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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마구간 구유에 오신 예수님 (눅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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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간 구유에 오신 예수님 (눅 2:1~7)

 
성탄주일 아침!! 
예수 그리스도 앞에 경배하는 여러분과 가정 위에 성탄의 축복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함께 대하는 이 본문을 보면 만삭이 되어서 호적 하러 온 요셉부부가 아이를 낳은 장소는 다름 아닌 구유라고 성경은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시골에서 자란 분들은 마구간이 어떤 곳인지 잘 알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 한국의 소를 키우는 마구간과 유대 나라의 양들을 키우는 마구간과는 조금 다르겠지만, 정말 냄새는 고약합니다. 양들이 오락가락 하면서 배설한 그 오물들이 풍기는 악취가 가득하고 천장에는 거미줄이 여기 저기 매달려 있으며 쥐들이 들락거리는, 고약하고 어두침침한 그 마구간을 하나님께서 자기가 출생할 장소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거기에 엎드려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 없고, 거기에 눕는다는 것은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정도의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더럽고 추악한 곳입니다. 오만 가지 기생충들이 기어 다니는 곳입니다. 그곳에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인간의 모습으로 온 것도 엄청난 데 우리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구유에 나신 이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그렇게 해서라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하면 안되었다고 생각하신 하나님의 그 마음을 우리가 읽을 수 있을까요? 내가 무엇이길래 저 거룩하고 아름답고 신비한 당신의 영광의 보좌를 포기하시고, 그것도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야 하셨습니까? 이 시간, 우리는 주님의 그 마음에 담긴 사랑을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고, 우리 마음에 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6절, 7절을 보면 '거기 있을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였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호적 하러 베들레헴 고향으로 돌아온 요셉과 마리아는 '빈 방 있습니까? 빈 방 있습니까?' 하고 이곳저곳 찾아다니면서 빈방을 애타게 찾았지만,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아내의 배가 불렀고 언제 해산할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있던 요셉은 얼마나 빈 방이 있기를 원했겠습니까? 그러나 누구하나 그들을 위해 방 하나를 마련해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찬이슬을 맞지 않기 위해서 찾아간 곳이 마구간이었습니다. 갑자기 산기가 느껴지면서 애를 낳아야 되는 긴박한 순간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짐승의 먹이를 담아주던 구유를 털어 가지고 적당히 깨끗이 한 다음, 거기에다가 몸에 걸치고 온 헌 천을 깔고 그 다음에 그 구유에다가 아기를 낳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부랴부랴 옆에 있는 집으로 달려가 물을 끓여 양동이에 담아 와서 아내를 수발하고 그 아이를 씻겼을 것입니다. 자,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태어나는 장면이었고,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다른 많은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던, 그 여관 주인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얼마나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습니까? 그러나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 옆에 그토록 가까이 있었던 이 여관 주인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여관 주인이 예수님을 맞이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간단합니다. 바빠서 그랬을 것입니다. 손님들이 밀어닥치니까 팁을 두둑하게 주는 사람들을 맞이하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정말로 중요하고 귀한 손님이신 예수님을 놓치고 말았던 것이 아닙니까?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고대하던 메시야가 자기 집안에서 태어나는 영광이 주어졌는데도 말입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저 먹고 사느라고 바빠서 그리스도를 맞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 일상적 삶에 매여서 무엇이 우선순위인가를 망각하고 사는 사람들, 자신이 죄인인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망각하고 있는 사람들, 내 인생 마지막 역시 그 분 앞에서 어떻게 자신의 일생을 결산할 것인가를 생각지 않고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비극이 바로 여관 주인의 비극인 것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은 일상적인 삶에 매여서 더 중요한 사건을 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들 마음에 들어오셔서 함께 하기를 원하지만 우리들 마음에는 이미 세상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음의 방이 없는 것 아니니까? 그 마음속에 세상 것이 너무 많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을 한 번 들여다보십시오.

