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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로고스(말씀으로 오신 예수님) (요 1: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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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 (요 1:14~18)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성경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입니다.  
이 네 권의 성경을 크게 둘로 나눕니다.  
마태, 마가, 누가를 한 묶음으로 보고, 요한복음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공관복음’ 이라고 부릅니다.  

'공관'이란 말은 같은 관점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공관복음은 많은 부분에서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모든 정보가 서로 교환되고, 사건이 중복되고, 스토리가 거의 비슷하게 전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다릅니다.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동일하지만 전개와 사건과 목적이 공관복음과는 다르게 접근합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는 없는 것이 요한복음에 있고, 요한복음에는 없는 것이 공관복음에 있는 것을 봅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이야기가 없습니다.  비유도 없고, 최후의 만찬과 같은 내용도 없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의 기원을 태초로 거슬러 올라가고, 비유대신 말씀과 의미를 유독 강조하고, 최후의 만찬은 없지만 생명의 떡에 대해 나옵니다.  반대로 공관복음에는 없는 것이 요한복음에만 있는 것도 있습니다.  니고데모의 이야기나 세족식, 다락방기도와 같은 말씀은 공관복음에는 없습니다.  

이처럼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서로 다른 접근을 통해 예수님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은 넓고, 요한복음은 깊다는 것을 느낍니다.  공관복음을 통해서는 예수님에 관한 많은 것을 배우지만,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에 관하여 깊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심오함이 있습니다.

이런 비교가 되는 요한복음을 보면서 한 가지 독특한 특징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공관복음과는 달리 요한복음에는 사람들의 이름이 별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자들과 한 두 사람만 나올 뿐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장 2장에는 제자들의 이름이 소개되고, 3장에는 니고데모가 나옵니다.  그 이후 이름이 사라집니다.  4장에 사마리아 여인, 왕의 신하의 아들, 5장에 38년 된 병자, 8장에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 9장에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 이 모두는 참 중요한 사람들인데 이름이 없습니다.  공관복음과 비교하면 아주 다른 관점입니다.  그들의 이름이 없지는 않았을진대 왜 그럴까요?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것은 성경이 예수님에게만 초점을 두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난 것보다 예수님이 그들을 만난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온 시선을 집중합니다.   

그 예수님을 우선적으로 소개하는 것이 바로 1장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누구신가, 어떤 분으로 세상에 오셨는가를 말하고 그 예수님의 위대함을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증명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무엇보다도 1장에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먼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포스라는 말을 통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로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말씀’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오신 분입니다.  여기 말씀은 요한이 성경을 기록할 당시 헬라철학의 근본이 되고 사상이었습니다,  당시 세계는 로고스가 모든 것의 시작이고, 과정이고, 끝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 사도요한은 로고스를 예수님으로 접목시킴으로서 예수님이 곧 모든 것의 근원이심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본문에서 로고스에 담긴 의미를 강조합니다.  로고스라는 말과 함께 다른 단어를 통해 그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거하신다는 말입니다.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말합니다.  말씀은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거한다는 말을 종종 사용합니다.  여기 거한다는 말은 천막을 친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시대 이 말은 하나님의 성전과 관련하여 먼저 사용되었습니다.   성전은 한마디로 하나님이 천막을 치고 거하시는 처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전을 드나들며 거기에 하나님이 거하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성전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신약에서는 여기 거한다는 말이 마태복음 1장에 임마누엘로 잘 표현되었습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은 곧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것이 임마누엘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짧은 생애지만 우리와 함께 하셨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에 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입니다.  그분이 인간과 함께 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세상에 거처를 삼으시고 영원히 인간과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말씀이신 주님은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거하시면서 무엇을 하시느냐입니다.  사실 사탄도 세상에 거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 곁에서 끊임없이 참소하고 비방하고 넘어지고 쓰러지게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면서 주님은 과연 무엇을 하실까요?

이것을 우리는 하늘나라의 광경을 통해 배웁니다.  하늘나라도 결국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국에서 우리와 함께 거하면서 무엇을 어떻게 하실까요?  사도요한 요한계시록을 통해 이것을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이유입니다.  천국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유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힘과 위로를 주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분으로 이 땅에 오셨고, 우리 마음에 오신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믿는 순간, 주님은 내 안에 오십니다.  그래서 내 안에서 영원한 거처를 삼으시고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 주님은 늘 내 곁에서 모든 아픔과 눈물과 고통을 씻어주시고, 힘들고 지친 나를 일으켜 세우시고, 실패하고 낙심한 나에게 용기를 주며 천국까지 이끌어 가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분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은 지금 우리 안에 영원히 거하시는 것도 믿으십니까?  주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 아십니까?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씻어주십니다.  아파서 울고, 힘들어서 울고, 억울해서 울고, 괴로워서 우는 나의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주님은 나의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돕는 자로 나와 함께 하십니다.  약한 나를 강하게 하고, 쓰러지는 나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내 손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과 더불어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시 힘을 내십시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둘째는 충만하다는 말입니다. 

