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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빌 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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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빌 2:5~11)


예수께서 아기로 탄생하신 성탄절을 앞둔 네 주간을 대림절 혹은 대강절이라고 부릅니다.  주께서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라는 의미입니다. 매년 성탄절을 맞이할 때마다 교회는 먼저 대림절 기간을 통해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2천년 전 유대 땅에 아기로 탄생하신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에게 오고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오심은 이미 2 천년 전 과거의 일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의 영으로 우리에게 임하시는 구주이십니다.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여 하늘로 오르실 때 약속하신 것처럼 우리가 마주 보고 알아 볼 수 있는 모양으로 또 다시 우리에게 오실 것을 믿고 기다립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일마다 예배시간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공동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그 믿음으로 그가 세상에 사람으로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또한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되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도록 하셨습니다.  동정녀 탄생은 부정모혈의 자연적 생육법에 의하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신 초자연적인 사건입니다.  아기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당연히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과학적인 논란을 일으키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실 때 스스로 선택하신 신비로운 방식이었습니다.  

사도신경의 고백이나 오늘 아침에 읽은 본문의 말씀들은 이에 대한 과학적 반증이나 토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오신 신비로운 사건에 대한 믿음 고백과 함께 그 신비 속에 담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오묘한 진리를 마음으로 깨닫도록 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무한한 사랑과 오묘한 진리를 유한한 우리 인간들이 이 조그맣고 제한된 지혜와 지식의 그릇에 담아 이웃과 나누면서 삶으로 실천하도록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사건을 가리켜 ‘성육신’ (Incarnation) 이라고 부릅니다.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본성과 능력과 영광을 가지신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께서 사람이 되셨다고 하여 성육신 혹은 화육신이라고 합니다.  

성자 예수께서는 옷을 입듯 겉으로만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이 아니라 속속들이 사람과 똑같이 되셨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가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는 피조물인 허약한 인간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배고픔과 질병과 고단함과 눈물이 있고 결국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제한된 몸을 가진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온 하늘과 우주를 품으시는 창조주가 세상에 출생하는 모든 아기들처럼 마리아의 태 속에서 갇히셨습니다. 변화무쌍한 세상으로 나오시기 전에 먼저 어머니의 뱃속에서 열 달 동안 머물며 성장의 변화를 겪으셨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창조주가 어머니의 품에 매달리는 젖먹이가 되셨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전능자가 자신의 의사표시를 위하여 오직 발버둥치고 소리치며 울 수 밖에 없는 어린 아기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의 주인이신 그분을 아무도 영접해주지 않아 여관 밖의 누추한 마구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창조주이신 성자 예수는 이렇게 우리들처럼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야 했습니다.   

이처럼 성육신은 신비 중의 신비이며 기적 중의 기적의 사건이다.  전능하신 분이 왜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까?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하여 우리가 할 일은 그 진실 여부를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사람이 되어 오셔야만 했던 하나님의 적극적인 사랑에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일입니다. 지극히 높고 영광스러우신 분이 낮고 비천한 육신이 되어 오심은 사람과 같이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들처럼 제한된 육체를 입으심으로 육신을 가진 우리들이 겪는 고난과 시험을 친히 체험하시고 우리를 이해하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지전능한 신으로서가 아니라 육신을 가진 사람이 되셔야만 사람의 죄와 사람들이 당할 죄의 형벌을 대신하여 온전히 담당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세력에 눌리고 사망의 종노릇을 하는 우리 사람들을 그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놓임 받도록 하시기 위하여 사람과 같이 되어 죄와 사망을 이기심으로 자유를 주셨습니다. 여기에 성육신의 신비가 담겼고 그 사랑과 은혜는 사람으로서 감히 생각하고 측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육신 사건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의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가장 높이 계신 분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와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성육신의 사건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의 표현인가 뼈저리게 깨닫고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무익하고 무능하며 오직 인간적인 자만심으로 똘똘 뭉쳐있던 젊은이에게 찾아와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무릎을 꿇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의 화신이 되어 살기를 열망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마음은 곧 자신을 낮추시되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자리에서 가장 추하고 더러운 죄인의 모습으로 내려앉으신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심은 자신의 명예와 사람들의 존경심을 얻기 위함도 아니고 오직 우리 사람들을 위하여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존엄을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종의 모습으로 낮추어 사람과 같이 되시고 결국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빌립보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간곡히 부탁하고 명령하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어 죄인들을 구원하심과 같이 너희도 그 마음을 품고 그를 본받아 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이고 구원을 얻은 성도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가지는 자연스런 삶의 자세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가장 많이 닮아 살았던 사람들 중 한 사람입니다. 핍박자에서 전도자로 변화된 그의 삶은 어찌하든 그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오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썼던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19절로 23절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자신은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정통 유대인으로서 율법에 능통한 학자이며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입니다.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그 당대의 귀족 집안의 아들로 자유인이었지만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하였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으로서, 율법 아래 있는 자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는 자가 아니지만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기 위함이라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이지만 율법 없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했습니다.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그에게 있어서 삶의 목표와 보람은 복음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하여 그의 목표가 된 분은 자기에게 그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성탄절을 앞두고 대림절을 지나는 우리들이 말씀을 통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사람들로서 어떻게 그를 닮는 삶을 살 것인가 깊이 생각하고 또 그렇게 살기를 힘쓰기 바랍니다. 바울이 사람들에 대한 이해는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 이해에서 얻은 지혜였고 그것의 실천입니다. 영어의 Understand 라는 말을 under와 stand가 합해서 된 말이라고 풀이합니다. 아래에 선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래에 서는 것은 최소한 그 사람처럼 되는 것이고 그 사람보다 낮아지는 것입니다. 아래에 서 볼 때 상대방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처지가 되어주지 않고 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언제나 나의 입장, 기준, 위치에서 상대방을 바라보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 않고 불협화음을 만들어 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하여 사람과 같이 자신을 낮추신 분이십니다. 물론 하나님의 자리에서 인간을 이해하고 우리를 사랑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죄의 문제, 구원의 문제를 위해서는 그 높은 자리를 비우고 내려와 우리와 같이 똑 같은 죄인의 모습으로 살면서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할 죄의 짐을 대신 지셨습니다. 우리 대신 그 죄의 형벌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자유 하게 하셨습니다.   완전한 사람이셨기에 우리처럼 시험을 당하셨고, 배고프고 고단하며 분노하고 슬퍼하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는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하였습니다. 체휼한다는 말은 윗 사람이 아랫 사람의 어려운 사정을 몸으로 알고 불쌍히 여기며 그 어려움으로부터 건져준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모르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간접적으로 들어서 이해하시는 분이 아니라 직접 체험하여 알고 이해하는 분이십니다. 허약한 우리 인간의 몸을 입고 친히 고난을 당하셨으며 끝내는 죽음의 고통까지 체험하신 주님이십니다.   

