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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도성인신(道成人身) (요 1:1~4,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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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인신道成人身 (요 1:1~4,14~18)   

금년에도 어김없이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교회 절기 상 대강절/대림절(待降節/待臨節 Advent)을 보내고 있습니다. 대강절은 성탄절 직전 4주일 전부터 성탄절까지 이어지는 절기입니다. 영어로 Advent인데, 이 말은 ‘도래’ ‘출현’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대강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심을 기념하고 영접할 준비를 하는 절기입니다.   

요즘 사회 분위기가 침울해서 그런지 길거리 풍경이 예년 같지 않습니다. 매년 12월이 되기가 무섭게 거리마다 추리 장식이나 캐럴 송으로 온통 요란스러운데, 금년에는 좀 가라앉은 느낌입니다. 차라리 요란한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성도들마저 썰렁한 분위기에 묻혀 성탄절을 덤덤하게 보낼까 조금은 염려가 됩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열심히 말씀을 묵상하며 성탄절의 참 의미를 깊이 되새겨봐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쪼록 이번 성탄 절기도 신앙과 삶이 더욱 성숙하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오늘부터 성탄절까지 세 번에 걸쳐 성탄 메시지를 전해 드립니다. 오늘은 요한복음 1장에 기록된 성탄의 의미를 함께 살펴봅니다. 4복음서를 보면 성탄에 관한 기록이 저마다 색다르게 나타나 있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성탄의 역사적 배경과 경위를 비교적 자세히 기록합니다. 마가복음은 성탄 기록이 생략되어 있고 곧바로 공생애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성탄의 기록이 아주 특이하게 나타납니다. 사건의 사실적 기록이 아니라, 신학적인 설명으로 전개됩니다. 그 내용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설교 제목으로 제시해드린 대로 ‘도성인신’(道成人身)입니다. 

[1] 도성인신의 의미 : 성탄-하나님이 인간이 되심  

‘도성인신’(道成人身)이란 말은 말씀(道)이 인간의 몸(人身)이 되었다(成)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셨음을 의미합니다. 
  
① 예수님의 신성 :  

본문 1절~3절을 보시죠.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여기서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lovgo")인데, 우주만물을 창조한 ‘지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로고스는 단순한 관념적 지혜가 아니라, 인격체로서의 지혜인데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태초’라는 말은 우주만물이 창조되기 전인 ‘영원 전’을 가리킵니다. 수학 기호로 표현하면 마이너스 무한대(-∞)입니다. 그런데 태초라는 말이 창1:1에도 나오죠. 동일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둘이 서로 다릅니다. 창1:1의 ‘태초’는 우주만물 창조의 시작 즉 출발점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요:1:1의 태초는 ‘영원 전’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요1:1의 ‘태초’가 창1:1의 ‘태초’보다 훨씬 이전이죠. 

‘말씀이 계시니라’ 그랬는데, ‘계시니라’는 헬라어 문법 상 미완료시제입니다. 한번 있는 행위가 아니라 계속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영원히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영원한 존재는 오직 하나님밖에 없죠. 결국 말씀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이란 겁니다. 

1절 하반절부터 2절까지 보면, “ ...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y) 교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면서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 등 3위로 계십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성자)로 성부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영원 전부터 계셨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2천년 전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지만, 그때부터 존재하기 시작한 게 아닙니다. 우주만물 창조 이전 영원 전부터 계셨던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예수님의 선재성(先在性 Pre-existence)이라고 말합니다. 선재성은 자연히 예수님의 창조주 되심을 증거합니다. 흔히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 그러면 성부 하나님만 생각하기 쉬운데,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창조 사역에 동참한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3절을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기록한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골1:15~16 보면 창조주이신 예수님에 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이처럼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먼저 언급합니다. 

② 인성 :  

예수님의 신성도 중요하지만 인성 역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본문 14절을 보시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앞서 설명 드린 도성인신(道成人身)이 죠. 이 말은 흔히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이란 말로도 표현합니다. 두 가지가 다 같은 말입니다.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인간이신 분입니다. 신성과 인성 ‘신인양성’(神人兩性)을 가진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리켜 흔히 ‘신인’(神人 God-Man)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 중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그 귀하신 분이 처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죄인인 남자와 여자의 생식법에 의해서 태어난 게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셨기에 죄가 없으신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참 하나님인 동시에 참 인간! 이게 바로 성탄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참 하나님과 참 인간이라고 지나치면 곤란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인간이 된 것은 파격적인 사건임을 알아야 합니다. 비교해서 말하면 마치 이런 겁니다. 어린 시절 이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밥 먹고 금세 누우면 소 된다!” 어른들이 밥 먹고 곧바로 누우면 소화 안 되니까 눕지 말라는 뜻으로 한 말인데 순진한 아이들이 정말 그런 줄 알고 조심했습니다. 인간이 소가되면 큰일 나니까 말입니다. 인간이 소 되는 것도 펄쩍 뛸 만큼 비천한 일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그보다 더 비천해진 아주 파격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2] 도성인신의 목적 : 계시, 대속, 모델, 체휼   

그러면 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셔야만 했는가 하는 겁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니까 인간으로 오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 없었느냐 이겁니다. 성경은 누누이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굳이 인간으로 오신 목적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여러 가지인데, 그 중에 몇 가지만 소개해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계시 :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신 도성인신의 첫째 목적은 계시 즉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계시(啓示 Revelation)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이 말은 ‘드러내다’ ‘나타내다’(reveal)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고 신비롭게 가려져 있습니다. 그 모습을 하나님이 드러내 보여주는(uncover) 것이 곧 계시입니다. 

