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대림절] 하나님이 우리를 일으키리라 (호 6:1~3, 막 9:25~27)

  • 잡초 잡초
  • 362
  • 0

첨부 1


하나님이 우리를 일으키리라 (호 6:1~3, 막 9:25~27)


시애틀 장애인 올림픽 때의 일입니다. 아홉 명의 선수가 100미터 달리기 출발선에서 출발 신호와 함께 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소년의 발이 걸려 넘어지자 넘어진 채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8명의 선수는 달리기를 멈추고 넘어진 선수를 일으켜 세워 서로 팔짱을 끼고 함께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경기장에서는 기립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 장면은 어떤 경기보다 문자 그대로 감동의 도가니였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일으키는 것도 감동적입니다. 사람은 서로 일으켜줄 때 인간의 참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일으켜 주는 것은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한자에 사람 ‘인’(人)자를 보세요. 사람은 나홀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넘어지지 않게 받쳐 주고 있는 상형문자입니다. 사람은 서로 일으켜주고, 받쳐주고, 도와주고, 협력하게끔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의미입니다. 인적 네트워크란 서로 보완하여 상승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아마 금세기 최고의 팝 듀엣을 꼽으라면 ‘사이먼 앤 가펑클’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오래 전에 이들의 노래를 참 좋아했습니다. 사이먼은 작곡가로서 재능이 뛰어났지만 가창력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반면에 가펑클은 최고의 가창력을 가졌지만 사이먼과 같은 음악적 재능에는 모자랐습니다. 그런데 사이먼이 만든 훌륭한 음악을 가펑클이 불러 환호를 독식하였습니다. 이것이 두 사람을 각자의 길로 가서 결별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결별 후에도 열정적인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팬들은 두 사람이 함께 하던 ‘사이먼 앤 가펑클’을 그리워 하고 있습니다. 사이먼의 곡을 가펑클 만큼 멋지게 소화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서로 일으켜주고, 세워주고, 지지해 줘야 합니다. 상호보완이 되어야 참 인간다움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어릴 때 장애인이 된 작가 첸타 마우리나는 장애인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 친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알았습니다. “새를 날게 하는 힘과 같은 것이 우정이다. 우정은 친구를 흙먼지로부터 일으켜 세워준다”라고 말했습니다.
  
전도서 4:10에는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라고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일으켜줄 친구가 있습니까?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모두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이시며 우리를 넉넉히 일으킬 친구입니다. 사람이 일으킨다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예수님은 한계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모든 형편에서 다 일으키십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성전은 46년 동안 지었거늘 삼일 만에 일으킨단 말이오?”라고 하였습니다(요2:20). 예수님께서는 3일 만에 모든 것을 다 일으키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우리를 절망에서, 우리를 가난에서, 우리를 병에서, 우리를 경제난에서 일으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못 일으키실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셋째 날만 오면, 부활의 능력만 있으면, 하나님의 날만 오면, 정하신 시간만 오면 완전히 해결됩니다. 어려운 때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예수님의 은혜로, 권능으로 일으킴을 받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다시 일으킴을 받을 수 있겠는지 성경을 통하여 살펴보고 우리 모두가 다시 일으킴을 받은 놀라운 축복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여호와께 돌아가야 일으키십니다.

1절에는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합니다. 일으키시는 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어디에 가야 일으킴을 받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분이신데 엉뚱한데 가서 일으킴을 받겠습니까?
  
‘찢다’는 말은 히브리말로 ‘타라프’라는 단어입니다. 사자가 먹이를 찢는 것처럼 심판이 가혹함을 의미합니다. 잡혀 쓰러져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나을 수 있는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이 일으키십니다. 하나님은 고치지 못할 병이 없습니다. 회복하지 못할 어려움이 없습니다. 해결하지 못할 시험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누구나 어떤 일이나 일으키심을 받습니다. 회복됩니다. 소생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치유의 하나님이십니다.
  
욥기 5:18에는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고치십니다. 19-20절을 보세요. 더 힘이 납니다.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의 위협에서 너를 구원하실 터인즉”. 하나님께 회복과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일으키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를 보세요. 돌아가기만 하면 완전히 아들의 지위를 회복합니다. 아버지는 먼저 옷을 갈아입혔습니다. 옷을 갈아입혔다는 것은 아들 됨을 인정했다는 의미입니다. 가락지를 끼워주었습니다. 이미 자기 몫의 재산을 다 탕진하고 집을 나갔다 온 아들에게 재산상속의 권리를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신발을 신겼습니다. 종이 아님을 확인하였습니다. 옛날 종은 신발을 신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품꾼의 하나가 아니라 가족의 한 사람인 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모든 걱정이 해소됩니다. 모든 신분이 재확인됩니다.
  
