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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마리아의 찬양 (눅 1:4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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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노래 (눅 1:46~55)


마그니피카트

오늘 읽은 말씀은 '마그니피카트'라고 불립니다. 
46절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에서 ‘찬양하며’가 라틴어로 ‘마그니피카트(위대하다)’입니다. 마그니피카트는 교회에서 불려지는 가장 유명한 기도요 노래 중의 하나입니다. 초대교회부터 이 기도는 교회의 기도로 불려졌고 중세에는 주로 수도원에서 저녁기도로 드려졌습니다. 바흐의 ‘마그니피카트’ 또한 유명합니다. 이 곡은 주로 성탄절에 불려지는데 성악과 기악이 어우러진 매우 아름다운 칸타타입니다. 

이 기도는 마리아가 수태고지 곧 자기에게 임한 아기 예수의 잉태의 소식을 듣고 이를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마리아는 46절에서 “주를 찬양한다”, 47절에서 “내 구주를 기뻐하였다” 48절에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라고 하였지만 정말 마리아가 기뻐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가? 아닙니다. 교회 2천 년사에서는 그렇게 되었지만 수태고지를 듣는 순간은 아니었습니다. 

흔히 그렇죠. 다른 사람이 이루어 놓은 결과만 보면 쉬워 보이지만 정작 일을 이루고 선택을 해야 했던 그 순간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지금 처녀의 몸입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은 했지만 정식 결혼은 하지 않은 사이였습니다. 그러니 처녀가 임신을 했다면 그것은 정말 큰 일 입니다. 

약혼자 요셉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질렀다 생각할 것입니다. 신명기 율법에는 이미 약혼한 처녀가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면 둘 다 돌로 쳐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결혼한 여자가 결혼 후 처녀가 아니었음이 판명될 때도 돌로 쳐 죽일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중동에서는 여성에 대해서는 가혹한 처분을 내리고 있습니다. 가족외의 다른 남자와 차를 같이 타도 음란죄로 규정합니다. 

옛날에는 결혼을 일찍 했기 때문에 아마 마리아의 나이는 15세 전후였을 것입니다. 학자들은 13,4세 정도 되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아무리 이스라엘 민족이 메시야를 기다렸다고 하지만 자기 몸 안에서 메시야가 탄생한다는 것은 어린 처녀로서는 감당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38절입니다.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지난 시간에 묵상했던 사가랴의 태도와는 다릅니다. 사가랴는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18) 하고 미심쩍어했습니다. 마리아의 이런 태도를 순명이라고 합니다. 순명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서로 반대될 때,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서로 다를 때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이때도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순명이요 순종입니다. 여러분이 이 갈림길에 서있다면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조용히 시집가서 편안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자기 인생이 어그러지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인가의 갈림길에서 마리아는 기꺼이 주님의 뜻을 따르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기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마리아처럼 확실히 하나님의 뜻이 주어진다면 순종하겠는데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혼동될 때가 많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실상 마리아도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을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는 고백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저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는 고백입니다. 

마리아의 위대함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각오가 되어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 이후에 마리아가 어떻게 했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확인하기 위해 자기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했습니다. 거기서 뱃속에 있는 세례 요한의 표징과 엘리사벳의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마그니피카트라는 찬양을 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자세를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순종의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증거를 보여주실 것이며 그 증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기도 전에 자기에게 손해가 될 것 같으면 하나님의 뜻 같아 보일지라도 미리 차단시켜버립니다.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 순종의 길은 쉽지 않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잘못하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남편이 믿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실상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리아가 죽었습니까? 마리아가 고생만 하는 불쌍한 여인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남편 요셉도 믿게 되었고, 마리아는 예수님 다음으로 아니 가톨릭에서는 예수님과 같은 반열에 이를 정도로 복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영화롭게 만들어주십니다. 

내 마음이 내 구주를 기뻐하며

마리아의 찬양의 위대함은 그녀가 이미 이루어진 다음에 이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지기 전부터 미리 찬양하고 기뻐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노래는 주요동사들이 다 과거형입니다. 확실히 이루어질 것을 믿는 확신에서 이렇게 과거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금 손 안에 주어진 것은 없지만 미리 감사하고 미리 기뻐합니다. 또 그 기뻐하는 이유도 단순히 자기 소원이 이루어지거나 기도가 응답되어서가 아닙니다. 장차 자기가 만세에 복 있는 여인이 될 것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의 기쁨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데 있습니다. 자신이 그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도 기쁨이 있습니까? 그 기쁨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우리 기도가 응답되거나, 어떤 세상적인 영광이나 물질이 채워질 때 기뻐합니다. 그런 일이라면 세상 사람들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쁨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데 우리 기쁨이 있습니다. 