본문 18절을 보시죠.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죄인인 인간은 육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독생하신 하나님 즉 예수님이 나타내셨다는 겁니다. 이게 곧 계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뭘 몰라서 그런 겁니다. 출33:20 “네(=모세)가 내(=하나님)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태양을 똑바로 보면 눈이 멀어버리죠. 그것처럼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을 볼 수도 없지만 만일 보면 죽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못 보는 게 오히려 은혜입니다. 

히1:1~2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 ” 옛적은 성탄 이전 구약 시대를 가리킵니다. 그 시대에는 다양한 방법(환상, 음성, 천사 등)으로 계시하셨는데, 이제 마지막 날 즉 신약 시대에 들어서면서 예수님을 통해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은 ‘최후 최대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에 관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을 다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 보면 굳이 하나님을 육안으로 보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짓이 되고 맙니다. 

요14:8~9 보면, 예수님과 제자 빌립의 대화가 나옵니다.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빌립이 하나님 아버지를 보고 싶다고 조릅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보고도 하나님을 보려고 하는 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설명해 주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다 알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음을 명심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하나님을 보여 주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② 대속 :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신 두번째 목적은 대속을 위해서입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그(=말씀=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말씀이신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생명은 육신의 생명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영생)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범죄함으로 어떻게 되었나요?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 ” 죄로 말미암아 생명을 상실했다는 겁니다. 육신적으로는 물론이고 무엇보다 하나님과 단절됨으로 영적인 사망, 더 나아가 영원한 사망 즉 지옥의 형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모면할 수 있는 구원의 길은 무엇입니까? 죄값을 치르되 나를 대신해서 누군가 대신 치러줘야 합니다. 그게 바로 대속(代贖)입니다. 인간들끼리는 불가능합니다.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내 코가 석자인데 누가 나의 죄를 대속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대속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될까요? 히9:22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는 피 흘려 죽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래서 인간이 되셔야만 했던 겁니다. 

막10:45 보면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십니다. 막10:45 “인자(人子)가 온 것은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인자 즉 사람의 아들로 오신 이유가 바로 대속물이 되기 위함입니다. 대속물은 ‘인간의 죄값을 대신 치르는 희생제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굳이 인간이 되신 이유는 십자가에 달려 죽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을 언급할 때는 반드시 십자가를 함께 언급해야 됩니다. 

바울은 고후5:21에서 대속의 원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죄를 알지도 못하는 자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참 인간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만이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할 수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만 하면 대속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대신 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참 하나님이며 참 인간이신 예수님만이 유일한 대속자이십니다. 

다시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담당하시고 인간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를 얻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와 예수님의 의를 맞교환(exchange)하는 겁니다. 이를 가리켜 이중전가(二重轉嫁)라고 부릅니다.   

舊소련 치하에 강제 수용소가 많았습니다. 주로 반체제 인사들을 가두었던 곳입니다. 한 수용소에 ‘보리스 콘펠드’라는 유태인 의사가 배치되었습니다. 그의 임무는 아무리 중한 병자라도 무조건 “건강 양호. 노동 가능.” 이렇게 판정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일만 시키다가 죽이는 겁니다. 만일 이런 지시를 어기면 의사 자신이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의사가 한 죄수를 통해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는 열심히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한 영혼의 소중한 가치를 깨닫고,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총기 있어 보이는 청년 죄수를 진단하다 장암에 걸린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장암이라고 진단을 내리고 치료해 줍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합니다. 서서히 회복되던 어느 날 그 청년은 의사에게 목숨을 무릅쓰고 자신을 구해준 이유를 묻습니다. 그러자 이 의사는 예수님의 대속에 관해 설명해 주면서 자신이 그런 큰 사랑을 받았기에 그 사랑을 나눠줄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 날 저녁 청년은 충격적인 소식을 듣습니다. 그 의사가 방금 전에 처형되었다는 겁니다. 그 후 청년은 풀려났고 나중에 위대한 문학가가 됩니다. 그가 바로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알렉산더 솔제니친이죠. 그 의사는 대속의 은혜를 알았기에 남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예수님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다고 해도 아무나 그 은혜를 받고 구원 받는 게 아닙니다. 개인적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상대방이 좋은 선물을 준비해서 나에게 준다 해도 받지 않으면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예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의 이름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기 되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믿음의 내용은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이 매우 중요합니다. 성탄의 과정에서 그 이름이 어떻게 주어지나 보면 놀랍습니다. 눅1:31 보면 잉태 과정에서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알려준 예수의 이름을 전해줍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리고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알고 고민하던 약혼자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 알려준 이름도 예수입니다.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두 사람이 나중에 맞춰보고 깜짝 놀랐을 겁니다. 그리고 모든 의심을 물리치고 확신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 이름 예수의 뜻은 ‘구원자’(savior)입니다. 그의 성탄과 십자가를 통해 우리 죄를 대속한다는 사실을 믿는 게 중요합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받고 영생을 얻는 겁니다. 아무쪼록 이 시간 다시 한 번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구원의 확신 가운데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③ 모델 :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세 번째 목적은 인생의 모델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름답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범죄함으로 거룩한 형상을 상실했습니다. 인생이 망가진 겁니다. 비유해서 말하면, 하나님이 명품 인간으로 말들어주셨는데, 인간 스스로 망가뜨려 짝퉁 인간이 된 겁니다. 

