 하이 클래스입니다. 반면 마리아는 나사렛 산골 동네, 별 볼일 없는 집안의 시골뜨기 소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칭송한 걸 보면 마리아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짐작이 갑니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마리아에 대한 태도에 양극단이 있었는데, 둘 다 비성경적인 것이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는, 마리아를 신격화 하는 겁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입장이죠. 무죄한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그건 아니죠. 마리아 역시 하나님 앞에 죄인이고 예수님의 속죄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또 마리아가 승천했다고 하는데, 이 역시 성경적 근거가 없습니다. 더욱이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것은 전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하나닝 외에 기도의 대상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태도는 마리아를 지나치게 높이다 오버한 겁니다.

다른 하나는 마리아의 존재를 너무 경시하는 것으로 종교개혁자들 중에 극단적인 사람들의 입장입니다. 마리아의 아름다운 신앙과 존귀한 위상을 흠모하고 따라갈 필요가 있는데 이를 무시하는 겁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마리아의 신앙을 모델로 삼고 본받아야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에 수많은 여자들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마리아를 선택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잉태되었느냐 하는 겁니다. 
  

[2] 마리아에게 은혜가 임한 이유 : 겸손, 믿음, 헌신  

마리아에게 큰 은혜가 임한 이유는 그에게 아름다운 신앙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아무리 하늘에서 억수 같이 비가 쏟아져도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받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마리아에게는 아름다운 신앙의 그릇이 준비되어 있었던 겁니다. 

① 겸손 :  

첫째로, 마리아는 겸손의 그릇을 준비함으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느끼고 있습니까? 본문 48절입니다.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 ” 자신을 천한 하녀라고 고백합니다. 정말 그랬어요. 그가 살던 고향 나사렛은 변방 갈릴리 지방에서도 산동네입니다. 오죽 하면 예수님의 제자 나다나엘이 처음에 예수님에 관해 들었을 때 무시하며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요1:46) 이렇게 퉁명스럽게 말했겠습니까? 한 마디로 마리아는 못난이 천덕꾸러기에 불과했고, 당시 이스라엘에서 가장 낮고 천한 소외 계층이었습니다. 

교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부자 교만과 거지 교만입니다. 부자라소 교만하기도 한데, 거지라도 마음이 강퍅해서 교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모습을 잘 알고 겸손히 고백합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주제 파악을 너무 잘한 겁니다. 국어를 잘 하려면 주제 파악을 잘 해야 되고, 수학을 잘 하려면 분수를 알아야 합니다. 이게 바로 ‘겸손’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하나님이 무조건 낮고 천한 신분의 사람만 좋아하신다는 건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이나 부귀영화가 좋은 것이지만, 자칫 잘못하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오히려 그 모든 좋은 조건들이 신앙에 방해가 됩니다. 아무리 높아져도 부해져도 하나님 앞에는 다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목욕탕에 가면 재미있는 일이 있습니다. 탈의실에서 보면 화려하게 차려 입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탕 안에 들아 가보면 다 똑 같아요. 벌거벗은 모습입니다. 사실은 이게 진짜 자신의 본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신분이 높아질수록 부해질수록 교만해지지 않도록 조심조심해야 됩니다. 

마리아는 세상의 높고 부한 사람들을 다 제쳐 놓고 자기를 선택해서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51절~53절.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이러한 겸손의 덕목이 얼마나 중요한지 성경은 곳곳에서 강조합니다. 잠3: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겸손한 자라야 하나니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또 막2:17 보면, 예수님께서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모든 인간이 다 죄인이지만, 의인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날 수 없고, 은혜를 받을 수도 없습니다. 오직 죄인인 것을 겸손히 고백하는 사람만이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마치 병든 사람이 건강한 줄로 착각하면 의사가 전혀 필요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높아지고 부해질수록 더욱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반대로 자신이 낮고 천하다고 생각해도 기죽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낮은 데 임하니까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이치를 깨닫고 전해준 말씀이 고전1:27~29에 있습니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무식해도, 약해도, 천해도, ... 겸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겸손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도 않거니와, 좋은 일이 생기면 자기의 공로로 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게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성지 베들레헴에 가면,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해서 세운 교회당이 있습니다.

예수탄생교회(The Church of Nativity)입니다. 그 교회당도 그 앞의 광장도 제법 큼직합니다. 그런데 교회당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의외로 작습니다. 높이가 1미터 20센티, 폭이 80 센티에 불과합니다. 「겸손의 문」이라 불립니다. 원래는 문에 컸는데, 말을 타고 왕이나 귀족들이 쑥쑥 들어오고, 도둑들이 쉽게 들어와서 작게 줄여 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인간적으로 대단한 사람이라도 교회당 안에 들어오려면 꼼짝 없이 겸손히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야 합니다. 제가 오래 성지순례 갔을 때 흥미로운 것을 보았습니다. 순례객 중에 한국 사람들이 많아서 그랬는지, 누군가 그 문 입구에 한글로 쪽지를 붙여놓았습니다. “머리 조심!”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탄하신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겸손히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마음을 조아려야 합니다. 고개를 빳빳이 들면 안 됩니다. 세상에서의 모든 조건과 계급장을 다 떼어야 합니다. 벌거벗은 모습으로 죄인임을 고백하며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예수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부디 이번 성탄 절기에 우리 각자 혹시라도 높아진 마음이 없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더욱 겸손해진 모습으로 성탄의 예수님을 맞이함으로 큰 은혜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② 믿음 :  

두 번째, 마리아는 믿음의 그릇을 준비함으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본문 49절을 보시죠. 49절.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 ” ‘능하신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큰 일을 행하셨다는 고백입니다. 큰 믿음의 고백입니다. 