1. 성탄을 준비할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우리 마음의 정리입니다. 우리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40일을 기도하시고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앞에 나아와 고침을 받습니다.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었던 질병에 고통당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손끝만 닿으면 고침을 받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은 기적을 바랬고 자신의 문제 해결을 위해 결사적으로 달려들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자기를 향해 오는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음이 가난한 자, 마음이 낮아진 자 만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자기 욕망을 채우려는 자들에겐 충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제자들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들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보세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실 때 마땅히 거처할 집한 칸 없어서 밤에는 감람산에서 주무실 때가 많고, 또는 가난한 3남매가 사는 나사로의 집에 머무를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도 마땅히 묻히실 무덤하나 없어서 아리마대 요셉 무덤을 빌려서 묻히셨습니다. 세상 사람들 예수님을 볼 때 30세 되신 분을 50으로 보기가 예사입니다. 이처럼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우리에게 쏟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 아들이고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 왕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우리 인간들이 드린 것은 고작 구유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가 말하길 “우리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 아들에게 우리 인류가 최초로 준 선물은 구유였으며 마지막으로 준 선물은 십자가였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그 고초, 그 희생을 당하셨습니까? 바로 나를, 여러분을 위해서가 아닙니까? 이 섬기러 오신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아기 예수는 높은 보좌 위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화려한 가문, 부유한 가정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꺼려하는 짐승의 냄새가 배여 있는 구유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한다면, 그 예수와 동행하기를 원한다면 내 마음을 비어놓으십시오. 살면서 무엇이 더 중요하십니까? 내 생활의 한 부분은 언제든지 주님을 위해서 드릴 수 있는 공간을 준비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2. 그 당시 예수님에게 머무실 곳이 없었던 이유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방이 다 차있다 할지라도 마리아에게 잉태된 아이가 누구인지 바로 알기만 했다면 어찌 구유에서 분만하도록 했겠습니까? 제가 한 번은 제주도에서 서울로 오는 비행기를 타려고 했는데 제가 원하는 날짜에 도무지 비행기를 탈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권사님이 비행기 표를 마련해 주었는데 그 자리가 VIP자리였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비행기 자리가 다 차도 VIP를 귀빈들을 위해 반드시 자리를 남겨놓는다고 합니다. 문제는 내가 그 귀빈에 속하지 않는 것이지 내가 귀빈이면 자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Hotel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다 찼다고 말해도 VIP를 위해서는 언제나 방이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 몸에 잉태된 분이 누군지 바로 알았다면, 아무리 바빠도 예수님을 위해 시간을 마련하고,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어도 다 희생하고라도 예수님을 영접하며 예수님을 예배하는 방을 만들 것입니다.

이 맘 때면 항상 공연하는 작품이 있는데 「Jesus Christ Superstar」라는 제목의 뮤지컬이 있습니다. 이 뮤지컬 맨 마지막 부분에 예수님을 못 박았던 가룟 유다가 되살아납니다.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그 혼령이 되살아나서는 돌아다니며 구슬피 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가룟 유다는 ‘why didn't you tell me’라고 슬피 울면서 노래합니다. ‘왜 당신이 부활한다고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습니까?’는 말입니다. ‘당신이 말씀만 하셨다면 내가 미쳤다고 주님을 팔겠는가’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이 말씀 안 한 게 아닙니다. 얼마나 자주 고난을 이야기하고 십자가에 죽으심을 이야기하고 또 다시 부활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십니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한 것은 영적으로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박필 교수가 쓴 “당신의 말이 기적을 만든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150쪽 분량의 소책자입니다. 그 책 서두에 이런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20여 년 전 서울에서 목회하고 계시던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해 봄 대 심방 기간 중에 신림동 지역 달동네에 혼자 사는 할머니 집을 심방하게 되었습니다. 나이 많은 집사였습니다. 그 집사님은 하루하루 파출부 일로 살아가는 가난한 여 집사였습니다. 너무 가난해 아궁이에 연탄도 제대로 넣지 못해 냉방이었고 장판도 벽 도배지도 낡아 처져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그 집사님은 목사님을 대접한다며 부엌으로 나갔습니다.

너무나 측은하고 불쌍해 방안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목사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벽에 자기앞 수표 한 장이 붙어있었습니다. 가짜겠거니 생각하고 가까이 가보니 진짜 은행 수표였습니다. 그리고 더 놀란 것은 수표에 적힌 액수였습니다. 집을 한 채 사고도 남은 돈을 은행에 예치한다면 그 이자만으로도 편히 잘 살수 있는 수표였습니다. 여 집사님이 찻잔을 들고 들어오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집사님 이 수표가 왜 여기 붙어있지요?” 
"아 그거요. 별거 아니예요. 목사님 차 먼저 드세요” 
"차는 천천히 마시고요 어떻게 된 겁니까?”

그러자 그 여집사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아 그거요. 지난해 부인도 없고 자식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병간호를 못하는 할아버지가 있어서 제가 병간호를 얼마동안 해드렸지요. 어느 날 그 분이 저를 부르더니 저걸 제 손에 쥐어주길래 고맙다고 받았답니다. 그런데 그 분은 며칠 후 세상을 떠났는데 그 분이 주고 간 선물이어서 기념으로 벽에 붙여두었습니다.” 