한번은 운동화를 사러 갔는데, 멀리서 가격표를 보니까너무 싼 겁니다. 얼른 가서 보니까 ‘나이키’(NIKE)인줄 알았는데, 스펠링이 좀 다릅니다. ‘나이스’(NICE)인 겁니다. 값은 나이스(nice)인데, 품질은 좋지 않은 겁니다. 인간이 이렇다는 겁니다. 겉은 멀쩡한데 죄로 말미암아 그 영혼이 망가졌습니다. 그래서 인생이 비참해지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도록 이도해 주십니다.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권속 가운데 하나님이 아버지, 예수님은 큰 형님,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동생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큰 형님이신 예수님을 모델로 삼고 닮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우리가 닮는 게 막연할 수 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인간이므로 우리에게 구체적인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벧전2:21 “ ... 너희에게 본(an example)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만 따라 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모두 그런 삶을 살아감으로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 되시기 바랍니다. 

④ 체휼 :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신 네 번째 목적은 체휼을 위해서입니다. 본문 14절을 다시 보시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라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신다는 겁니다.

마1:23 보면,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예수라는 이름 외에 또 하나를 알려줍니다. 마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사7:14 예언의 성취)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God with us)라는 뜻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장막(tent)를 치고 함께 산다는 뜻입니다. 그냥 우리와 사는 게 아니라, 삶의 현장 속에 오셔서 동고동락하신다는 겁니다. 

히4:15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은 그냥 우리 가운데 계신 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애환을 다 아시고 도와주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동정’(同情)이란 말은 단순한 동정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한글개역성경에서는 ‘체휼’(體恤 Sympathize)로 번역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동정이란 말 대신 체휼이란 말을 좋아합니다. 그냥 동정하는 게 아니라, 몸소 체험을 해보았기 때문에 깊이 공감하며 동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란 말을 생각하시면 이해가 빠를 겁니다. 병자의 고통스런 처지와 심정은 그 병을 앓아본 사람이 잘 압니다. 건강한 사람은 아픈 사람을 보고 동정한다고 하지만 속속들이 할 수 없습니다. 

미국의 소설가 오 헨리의 단편 소설 중에 「강도와 신경통」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한 강도가 한밤중에 어느 집에 권총을 들고 들어갑니다. “손들어!” 하고 외치자 잠자던 주인이 깨어나 벌벌 떨면서 왼손을 겨우 들었습니다. 그러자 강도는 또 고함을 칩니다. “오른손도 들어!” 그래도 주인이 왼손만 조금 높이 들고 왼손을 들지 않습니다. 그러자 강도가 화를 내며 “오른손도 들라니까!”하고 고함을 팁니다. 집주인은 벌벌 떨면서 오른손은 신경통 때문에 들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강도가 씩 웃으면서 말합니다. “젠장, 나도 신경통 때문에 이 짓을 하고 있어!” 이렇게 말합니다. 강도는 당장 강도질 하는 것은 다 잊어버린 채 신경통 이야기를 꺼냅니다. 주인도 두려움을 잊은 채 신경통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새벽녘에 서로 멋쩍어 하며 헤어집니다. 

인간관계에서 공감대를 갖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훨씬 친근하게 느낍니다. 마음을 다 털어놓게 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안다고 하지만, 멀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도 참 인간으로 우리와 비슷하게 인생고를 경험하시고 온갖 고초를 다 겪으셨기에 우리와 마음이 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친근하게 느끼면서 쉽게 다가가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체휼과 동정을 가지고, 동시에 신적인 능력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보살피시고 도와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병자들을 도와주시고, 어려움 당한 자들을 박대하지 않고 보살펴 주셨습니다. 심지어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눈물을 흘리신 적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괜히 소외감에 빠지지 말고 체훌하시는 예수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히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in our time of need)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언제든지 필요할 때마다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고 우리를 도와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지금 대강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합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성탄을 통해 대속의 은혜로 구원을 확신하시고, 험한 세상 어려운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말고 기도함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최고의 성탄 선물인 예수님을 주위 사람들에게 담대히 전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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