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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시므온과 안나의 대림 (눅 2:2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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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므온과 안나의 대림 (눅 2:25~38) 


❚기다림의 열매 

대림절을 맞으며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 설교를 통해 우리는 기다림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 인생에는 수많은 기다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애타게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결국 오지 않고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너무도 오랜 세월 간절히 기다렸는데 결국 그토록 기다리던 대상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간절히 기다린 것은 똑같지만 결과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려도 만나지 못하고 이루지 못한다면 너무도 허무합니다. 그 오랜 시간과 간절한 마음이 다 쓸데없는 일이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지아비를 기다리다 지쳐 돌이 되었다는 망부석(望夫石)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래, 그것도 간절히 기다렸다 해도 마침내 그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리던 사람이나 일을 만나고 이루게 되면 그동안 했던 모든 고생과 그 안타까운 시간은 다 잊어버리고 참다운 기쁨과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다림의 열매입니다. 열매를 끝내 못 본 사람은 불행하고 허무하기 짝이 없지만 기다림의 열매를 본 사람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는 말이 나온 모양입니다.

미국 미시간 주 앤하버라는 도시에 아주 특별한 박물관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에는 별별 전문가가 다 있는데 이 도시에는 로버트 맥메스라는 ‘실패 전문가’가 만든 박물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성공한 것은 연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실패한 것만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분이 40년에 걸친 연구와 수집 끝에 1990년에 이 실패 박물관을 설립한 것입니다. 

이 박물관에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수집한 7만 여점의 실패 상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특별히 한 쪽에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실패작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RJ 레널즈 사가 개발한 ‘연기 안 나는 담배’가 있습니다. 연기가 안 나면 담배 필 때 남에게 불쾌감도 안 주고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막대한 돈과 시간을 들여 개발했는데 문제는 아무도 이 제품을 안 샀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담배를 피워본 분만 아는 이야기지만 흡연자들의 가장 기쁨 가운데 하나가 길게 내뿜는 연기를 바라보는 것이라네요. 이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에 이 제품은 출시 1년도 안 돼 시장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펩시콜라 사는 오랜 연구 끝에 야심작인 무색 콜라 ‘크리스틸 펩시’를 개발합니다. 색깔 없는 무색 콜라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무색 콜라 역시 100년 가까이 ‘콜라’하면 흑갈색이라고 믿은 소비자들의 고정관념 때문에 실패하고 맙니다. 

그런데 왜 이 분은 이런 실패작만 골라서 연구하고 박물관까지 만들어 놓은 것일까요? 그것은 실패에도 큰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면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위대한 사람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수없는 실패를 경험하면서 실패한 제품들의 결함이나 부족한 점을 보았기에 보다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발명왕 에디슨도 축전지를 발명하기까지 수만 번의 실패를 경험합니다만 그 수만 번의 실패를 할 때마다 축전지를 만들 수 없는 물질을 하나씩 제거해 나갔기에 결국 성공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실패는 성공을 위한 과정”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기다림과 인내가 이와 같습니다.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그래서 그 기다림이 너무 힘들고 지쳐서 수없이 포기하고 싶어질 때도 마지막에 맛볼 달콤한 열매를 바라보며, 기다리던 그 분이 오고, 고대하던 그 일이 이루어질 때 얻을 그 한없는 기쁨과 행복을 기대하며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결국 그 기다림의 열매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기다림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법입니다.


❚시므온의 기다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남자고 또 한 사람은 여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 말고 두 사람에게는 아주 많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두 사람은 모두 나이가 아주 많은 노인입니다. 
둘째, 두 사람 모두 성경에서 본문 외에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어쩌면 스쳐지나가는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이 두 사람은 아주 오랜 세월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린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둘 다 같은 사람을 기다린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둘 다 그 오랜 인고의 세월을 기다린 끝에 그토록 간절히 만나고 싶어 했던 분을 만났다는 점입니다. 이 두 노인의 인내와 간절한 기다림은 오늘 대림절 넷째 주일을 맞으며 성탄절을 기다리는 이 귀한 절기에 꼭 한번 기억해야 할 아름다운 신앙인 것입니다. 두 사람 가운데 먼저 시므온이라는 노인을 소개합니다.