14절을 다시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말씀은 16절에서도 반복됩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로고스로 오신 예수님은 곧 충만으로 오셨습니다.  여기 ‘충만’이란 말은 ‘플레레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헬라어의 이 말은 가득차서 넘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주님의 역동성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차고 넘치게 흘러 나와 사람들에게 임하여 역사(役事)한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주님이야말로 ‘고갈되지 않는 샘’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주님은 이런 충만하신 분입니다.  은혜가 충만하고, 진리가 충만합니다.  그로부터 받는 모든 것은 충만의 충만 이기에 은혜위에 은혜라고 강조합니다.  주님은 충만으로 오셔서 부족하고 모자란 인생을 가득 채우고, 또 채우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늘 충만한 것을 강조합니다.  그의 사랑이 충만하고, 용서가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세계에는 결코 퍼주고 나눠주고 베풀어도 절대로 모자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이신 사랑이 그렇고, 그가 사람을 보시는 긍휼과 자비도 그렇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때에도 열두 광주리가 남도록 충만했습니다.  주님의 세계에는 충만하고 넉넉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풍성함이 무엇인지, 넉넉함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이것을 믿음 안에서 잘 깨달은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그래서 시편 23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뭔가가 부족합니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은 고갈과 결핍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삭막하고 건조하고 메마른 황무지와 같은 세상입니다.  사랑하는 것 같지만 사랑이 모자라고, 용서하는 것 같지만 여전히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베푸는 것 같지만 늘 인색하고, 드리는 것 같지만 넉넉한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 주님은 풍성하고 충만한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여호와는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그분이 나의 구원자요, 영원한 동반자이십니다.  그분이 언제나 나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넉넉하게 채워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주님 안에서는 늘 충만합니다.  날마다 주님으로부터 충만한 사랑, 충만한 은혜, 충만한 진리, 충만한 용서를 받으면서 넉넉하고 풍요롭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나타내셨다는 말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14절에 우리가 그 영광을 본다는 말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왜 로고스로 주님이 오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말’이라는 것의 가장 큰 기능은 바로 ‘설명’입니다.  자기의 생각이나 마음을 말로서 설명하고 표현합니다.  만약 말이 없다면 우리의 속을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은 무엇보다도 설명을 위해 필요한 도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을 주신 것은 바로 이런 소통을 위함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가진 가장 큰 힘이 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도 결국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십니다.  말은 이처럼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말은 이런 설명과 표현의 기능이 우선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로고스, 말씀이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부터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보면 모두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 하나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체가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설명하는 존재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하루는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예수님께 나아와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간청합니다.   하나님을 한번 보면 소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빌립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간절한 바램입니다.  그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도저히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지금 자기 눈앞에 있는 주님을 통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 로고스로 오셨습니다.  그분의 모든 모습은 하나님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기 로고스의 의미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모든 삶을 통해 하나님을 잘 설명하셨다가 사역을 마치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은 곧 주님이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것처럼, 이제 주님을 믿는 모든 자녀들도 주님을 설명하기 위해 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아야 할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바로 주님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는 주님을 설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에서, 말에서, 행동에서 사람들이 주님을 보고 느끼도록 주님의 제자, 작은 예수로 살아야 합니다.  과연 나는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나의 생각, 말, 행동에서 주님을 설명하고 있습니까?  세상은 앞서가는데 우리들이 앞서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발전 없이 늘 제자리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1990년대 초반 빌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이 됐을 때 미국 언론은 그에게 세 가지 H를 조심하라고 강조했었습니다.  하나는 당시 국가적인 골칫거리였던 의료보험(Healthcare)이고, 또 다른 하나는 클린턴 못지않은 인기를 누릴 가능성이 높은 그의 부인 힐러리(Hillary)였습니다.  둘 다 우리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세 가지 H 가운데 나머지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휴브리스(Hubris)’였습니다.  휴브리스는 자만, 독선을 뜻하는 단어로 고대 그리스문학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이것을 영국의 역사학자인 토인비가 인용하여 더 유명해졌습니다.  토인비는 역사를 바꾸는데 성공한 창조적 소수는 자신의 성공에 너무 자만하다가 독선에 빠지고, 그래서 다음에는 실패하기 쉽다며 이러한 속성을 휴브리스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과거의 성공에 집착해 변화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확대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휴브리스는 자신의 과거 경험이나 능력을 절대적으로 믿고, 사람들이 어떻든 간에 또 세상이 어떻게 바뀌든 상관없이 자신의 방식을 지속적으로 밀어 붙이다가 결국 실패하는 사람들의 부질없는 독선적 오만을 일컫는 말입니다.  미국언론은 이것을 클린턴에서 주문했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사회, 모든 곳에서 휴브리스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패러다임 쉬프트(Paradigm Shift)’ 즉 발상의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자만하지 말고 자기발전과 성숙을 통해 지속적 승리로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 믿는 자에게도 너무도 중요한 자세입니다.  주님을 설명하고 나타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뭔가 성공을 했다고 안주하지 말고, 뭔가 이루었다고 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지속적인 성공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생각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정관념에서 깨지지 않는 생각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생각이 바뀌지 않으니 말이 바뀌지 않고, 말이 바뀌지 않으니 행동도 바뀌지 않습니다.  10년 20년이 지나도 늘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니 무슨 발전, 변화가 일어납니까?  

이제 우리는 주님을 설명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까지 고정관념으로 여긴 모든 것을 한번 위에서, 옆에서, 밖에서 보십시오.  보다 넓게 생각하고, 보다 멀리 보고, 더 깊이 사고하는 생각의 전환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이젠 새성전에서 새로운 성도에 걸맞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새 술을 헌 부대에 넣으면 아무리 새것도 새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휴브리스를 내려놓고, 패러다임 쉬프트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나타내고, 설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정 주님이 이 땅에서 보이신 것이 바로 패러다임 쉬프트였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은 빛으로 오셨고, 또한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셨습니다.  말씀이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게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하나님을 나타내셨습니다.  임마누엘로 오신 주님이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다시 힘을 내십시오.  주님의 세계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주님과 더불어 넉넉하고 풍요롭게 사십시오.  주님은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해 오셨고, 우리는 주님을 설명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성탄의 계절에 주신 말씀을 붙잡고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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