하박국의 기쁨을 생각해 보십시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 

하박국은 물질적으로 손에 쥔 것도 없지만 그는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고난이 닥쳐오고 있지만 기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분명히 고백합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그는 하나님 때문에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승리할 것을 믿기 때문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쁨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때문에 기뻐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 때문에 기뻐하십니까? 내 손 안에 쥔 것 때문에 기뻐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인하여 기뻐하십니까? 

여러분 요즘 경제 위기 때문에 힘듭니다. 그러나 그것들로 인해 우리 기쁨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부유하나 가난하나 우리 기쁨의 근원은 우리 예수님 때문이기에 그렇습니다. 오히려 힘들어질지라도 그것이 만약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라면 우리는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이 경제위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물질만능주의로 달려 왔습니다. 공동체를 생각하기보다는 이기적인 삶을 살아왔습니다. 사랑과 나눔보다는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건강한 노동보다는 투기적이며 허황된 삶에 홀려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그 바닥으로부터 뒤집으며 하나님은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회와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위기는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떡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존재들입니다. 떡은 상실될지라도 대신 말씀이 우리 안에 가득하다면 우리는 그것 때문에 충분히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부자를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마리아의 찬양은 그녀 스스로 한 계집종의 찬양이라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가져오실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무엇인지 정확히 꿰뚫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이 51절과 53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여러분도 읽으시면서 그 과격함에 놀랐을 것입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노래, 마리아의 순종하면 무언가 아름답고 순수하고 갈등이 전혀 없는 낭만적인 성탄절 밤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노래에는 인간 역사에서 가장 첨예한 갈등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탠리 존스라는 분은 “마그니피카트는 이 세상에서 가장 혁명적인 문서이다.”고까지 말했습니다. 마리아가 노래하는 하나님나라의 질서는 세상의 질서와는 다릅니다. 세상의 질서는 교만하고 권세 있고 부자를 부러워하고 그들을 찬양하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나라는 그와는 반대입니다. 오히려 비천하고 주린 자가 높임을 받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습니다. 

교만한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없이 혼자 살 수 있다고 하는 자가 교만한 자입니다. 자기가 마치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을 작은 자기의 틀로 가두려는 자가 교만한 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성경지식이 뛰어난 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을 알지 못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들이 잘 안다고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늘 겸손해야 합니다. 자기를 비우고 낮추고 모른다고 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자신을 나타내어 보여주십니다. 

권세 있다고 거드름 피우고 권력을 마구 행사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그런 자들을 내리치실 것입니다. 권세는 섬기고 일하라고 주신 것이지 자기 이익을 쫒고 힘없는 자들을 누르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요즘 이명박 정부의 모습은 겸손하지 못한 권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은 힘으로 누르거나 법에 올가미로 얽어매고 있습니다. 교사나 노동자나 마구 쫓아내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위기의 때에 서로 신뢰하고 통합해도 힘든데 자꾸 이런 분열의 정치를 하면 국민이 한 마음이 되지 못합니다. 이렇게 권력을 남용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내리칩니다. 큰 국가 단위 뿐만 아니라 회사나 교회에서도 자기에게 주어인 조그만 권력을 남용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마리아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도다”

마리아는 또한 장차 예수님께서 이루실 사역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그 어느 성경보다도 누가복음은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얼마나 지대한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반대로 부한 자에 대한 경고도 많이 담고 있습니다. 3장에서 이어지는 세례 요한의 회개 메시지도 그렇습니다. 세례 요한은 어떻게 회개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받고서 이렇게 답을 줍니다.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3:11) 누가복음 4장 18절과 19절은 예수님의 취임설교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여기 가난한 자는 단어 그대로 물질적으로 궁핍한 자를 말씀합니다. 포로된 자는 감옥에 갇혀 있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주리고 핍박당하는 자들에게 해방과 구원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20절 이하는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와 대비되어 평지설교라고 불립니다. 주님이 평지에 서셔서 말씀을 전하셨을 뿐만 아니라 낮은 곳으로 내려가시는 주님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은 이곳에서 팔복과 비슷한 말씀을 선포하시는데 산상수훈과는 좀 다릅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눅6:20-21) 

이 말씀을 사람들이 영적으로 해석해서 희석시킬 것을 염려하셨던지 주님은 또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6:24-25) 너무 과격하지요. 누가 시청 앞에서 이렇게 설교하면 당장 “빨갱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12장에 가면 어리석은 부자 비유가 나옵니다. 이 부자는 실상 세상의 눈으로 보면 지혜로운 부자입니다. 소출이 풍성하니까 곡간을 더 크게 짓고 그곳에 모든 곡식과 물건을 쌓아두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먹고 즐기자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부러워하는 부자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12장 20, 21절입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했다는 뜻은 자기 재물로 가난한 사람을 돕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하늘에 상급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그래서 14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14:13)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14:14)는 이유 때문입니다.