오늘 본문 22절부터 보면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모세의 율법대로 맏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식과 정결 예식을 함께 드리기 위해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레위기 12:2에 나온 정결법에 의하면 아들을 낳으면 산모는 7일 동안 부정하므로 7일이 지나면 제사장에게 가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정결해 집니다. 레위기에는 번제 제물로는 양을, 속죄제 제물로는 비둘기를 드리도록 되어 있지만 가난한 사람일 경우 양 대신 비둘기로 속죄 제물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가정인 예수님의 부모도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제물로 드리기 위해 낳은 지 7일 된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온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예루살렘에는 시므온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나이는 알 수 없지만 26절에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내용이 나오는 것을 보면 아마도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25절은 이 시므온이라는 노인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고 말씀합니다. 

시므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로마의 식민지로 살아가면서 겪는 많은 아픔과 고난을 함께 아파하면서 유대인들이 그토록 절박하게 기다리던 메시야를 함께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올 때 자신들을 해방하고 참된 위로를 줄 것이라고 믿는 메시야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데 시므온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므온은 여느 유대인들처럼 무조건 메시야를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평생을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시기만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평생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경건한 삶, 성령 충만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린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혈통으로 구원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 신앙과 상관없이 유대인이기만 하면 메시야가 오실 때 그분을 만나고 구원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므온은 달랐던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이라는 혈통과 상관없이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은 경건하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평생을 산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를 다니고, 그래서 똑같이 교적부에 교인으로 올라 있기는 하지만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냥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입니다. 마치 혈통만 유대인이면 자동적으로 메시야가 오실 때 구원 받는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처럼 그냥 교회만 다니면, 교적부에 이름만 올라 있으면 구원 받는다고 생각하고 경건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성령 충만한 삶과는 거리가 멀지요. 하지만 똑같이 교회를 다녀도 늘 거룩한 삶에 대해 관심을 갖고 하나님 앞에 깨끗하고 거룩하게 살려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메시야는 진정 이런 사람들에게만 나타나시는 것이지요.

시므온도 이런 경건하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며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26절에 보면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 즉 성령님의 지시를 받게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라는 응답입니다. 

성령님의 지시는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시므온처럼 경건하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성도들에게만 주어지는 특혜입니다. 시므온이 평생 동안 경건하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며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을 보신 하나님은 그를 특별히 기특하게 보시고 성령님을 통해 “네가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는 메시야를 만나게 될 것이다. 네가 메시야를 만나기 전까지는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시므온처럼 의롭고 경건하며 성령 충만한 신앙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의 응답과 약속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우리가 시므온이었다면 이런 약속을 받고난 후 메시야를 만날 날이 언제일지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27절을 보니 성령께서 시므온을 감동시켜 성전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가 지금 성전에 계신다는 계시를 받은 것이지요. 이렇게 시므온은 성령님께 지시 받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하고 성령 충만한 성도들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이 때 시므온이 성전에서 만난 메시야가 누구입니까? 요셉과 마리아가 정결예식을 행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데리고 온 난 지 7일밖에 안 된 아기 예수였던 것입니다. 시므온은 그 아기 예수를 안고 찬송을 합니다. 

어떻게 아기 예수가 메시야요 그리스도인 줄 알았을까요? 물론 성령께서 지시해 주신 것입니다. “네 눈앞에 있는 이 아기가 바로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 메시야다”라고 말입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안고 이렇게 하나님께 찬송합니다. 

“주님, 이제 주께서 말씀하신대로 메시야, 구세주를 보았습니다. 이제 세상을 떠나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이 메시야는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인까지 온 세상을 구원하실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는 시므온의 행동을 보고 말을 들으면서 도대체 이 노인이 왜 이러나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시므온은 메시야, 구세주의 오심을 간절히 바란 사람이기에 성령의 감동으로 이미 아기 예수가 바로 그 메시야이심을 알았지만 정작 예수님의 부모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은 혈통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조차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한 것입니다. 아무리 잘 믿는 부모 밑에 태어나도 불신 자녀들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고, 반대로 자녀가 목사가 되었는데도 끝까지 예수 믿지 아니하는 부모도 있습니다. 온 가족이 다 하나님을 잘 믿는데 유독 혼자만 교회를 떠나 방황하는 자녀도 있습니다. 신앙은 내가 가지고 내가 믿는 것이지 혈통이나 인간적인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예수님과 아무 연관도 없던 시므온은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야요 구세주이심을 알았지만 예수님의 부모는 몰랐던 것이지요.