처음에는 마리아가 자기 몸에 하나님의 아들이 잉태된다는 사실을 믿기가 너무 어려웠을 겁니다. 그래서 천사의 방문을 받고 뭐라고 말했습니까? 눅1: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뭐라고 말했나요? 

눅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인데 불가능이 있겠느냐 이겁니다. 정말 그렇죠. 하나님은 한다면 하시는 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거나 말거나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는 것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일입니다. 만일 마리아가 믿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넘어갔을 겁니다. 그런다고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포기하셨겠습니까? 그러니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믿는 자가 수지맞는 겁니다. 안 믿는 사람은 손해봅니다. 그래서 믿음이 귀한 겁니다. 

이런 걸 생각해 보세요! 서울역에 나가서 기차를 탈 때 어떻게 하죠? 몇 시에 기차가 출발하는 것을 믿고 나갑니다. 정말 그 시각이 되면 떠납니다. 내가 안 탄다고 기차가 안 떠납니까? 착각이죠. 내가 안 타도 기차는 떠납니다!  

사람들이 믿든 안 믿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셔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면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그런 안 믿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죄 가운데 살다가 영원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리아는 그 믿음으로 구원 받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런 은혜는 비단 마리아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닙니다. 모든 믿는 자들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본문 54절~55절에서 마리아가 노래합니다.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이스라엘에게만 아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 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그대로 임한다는 겁니다. 

부디 이번 성탄 절기에 마리아 같은 순전한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재확인하시고,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기적 같은 은혜를 풍성히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③ 헌신 :

세 번째로, 마리아는 헌신의 그릇을 준비함으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다시 49절을 보시죠.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 ” 
마리아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큰 일을 행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잘 따져보면 이게 뭡니까? 자기 몸을, 아니 인생 전체를 하나님 앞에 드린 겁니다. 

천사가 방문해서 수태고지 할 때 처음에는 당황스러워했지만, 마침내 그가 뭐라고 고백합니까? 눅1:38 말씀이죠.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자기 몸은 하나님의 것이니까, 자기 인생은 본래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까, 주인이신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단순한 입술의 고백이 아닙니다. 자기 목숨과 자기 인생 전체를 던진 겁니다.

사실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달 잉태를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고난이 시작되는 겁니다. 정혼자인 요셉의 의심, 파혼의 위기, ... 그 뿐이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의 율법으로 처녀가 임신하면, 특히 정혼 기간 중에 그런 일이 생기면 돌팔매를 당합니다. 마을 밖으로 끌려 나가서 마을 사람들의 돌에 맞아 죽게 됩니다. 자기 혼자 목숨만 일는 게 아니죠. 가족들은 어떻게 되고요 ... ? 그 모든 위험을 다 무릅쓰고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한 겁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여러 고비들을 넘깁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방문해서 해명해 줌으로 파혼도 넘기고 가정을 이룹니다. 돌팔매도 모면합니다. 가족들의 명예도 보존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내내 마리아는 갖가지 아픔과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 과정이 그 앞에 펼쳐질 겁니다. 그런데도 그는 기쁨으로 찬양했다는 시실이 정말 놀랍습니다! 

아기 예수가 처음으로 성전에 올라가서 정결예식을 할 때의 일입니다.(눅2:22~35 참조) 성정에서 기도하던 시므온 선지자를 만납니다. 그때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예언하는데, 그 다음에는 마리아를 향해 예언합니다. 

눅2:34~35 “34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 ” 

마리아가 장차 칼이 마음을 후벼 파듯이 큰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란 예언입니다. 정말 그랬죠.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자마자 헤롯왕의 핍박을 피해 핏덩이 같은 아기 예수를 안고 애굽으로 피신할 때 얼마나 조마조마했을까요? 공생애가 시작되면서 집을 떠나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심정은 또 어땠을까요? 그 후에 온갖 고초를 당하고 조롱을 당하는 아들의 모습,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면 채찍 맞는 아들의 모습, 마지막 십자가 상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신음하는 아들의 모습, 부활 후에도 유대인들과 로마 당국자들의 박해를 피해 이러 저리 피신하던 고통 ... 그 극치는 무엇보다 십자가에 달여 죽은 예수님의 시체를 끌어안고 흐느끼는 마리아의 슬픔이었을 겁니다. 

로마에 가면 베드로 대성당이 있죠. 입구로 들어가면 오른 쪽에 대리석 조각상이 있는데,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조각상「피에타」(Pieta)입니다.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슬픔’ ‘비창’이란 뜻인데, 예수님의 시체를 안고 비통해 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조각해 놓은 작품입니다. 그 얼굴에 나타난 슬픔은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받은 큰 은혜와 영광의 배후에는 이런 뼈아픈 헌신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헌신이 요구됩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고 안심하고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모습이 아닙니다. 값싼 복음이 아닙니다. 값비싼 보배 피로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면 드려야 합니다. 우리 자신 ... 몸과 마음, 시간, 물질, 재능 ... 우리의 신앙은 비유컨대 화재보험을 든 차원이 아닙니다. 

이번 성탄 절기에 성탄의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이런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더 많은 것을 받으려고 헌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그 이상으로 우리에게 채우실 겁니다. 헌신하는 자들에게는 은혜 위에 은혜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성도 여러분! 성탄절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번 성탄 절기에 마리아의 찬가를 깊이 묵상하면서 마리아가 받은 은혜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은혜를 받을 만한 그릇을 준비한 마리아의 신앙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모쪼록 이번 성탄 절기가 우리에게 큰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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