의사이신 주님은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환자들이 찾아왔을 때 그들을 만나주시고 어루만지시며 고쳐주셨습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하시던 주님은 그들이 당하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어떠함을 충분히 아시기에 고쳐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에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랍비라고 칭함을 받던 주님은 진정한 선생으로서 어리석고 무지한 자들의 참 지혜와 진리가 되어주셨습니다. 스스로 안다고 자부하며 참 진리를 거부하는 교만한 자들에게는 서릿발 같은 독설로 책망을 하셨지만 진리에 대하여 갈급한 백성들을 향하여는 알아듣기 쉬운 말씀으로 천국을 가르치신 스승이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의사로 일하시는 분들은 환자들을 긍휼히 여기셨던 주님의 마음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환자의 자리로 내려가 그들의 아픔과 고민을 함께 느끼며 치료하는 의사로서 일하길 바랍니다.  많이 공부하고 가르치는 선생의 자리에 있는 분들 역시 참 지혜의 원천이신 그리스도의 온유하심을 닮아 겸손한 선생의 책임을 다하길 바랍니다. 

눈높이 교육이라는 말을 합니다. 많이 알고 있는 내 기준으로 어린 사람들과 무지한 사람들을 판단하며 무시하기 보다는 낮은 자들의 자리로 내려가 그들과 눈 높이를 같이 하면서 먼저 상대방의 형편을 살피는 너그러운 선생이 되기 바랍니다. 먼저 배우고 깨달은 사람으로서 미처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자리로 내려가 그들의 생각과 함께 하고 가능하면 보다 쉬운 언어로 내가 깨달은 그 지식과 경험을 함께 나누는 선생으로 살기 바랍니다.    

많이 가진 사람은 갖지 못한 사람들의 불편함과 어려움을 이해하는 낮아지는 마음을 잊지 맙시다. 가난한 사람이 부유한 사람의 가치와 기준에 이르지 못하여 그들의 삶을 상상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쉽지 않지만 낮은 자리로 내려와 형제자매의 형편을 헤아릴 줄 아는 마음은 우리가 꼭 가져야만 할 마음 자세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입장을 이해하고 아내는 남편의 자리에 서보는 이해가 필요합니다.  부모가 자식의 입장이 되고 자녀는 부모의 자리에서 부모님을 이해하십시오. 나보다 더 많이 알지 못하고 연로하신 어른들의 자리로 내려 앉아 그들을 이해하고 섬기는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신비를 깨닫고 그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저 높은 곳에서 이 낮은 곳으로 흘러내립니다. 은혜는 위로부터 내리고 감사와 찬송은 아래로부터 위로 향합니다. 하나님처럼 스스로 높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곳이 없습니다.  스스로 높아지고 교만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스며들 틈이 없지만 낮고 비천한 자리에서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위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넘칩니다. 이것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와 동일한 사람으로 우리와 함께 느끼며 당하며 싸우며 이기시려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신비이며 우리가 부를 감사 찬양의 주제입니다.   이런 마음과 믿음으로 구주 성탄절과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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