이렇게 우리가 혈통이나 육신적인 것으로 예수님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교회만 다닌다고 구원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메시야만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메시야, 구원자를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다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아니, 예수님을 만났지만 그 분이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요 구원자이심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조차도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알지 못합니다. 오직 시므온처럼 경건하게 살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똑같이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시므온은 구세주를 만나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내가 죽기 전에 반드시 그 분을 만나리라는 믿음이 있었고 그 분을 만날 자격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평생토록 경건하고 성령 충만하게 살며 하나님을 감동시킨 것입니다. 이런 간절한 소망이 있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경건과 성령 충만으로 사는 진정한 신앙인만이 예수님을 만나면 그 분이 메시야요 구세주이심을 깨닫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오늘, 시므온이라는 노인은 우리들에게 어떤 그리스도인만이 예수님을 만나는 특권을 받고 그분을 “메시야, 나의 주, 나의 구원자”로 고백할 능력을 가질 수 있는 지 가르쳐 주는 너무나 귀한 신앙의 선배인 것입니다.


❚안나의 기다림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두 번째 노인은 안나라는 여인입니다. 36절부터 보면 안나는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이었는데 결혼한 지 겨우 7년 만에 남편과 사별하여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전에 보던 개역성경에는 "과부된 지 84년"이라고 번역해서 나이가 꽤 차이가 납니다. 만약 이런 식으로 계산한다면 안나의 나이는 적어도 백세가 넘습니다. 하지만 개역개정판은 "현재 84세"로 번역한 것이지요.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렇게 나이가 많은 여인이 선지자로서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밤낮 금식하며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100세가 넘든 84세든 그 노구에도 불구하고 날마나 성전에서 금식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간혹 교회마다 보면 이 안나와 비슷한 분들이 있습니다. 노(老) 권사님들 중에 일찍이 남편과 사별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예수님을 신랑으로 알고 평생 교회를 섬기며 매일 밤 교회에 나와 밤낮 철야로 기도하는 분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꼭 남편을 잃은 분이 아니더라도 정말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며 교회를 위해 성도들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는 분이 딱 한 두 분만 있어도 그 교회는 24시간 단 1분 1초도 기도가 끊이지 않는 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 교회도 이런 안나 같은 기도의 용사들이 많이 나오게 되기 바랍니다.

안나 할머니는 밤낮 금식하며 기도했는데 도대체 어떤 내용으로 기도를 했을까요? 그 기도 내용이 본문에는 안 나왔지만 38절에 보면 안나가 아기 예수를 만났을 때 한 일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안나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해 말했습니다. 즉 안나는 항상 예루살렘의 구속, 즉 예루살렘과 유대 민족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 사람인 것입니다. 혼자만 기도한 것이 아니라 같은 기도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나 봅니다. 안나 할머니는 자기가 기도하던 간절한 제목이 응답 받아 메시야이신 아기 예수님을 만나자 나무나 행복하고 감격에 겨워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돌린 후 곧바로 함께 기도하던 사람들을 찾아가 그 아기에 대해 증언을 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우리 교회에 시므온 같은 남자 성도들이 많이 나오고 안나 같은 여자 성도들이 많이 나오기를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꼭 나이 드신 분들만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남자 성도들이 시므온같이 경건한 성도, 성령 충만한 성도가 되고, 모든 여성 성도들이 안나 같이 기도의 파수꾼이 되고, 교회 위해, 성도 위해, 목회자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엎드려 기도할 때 이들을 통해 교회가 복을 받고, 나라와 민족이 살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이 시므온 같은 성도들, 안나 같은 성도들은 어떤 복을 받게 되느냐? 그토록 주님 오시기를, 주님 만나기를 소망하며 간절히 기도하고 성령 충만할 때 어떤 복이 주어지느냐? 바로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하게 되기 때문에 내 눈으로 예수님을 직접 보고, 내 손으로 예수님을 만져 보고, 손에 못자국 허리에 창자국도 만져보고, 내 입으로 예수님을 고백하는 특별한 은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런 특별한 은총을 받는 남성, 여성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이 세상에는 크리스천들이 참 많습니다. 교회도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린다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에게만 오십니다. 예수님은 오직 경건하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만 오십니다. 예수님은 기도로 깨어있는 사람에게만 오십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다는 사람은 참 많고, 예수님 보겠다는 사람은 참 많지만 정작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체험하고 그분의 은총을 누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 특별한 은총을 누리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 대림절 기간, 성탄절을 그저 해마다 돌아오는 명절 정도로 여기는 그런 성도가 아니라, 이 성탄절에 꼭 주님을 만나야 하겠다는, 주님을 꼭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져보고, 그분을 체험하겠다는 소망 가운데 간절한 마음으로 맞이하는 특별한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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