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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마리아의 찬송 (눅 1:4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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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찬송 (눅 1:46~56)


오늘은, 성탄절을 앞둔 대림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우리교회에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찬송을 부르는 주인공들을 축복하는 주일입니다. 원로장로 추대와 장로, 집사, 권사 은퇴식이 있습니다(3부예배). 

목회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드렸던 한 가지 기도제목이 있었습니다. 은퇴하면서 목회회고록을 쓰고 싶은데 제목을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고전 15, 10) 쓸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은 시작도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첨 일을 시작하는 기쁨도 크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고 일을 마칠 때의 기쁨과 감격은 비교할 수 없이 더 큽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지요. “命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 10). 예수님께서 요구하셨던 제자도의 겸손함입니다(하나님 나라의 상급이 큽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찬송을 부른 주인공]

누가복음 1, 46-56은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찬송입니다. 최초의 찬송을 부른 주인공은,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가 되셨던 마리아입니다. 

노래는 누가 부를 수 있는 것입니까? 노래하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은 사람도 있을까요? 성악가들, 가수들은 노래하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을까요? 피아니스트들은, 연주하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을까요? 세계적인 골퍼 최경주 선수도 퍼팅 때, 손이 덜덜덜 떨린답니다. 성악가들(가수들)도 󰡔노래 한 곡 불러 주세요󰡕하는 말처럼 부담스러운 것에 없답니다. 

(성악가나 가수가 아닌)보통 사람들은 그럽니다. “맨 정신으로는, 노래 못 부른다고···.” 그래서 (술)김에 노래한다고 합니다. 술김에 부르는 노래는 스트레스는 풀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생을 행복하게는 하지 못합니다. 

내 인생의 부를 노래가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노래는, 곡조가 있는 것도 있지만, 곡조가 없는 노래도 있습니다. 詩篇頌을 보면, 인도자를 따라 관악에 맞춘 노래, 현악 여덟째 줄에 맞춘 노래, 깃딧에 맞춘 노래, 뭇라벤에 맞춘 노래도 있습니다(곡조가 있는 시편송). 그렇지만 대부분의 시편들, 특히 시편 120-134편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들󰡕을 보면, 곡조가 없습니다. 읊조리면서, 입에 달고 흥얼거리면서, 감격해서, 너무 기뻐 주체할 수가 없어서, 부르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어서,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곡조 없는 노래들입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중 하나인데, 시편 126편의 노래를 보십시오. 어떻게 부른 노래 같아 보입니까?(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표제어가 붙음)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보내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이 노래는 무슨 곡조가 있는 노래로 부른 노래가 아닙니다. 그렇게도 그리던 성전으로 올라가던 그 발걸음, 바벨론 포로 70년 동안, 해방 후 100년, 150년 뒤, 그렇게 그리던 성전에 올라가보지 못했던, 그 성전을 향하여 올라가는 그 발걸음 하나하나가, 그들이 불렀던 시편 노래의 곡조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을 잉태하였던 마리아가 부른 찬송의 곡조는 무엇이었을까요? 마리아의 온 몸이, 온 마음이 곡조가 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마리아가 부른 찬송을 보면 쉽게 부를 수 없는 逆說이 스며있습니다. 


[찬송을 부를 수 없는 마리아의 신분]

우리가 마리아 찬송의 배경을 안다면, 우리는 마리아가 불렀던 그 찬송을 결코 쉽게 부를 수 없는 女人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진 지 여섯 달이 되었을 때에, 천사 가브리엘을 갈릴리 나사렛(이스라엘의 북부지방, 로마의 헬라문화가 쏟아져 들어오는 국경도시)이란 자그마한 동네로 보내셨습니다. 거기,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處女를 찾아가게 했습니다. 그 處女의 이름은 마리아였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에 들어서면서,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인사합니다. 마리아가 천사의 나타남을 보고 몹시 당황합니다. 천사의 인사말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합니다. 그러자 천사는 다시, “두려워하지 말라. 마리아, 너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느니라. 보라 네가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자기 백성을 저희 罪에서 救援하실 자)라 하라.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합니다.

그러자 마리아가 대답합니다.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천사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성령이 네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그러므로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이라. 네 친족 엘리사벳을 보아라.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고들 하였지만, 그 나이에 아기를 가진 지 벌써 여섯 달이나 되었다”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 합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결단, 순종을 요구했습니다.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자신의 身分(요셉과 정혼한 處女)을 지키느냐?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낳기 위해 선택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느냐? 기로에 섰습니다. 마리아의 찬송은, 이 선택의 기로에서 터져 나온 역설의 告白입니다. 그냥, 입술로 부른 노래가 아닙니다.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에게 말합니다. “主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자, 천사가 떠나갔습니다. 


[마리아의 찬송은, 역설의 고백]

마리아가,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고 하자 (가브리엘 천사는 떠나가고) 그 즉시,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예수님이 孕胎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개혁교회 로마천주교회를 불문하고 예수님의 이 잉태를 동정녀 잉태라고 합니다(사 7, 14;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동정녀 마리아의 성령에 의한 잉태는, 예수님의 무죄성(Real Man, 참인간)을 말해주는 신학적인 근거입니다(사도신경). 그러나 무죄성이라는 신학적인 근거 이전에, 동정녀 마리아의 예수님 잉태 사건은, 마리아의 결단과 희생을 말해 줍니다.