16장에는 그 유명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가 나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 비유를 읽어보아도 거지 나사로가 예수 믿었다니 하나님께 믿음이 있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또 부자가 예수를 믿었다느니 믿지 않았다느니 그런 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자는 왜 지옥에 갔고 나사로는 왜 아브라함 품속에 있게 되었는가? 이유는 단 한가지 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이 세상에 살면서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기 때문이며 부자는 거지 나사로를 외면하며 호의호식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6장 25절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저는 하나님의 이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두 아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아들이 있고 부유한 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두 아들의 아버지는 누구에게 더 관심이 갈까요? 당연히 가난한 아들입니다. 아버지가 재산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더 주고 싶을까요? 당연히 가난한 아들입니다. 또 아버지가 보니 형은 부자인데 가난한 동생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형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요? 괘씸하죠. 이것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세상의 부모도 그런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더 그러하시지 않겠습니까?

누가복음 19장에는 삭개오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요 세리의 장인 삭개오가 구원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예수님을 믿은 이후 결단한 내용이 매우 중요합니다. 8절입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삭개오가 이렇게 고백하자 예수님이 즉시 이렇게 축복하십니다. 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구원의 선포가 단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만이 아니라 그가 가난한 자를 돕겠다는 결심 이후에 선포된 것에 주목하십시오.

얼마나 주님이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 부유한 자들에 대해서 나눔을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지 아시겠지요. 여러분 가난한 자를 생각하는 것이 정의요 주님의 뜻입니다. 신앙인들은 이 말씀을 따라서 자신의 물질에 대한 태도를 정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교회는 이 말씀에 따라 세상이 운영되도록 요구하고 정책에 반영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한국교회 신앙인들은 개인적으로 가난한 자를 잘 돌봅니다. 그런 것처럼 정치를 행하거나 사회의 높은 위치에 있을 때는 가난한 자를 생각하는 정책이 펼쳐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인다운 사람의 행동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짐 월리스라는 미국 복음주의자가 성서에서 가난한 자를 도우라는 성경 말씀을 가위로 오려내고 나니 성경이 누더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한국교회에서 믿고 있는 성경이 이처럼 누더기 성경이 아닌지 두렵습니다. 자기에게 좋은 말씀만 적용하려 하고 자기에게 쓴 말씀은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사회가 부자와 가난한 자로 나뉘어 극심한 갈등이 빚어질 때 교회가 성경의 말씀처럼 나눔과 사랑을 실천한다면 정말 한국 사회에서 칭찬받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저는 참 아직도 아쉽습니다. 종합부동산세 폐지 문제로 한국사회가 시끄러울 때 부유한 신앙인들이 우리는 사회적 나눔과 환원을 위해서 종합부동산세가 존속되고 아니 더 강화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운동이 일어났다면 한국사회에 미치는 파급력은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인들도 세상과 똑같아요. 한국 사회에는 부자와 가난한 자만이 있지 예수의 제자는 없어요. 개인적으로는 신실하지만 그 신실함이 사회적으로까지 확산되지 못하는데 우리 한국교회의 비극이 있습니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마리아의 노래는 정말 위대한 노래입니다. 청순가련한 한 어린 계집종의 노래가 아닙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성경 말씀의 핵심을 뚫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투철한 사회 역사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나 한국교회에 이런 마리아와 같은 강인하면서도 역사의식 있는 신앙인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요즘 우리 한국교회는 개인의 상처와 치유 가정의 행복 등 극히 개인적인 문제를 다루는 설교가 주류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상처만 안고 끙끙대지 민족의 상처를 안고 끙끙대는 큰 사람들이 없습니다.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이야기를 하면 왠지 영적인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실제 영적이라는 단어를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것으로 바뀌어 버린 것 같습니다. 구약 말씀이나 신약 말씀을 보세요. 선지자들 대부분의 메시지는 사회와 역사를 향한 설교요 선포입니다. 하나님나라는 개인의 심령 가운데 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땅 위에 임합니다. 

마리아의 기도와 찬양은 결코 연약한 한 여자의 노래가 아닙니다. 한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자신을 받쳤던 위대한 여성의 힘 있는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처럼 강인하고도 위대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 그릇은 연약한 질그릇과 같을지라도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위대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잔다르크를 보십시오. 잔다르크는 작은 소녀였지만 13세에 위기에 빠진 조국 프랑스를 구하라는 천사 미가엘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 소리에 순종하여 16세에 오를레앙 전투에 참여하여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했습니다. 누가 한 작은 소녀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것이라 생각했겠습니까? 

3.1운동을 주도했던 유관순 열사는 어떻습니까? 그녀도 신앙의 사람이었고 작은 17세 소녀로서 천안 병천에서 3.1운동을 이끌었습니다. 후에 체포되어서도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3.1운동에 참여하기 전에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이시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 왜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이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하나님은 순종의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그가 아무리 작은 여종일지라도 순종할 때 하나님은 위대한 도구로 마리아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순종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순종의 도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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