“아니 이를 어쩌면 좋아. 집사님 저건 돈이에요. 돈도 엄청나게 큰 돈이라구요.” 
“종이 쪼가리가 무슨 돈이래요?” 
“이건 수표라는 건데요. 이걸 은행에 가져가면 집도 사고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현금이 되요.” 

그러자 그 집사님은 혀를 차며 “아이고 이놈의 까막눈, 이를 어쩐담!”이라며 푹푹 한숨을 쉬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귀한 것도 그 가치를 모르면 휴지처럼 여기고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뭐, 이것은 우리 신앙인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오신 성탄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영접한 사람의 숫자는 그 당시 불과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소수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행한 성탄의 자세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기뻐하고 영접했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천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시당한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자, 짓밟힌 자, 실패한 자, 병든 자, 죄인으로 몰린 자,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가 오심을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은 영적으로 깨어있는 상태에서 모두 계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나 요셉, 그리고 목자들은 천사를 통해서, 동방박사들은 별을 통해서, 두 노인은 성령을 통해서 계시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축복된 신앙생활,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영적인 안목이 열려지기를 간절히 기도할 것을 부탁합니다. 엡 1:17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우리는 영적 무지한 자리에 있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주님을 위해 바르게 살 수 없고 바르게 헌신할 수 없습니다.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3.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이 있을 곳이 없었던 이유는 사람들의 무정함 때문임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자기 일이 바쁘고 영적으로 무지하다 해도 지금 만삭이 되어 아이를 해산하려는 여인을 문밖으로 내쳐 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이들의 고통을 전혀 헤아리지 않는 이 사회야 말로 얼마나 무정한 사회입니까? 예수님은 마지막 날의 징조를 말씀하시면서 그때는 사랑이 식어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딤후 3장에 보면 말세엔 고통 하는 때가 이를 것이라고 하면서 그때의 증상 가운데 하나가 ‘무정하며’라는 말이 나옵니다. 감각이 없다는 말입니다. 남이야 어렵게 되든 나만 살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우리 삶의 저변에 깔려 있어요.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안전하면 되고, 남이야 춥든 말든 나만 따뜻하고 행복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전혀 감각이 없습니다. 내 위주로만 삽니다. 이런 마음에 어떻게 예수님이 오실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올 한 해 언론에 가장 많이 등장하거나 회자된 단어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신용경색'이라는 단어입니다. 경색이라는 말은 혈관이 혈전 따위로 막히는 것을 의미하는데, 지금 전 세계가 신용이라는 혈관이 꽉 막혀 신음하고 있습니다. 경색이 무서운 것은 결정적인 고통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정상처럼 보이다가 일단 조짐이 시작되면 치명적인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막히고 닫힌 사회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우리 사회는 곳곳에 경색의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사회의 곳곳에 막혀 있는 혈전을 녹이고 뚫는 것은 베풂에 있습니다. 주는 삶, 베푸는 삶은 우리 사회가 동맥경화증에 걸리지 아니하고 건강한 피의 순환을 촉진하는 최고의 명약이 아닙니까? 탐욕의 기름기로 범벅이 된 탁하고 끈적한 피는 사회의 혈관을 구석구석까지 돌 수 없습니다.

베품에는 기적의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를 베풀면 예수님은 거기에 손을 얹어 축사하시고, 그것을 열배 백배의 기하급수적 은혜로 나누시는 것입니다. 한 소년이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드림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허기진 배를 채웠던 오병이어의 사건은 베푸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년 역시 허기졌기 때문에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숨기고 움켜쥐려는 당연한 욕구와 유혹을 억누르고 자신의 것을 내어놓았을 때, 자신은 물론이요 뱃세다 들녘이 얼마나 기쁨이 넘쳤습니까? 사람들의 배고픔이 채워지는 것을 보면서 조그마한 도시락을 드렸던 이 무명의 소년은 일평생의 삶의 뼈대가 되었을 베풂의 기적을 누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작년에 성탄에 사랑의 쌀 나눔을 통해 우리 주변에 사랑을 주었습니다. 충남 태안 앞 바다에서 일어난 원유유출로 고통 하는 어민들을 위해서 작은 사랑의 헌금과 드렸고 또 현장에 가서 기름에 쩔은 바위 하나하나를 붙잡고 하루 종일 씨름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쪽방에 가서 노숙자들과 함께 식사도하고 그들에게 겨울을 날수 있도록 쌀을 나누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지금 나라가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것 사실이지만, 그 여파가 우리의 일상의 삶에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성탄의 계절에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그 작은 일마저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이번에도 우리 주변에 구유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오신 주님의 그 사랑을 우리 함께 실천하여 우리의 섬김과 사랑이 이번 성탄절에도 아름답게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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