주님을 만나면 38년 된 병자도 상을 들고 일어납니다. 말라 쓰지 못하는 손도 펴집니다. 감겼던 눈도 떠집니다. 죽은 자도 일어나 앉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모든 병에서 나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로 돌아가면 인간의 여러 가지 고통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야곱이 아버지와 형님을 속이고 멀리 삼촌의 집에서 많은 재산을 모으고 가족을 데리고 다시 돌아옵니다. 그는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하였습니다. 그런데 젊잖은 씨름이 아니라 완전히 프로 레슬링이었어요. 천사가 씨름을 하다가 반칙을 범했습니다. 아무래도 당할 수 없으니까 허벅지 관절을 쳤습니다. 이전 성경에는 환도뼈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천사에게 축복하지 않으면 놓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야곱도 반칙을 했습니다. 다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은 것입니다. 천사는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천사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었습니다.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음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천사에게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천사는 “왜 이름을 묻느냐?”라고 하면서 야곱에게 축복하였습니다. 야곱은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기 전에 먼저 넘어뜨리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야곱이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고 합니다.
  
시인 존 던(Donne)은 그가 임종 시에 쓴 시의 마지막 행에 “주께서는 그 넘어뜨린 자를 일으켜 세우시리라”고 하였습니다.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쓰러진 자를 일으키십니다. 하나님은 일으키실 수가 있고, 일으키시기를 즐겨하십니다.
 
 ‘바로세우기’란 말이 참 많습니다. ‘나라바로세우기’, ‘역사바로세우기’, ‘교육바로세우기’, ‘법질서바로세우기’, ‘교통질서바로세우기’, ‘기초질서바로세우기’, ‘민족정기바로세우기’ 등이 있습니다. 한참 찾다보니 ‘콧대 바로세우기’도 있습디다. 어떻게 콧대를 바로 세우는지는 몰라도 여호와께 돌아오면 모든 것이 바로세우기가 절로 됩니다. 콧대 바로세우기도 됩니다. 하나님 잘 믿고 나면 콧대 좀 비뚤어진 것이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콧대 그거 좀 비뚤어지면 어때요?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고 일으키십니다. 바로세우십니다.
  
지난 주 신문에는 전국 일반대학 109개교 졸업생 가운데 정규직 취업자는 48.5% 밖에 안 되었다고 했습니다. 비정규직을 합하면 69.5%입니다. 대학 졸업생 10명중 3명은 아예 일자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젊은이들의 시름이 점점 깊어져 갑니다. 모든 국민의 삶이 위축됩니다. 이런 어려운 때가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속이 이런 경제적 고통에서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금융위기로 경제가 말이 아닙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자살도 늘어갑니다. 지난 주간에도 가수가 자살했고 명문대 법대생이 자살했다고 합니다. 공교육이 붕괴되어 교육현장도 참 어렵습니다. 정치는 꼬이는데 언제 풀릴지 모르겠습니다. 외교도 그리 쉽지 않습니다. 북한과의 관계는 더 어려워졌습니다. 개성공단에 투자한 기업들은 큰 손해 보게 생겼습니다. 선교도 어렵습니다. 요즘에는 전도가 안 된다고 합니다. 이런 모든 문제가 인위적으로 풀어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일으키십니다. 돌아가면 나음을 받습니다.


둘째, 일으키시면 그의 앞에서 삽니다.

2절에는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고 합니다. “그의 앞에서”란 말은 “그의 얼굴 앞에서”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까닭은 그의 얼굴 앞에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우리가 사라지면 하나님은 불안해하십니다. 불편해 하십니다. 섭섭해 하십니다.
  
죽을 걸 살려줬더니 자기 욕심대로 사는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을 걸 살려줬으면 정말 그 앞에서 살고 죽어야 합니다. 삼손은 자신의 힘을 엉뚱한데 다 썼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도 잘리고, 눈도 빠졌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물론 그의 보복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민족을 위한 보복이었습니다. 살려준 다음에는 죽을 각오로 따라 다니고 일해야 합니다. 이것이 일으킴을 받은 자의 올바른 도리입니다.
  