유대종교법으로 하면, 처녀의 잉태는 부정한 女人이 됩니다. 온갖 비난의 대상이 될뿐 아니라, 돌에 맞아 죽을 일입니다. 정혼한 요셉으로부터는 파혼의 사유가 됩니다. 지엄한 유대종교법을 넘어서야만 하는 일입니다. 어쩌면 일생 짊어지고 가야할 십자가가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 위기들이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직면했습니다. 그러면서 결단하고 순종합니다.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의 결단과 순종이, 신약성경의 첫 찬송이 된 마리아 찬송의 뿌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부르는 찬송, 궁극적인 노래는, 입술의 노랫가락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직면하여 결단하고 순종할 때, 터져 나오는 삶의 고백입니다. 마리아의 찬송을 들어봅시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後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역설의 기쁨).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矜恤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하나님)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위(권력의 자리에서)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富者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아멘.


[나의 노래, 찬송은 무엇입니까? 찬송을 부르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이 불렀던 노래를 보면, 꾀꼬리 같은 목소리의 아름다운 목소리의 노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直面하였던 삶에서 터져 나온 노래입니다. 때로는, 눈물짓는 삶이기도 합니다(“애통하는 자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 4). 내려놓음이라는 십자가 짊에서 나온 역설적인 감격이기도 합니다. 

처녀 마리아의 예수님 잉태, 성탄의 소식과 함께 마굿간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을 찬송하였던 수많은 하늘의 군대들과 천사들의 노래를 보면, 아무나 부를 수 있고, 아무나 들을 수 있었던 그런 찬송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직면하는 자만이 부를 수 있는 찬송이었고, 귀 있는 자만이 들을 수 있었던 찬송이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 이 찬송은 歷史的이었고, 宇宙的인 찬송이었지만, 온 세상과 온 인류에게 미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베들레헴 들녘에서 밤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던(망보던) 牧者들만 목격할 수 있었고, 들을 수 있었던 신령한 노래였습니다. 헤롯 왕과 유대종교 지도자들, 뭇 백성들에게는 감추어져 있던 찬송이었습니다.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미국의 명문 휘튼 대학을 졸업한 Jim Elliot이라는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가 대학을 다닐 때 지니고 다니던 자그마한 검은색 공책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공책에 빼곡하게 적어 두었던 메모가 그의 가슴에 불을 당겼다고 합니다. 그 메모 내용은 이런 것들입니다.

•성경이 번역 되지 않은 종족 언어가 1,700개
•선교사로 자원한 사람들의 90퍼센트는 그들이 목표하였던 선교지에 가지 않는다.
•세계 인구 중 64퍼센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
•5,000명이 매 시간 사망한다.
•미국에는 매 500명에 한 명 꼴로 기독교 사역자가 있지만, 외국에는 매 50,000명 당 한 명 꼴이다.

이런 정보는 휘튼 대학을 다니던 짐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만큼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졸업 후에 남미 에콰도르 아마존 유역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 때가 1956년 1월 8일입니다. 다른 네 명의 동료들과 함께 당시 가장 惡名이 높고 접근하기가 어려운 ‘아우카’라는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갔다가, 안타깝게도 그들이 던진 창에 찔려 죽고 맙니다. 

당시 아우카 부족은 수백 년 동안 외부인들을 무조건 죽여 왔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도 엘리엇과 네 친구들이 선교사로 간 것입니다. 그 때, 짐의 나이가 불과 28살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다섯 명의 선교사들이 살해되어 강에 버려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의 죽음으로, 미국과 미국교회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당시 미국의 ‘라이프Life’라는 유명한 잡지에서 짐과 그의 친구 네 사람의 죽음에 관한 기사를, 장장 열 페이지에 걸쳐서 다루었습니다. 그 긴 기사의 요지는, “이 얼마나 불필요한 낭비인가? What a unnecessary waste?”라는 세상적인 가치와 안목으로 평가하는 글이었습니다.

촉망받던 인재들이, 선교지에서 복음을 제대로 전해보지도 못하고 죽은 것입니다. 인생의 꽃도 피워보지도 못한 20대 청춘입니다. 갓 결혼한 남편(짐)의 처참한 죽음을 낭비라고 평가한, 라이프 잡지 기자들에게 그의 아네 엘리자베스는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말씀을 삼가주세요. 낭비라니요? 내 남편의 죽음은 낭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온 생애를 이것을 위해서 준비했던 사람입니다. 바로 이 시간을 위해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자기의 책임을 마치고, 생의 목표를 달성하고 죽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남편 엘리엇 짐이 대학에 다닐 때 써 놓았던 일기를 소개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 쓸모없는 나무 개비에 불을 붙여주소서. 그리고 주를 위해 타게 하소서. 내 삶을 소멸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이것은 주의 것이니이다. 나는 오래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직 풍성한 삶을 살게 하소서. 당신과 같이···주 예수님이시여!” 

짐 엘리엇은 삶의 길이에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하여 영원하지 않는 것을 버리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라”는 분명한 삶의 방향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1866년에 평양 대동강 강가에서 순교한 영국인 목사 토마스 선교사님(한국교회 공식적인 선교사로 인정도 받기 이전, 1884년 의사 알렌)이 계십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대동강 가에서 제대로 선교도 해 보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 그가 뿌렸던 성경책이 씨앗이 되어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커져서 1907년 평양대부흥의 진원지인 장대현교회가 된 것은, 한국교회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역사의 痕迹입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흘린 피가, 한국교회 역사에 사라지지 않고 메아리치는 찬송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도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말씀 앞에 직면하는 마리아의 결단과 순종, 그로 인한 찬송이 있습니까? 
이런 찬송이 있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앞에 직면하여 결단하고 순종하였던 처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셨던 주님, 우리에게도 주님 임재하여 주옵소서. 마리아가 불렀던 그 찬송이 우리의 찬송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 내 평생의 찬송의 제목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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