외솔 최현배 선생님은 일제 때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년 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후의 일입니다. 외솔 선생님의 집 앞마당은 항상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습니다. 매일 새벽에 마당을 쓸고 가는 낯선 청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이웃 사람이 이 청년에게 매일 아침 마당을 쓰는 까닭을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함흥 감옥에서 선생님과 한 방에 있었습니다. 한번은 제가 배탈이 나서 크게 고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보시고 굶으면 낫는다고 하시며 혼자는 어려울 터이니 같이 굶자고 하시며 하루 종일 저와 함께 굶으셨습니다. 선생님은 밤늦게까지 저의 아픈 배를 어루만지면서 정성껏 돌봐 주셨지요. 아무도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는 감옥에서 받은 은혜를 어떻게 해서라도 갚고 싶었지만 가진 것이 없는 처지라 선생님의 집 마당이라도 쓸어 드리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살려주면 그의 앞에 있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일으켜 세워놓으면 도망가 버리고 맙니다. 심지어 우리나라 속담처럼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놓으면 보따리 내 놓아라고 하는 배은망덕한 사람도 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께서 일으키자 일어나 수종들었습니다. 주님을 섬긴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병이 나은 10명의 한센병자 중 한 사람은 주님께 와서 감사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갈 때 문 앞에 앉아 있다가 일으킴을 받은 앉은뱅이는 찬양하며 뛰며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일으킴을 받은 대가는 주님 앞에 사는 삶입니다.
  
사무엘하 7:29에는 다윗의 기도가 나옵니다.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다윗이 복 받기를 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 앞에 영원히 있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왜 건강하기를 원합니까? 왜 부자가 되기를 원합니까? 왜 형통하기를 원합니까? 왜 대학에 입학하기를 원합니까? 왜 취업하기를 원합니까? 우리 모두가 잘 되기를 원하는 이유는, 일으킴 받기를 원하는 이유는 자랑이나 편안이 아니라 주 앞에 영원히 있기를 원해서입니다.
  
F. B. 마이어는 말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자세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일으킴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영원히 사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것이 일으킴을 받은 자의 자세입니다. 일으키면 하나님 앞에서 살고, 하나님 앞에서 살 때에 인간은 가장 아름다워집니다.
  
아현성결교회에 양동수 장로님이라고 계십니다. 저도 장로님을 만나서 실미도 사건을 생생하게 쓴 ‘자넨, 하나님이 살렸네’라는 책을 한 권 받은 적이 있습니다. 장로님은 오래전 실미도 사건 때에 실미도에서 훈련병들을 관리하던 기간병이었습니다. 실미도 사건 때에 훈련병의 총격으로 총에 맞았지만 생존한 6명 중의 한 명입니다. 총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는데 훈련병이 총을 들고 자신에게 다가왔습니다. 이 때 장로님은 다니엘의 기도를 연상하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자의 입을 막고 풀무불을 막아주신 하나님, 저 훈련병의 눈을 가려 주십시오”. 정말 기적처럼 훈련병은 총에 맞은 장로님이 죽은 줄로 알고 그냥 스쳐 지나갔습니다. 목숨을 건진 장로님은 이렇게 간증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셔서 덤으로 살고 있습니다. 당시 상처와 아픔도 신앙의 힘으로 이겨냈습니다. 이제 실미도에서 겪은 신앙 체험을 널리 전하고 하나님을 크게 드러내는 일에 남은 인생을 모두 바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으키십니다. 하나님이 살리십니다. 일으킴을 받고 살아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데 못 일어날 사람이 없습니다. 마가복음 9:27에는 “예수께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고 합니다. 1: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고 합니다. 주님이 일으키셔야 우리는 일어납니다. 주님은 일으키시려고 우리 모두를 잡아 주십니다.

결론

오래전 책에서 본 대로는 우주비행사가 되려면 수술한 경험이 없어야 한다고 합니다. 요즘은 과학이 발달해서 그렇지 않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몸은 좌우의 균형이 맞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기가 없으면 좌우의 무게가 달라져 중력이 있는 곳에서는 괜찮지만 무중력에 가면 쓰러진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중력과 같습니다. 중력은 우리를 우주로 떨어져나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힘입니다. 우리가 지구에 발을 붙이고 서 있는 동안에는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중력이 없는 곳에서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중력은 일으키는 힘입니다. 바르게 서 있게 하는 힘입니다. 무중력인 달에서는 균형을 이루는 것도 힘든 일입니다.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쓰러집니다. 중력이 없는 데서는 일으키는 힘이 필요합니다. 평소에는 필요 없지만 넘어질 때는 일으키는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면 우리는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일으켜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경제를 일으켜 경제가 살기를 원하십니다. 신앙의 열정을 다시 일으켜 뜨겁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모든 게 살아나는 계절입니다.

주님 오심으로 모든 것이 살아나고 일으킴을 받아 하나님 앞에 서며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의 선한 일들이 성취되는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