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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으로부터 채움을 받는 자 (눅 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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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으로부터 채움을 받는 자 (눅 6:38)


우리나라 경제가 심각합니다. 다들 한숨 쉬고 큰일이라고 걱정합니다. 이럴 때 우리 성도는 어찌해야 하나요? 이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읽다보면 위로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게 됩니다. 어떤 말씀이냐 하면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내가 너를 형통하게 하겠다.”하는 약속의 말씀들입니다. 아멘? 

그런 말씀 중 하나가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그런데 조건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이것이 조건입니다, 그러면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하십니다.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는 구절은 우리 맘에 듭니다. 그런데 그렇게 복을 받으려면 <주라 > 라는 말씀이 먼저 이루어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이 말씀을 바로 생각해보면서 주님이 말씀하셨던 의미를 찾아 우리가 원하는 풍성함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받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채움을 받으려면 어떤 믿음을 갖고 살아야 할까요?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1.하나님만이 복의 근원임을 알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언약하신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으로 이 말씀을 붙잡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은 ‘주라’고 명령하시고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주신다는 말인가요? 하나님이십니다. 믿습니까? 

민수기 11장에서 보면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모세에게 불평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에 있을 때 먹던 맛있는 음식들이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계속 <만나>만 먹으니까 너무 단조롭고 영양실조에 걸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선, 오이, 수박, 부추, 제가 싫어하는 파, 마늘이 먹고 싶었습니다. 

백성들의 아우성을 듣고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민11:19~20절을 보세요.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이십 일만 먹을 뿐만 아니라 코에서 넘쳐서 싫어하기까지 일개월간 먹게 하리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께 말합니다. 
이 백성이 육십만 명인데 주의 말씀이 일개월간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그들을 위하여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라고 반문했습니다. 한마디로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아니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민11:23절에“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하며 모세를 책망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는 바람으로 메추리를 몰아 진 곁 이편저편 곧 진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 쯤에 내리게 하셨습니다. 두 규빗은 약 1미터 높이입니다. 메추라기 고기가 하룻길 되는 길만큼 쌓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메추리를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보내주셨습니다. 제일 적게 거둔 사람이 ‘십 호멜’입니다. 1호멜이 얼마냐면 약 220리터입니다. 12말입니다. 그러니까? 10호멜이면 가마니로 20가마니 정도의 양을 거두어서 코에서 냄새가 나도록 메추라기를 보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급하심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우주만물이 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믿습니까? 그런 우리는 그것을 지식으로는 알면서 실제로는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하면 능히 공급하시는 분이시고 능히 채우시는 분임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빌 4:19에서 “나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풍성하게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다는 것을 믿지 않고, 나를 도울 수 있는 “어떤 사람들”이 나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것으로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설사 사람이 채워주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채우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공급의 근원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통로일 뿐입니다. 사람은 절대로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공급원일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 그런 예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엘리야에게 까마귀가 아침, 저녁에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었습니다. 까마귀가 날라다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 말씀으로 하나님이 공급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르밧의 과부의 믿음을 통해 일어난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은 이적도 하나님이 공급하셨던 것입니다. 또 선지생도의 아내의 가정에 작은 기름 한 병으로 많은 큰 그릇을 채우는 이적이도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오병이어의 기적도 하나님이 공급자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가 제한하지 않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우리에게 안겨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것들을 공급하는 공급의 근원임을 깨닫기를 축원합니다. 


2. ‘주는 자’가 채움의 복을 받는다 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주신다 했습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하려면 옛날 말을 사용하여 쌀이나 곡식을 사고 팔 때를 생각해야 합니다. 요즈음은 쌀을 살 때에는 kg으로 사고팝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한 되, 두되, 한말 두말 단위로 샀습니다. 

말에 먼저 쌀을 넘치고 올려놓고 손으로 위에 부분을 싹 깎습니다. 그런데 인심이 후하면 위의 부분을 야박하게 깎아내지 않고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즘도 시골의 5일장에 가면 잡곡들을 팔 때 그런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잘 살펴보세요. 따라서 합시다.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여기에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3단계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1) “후히 되어 누르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만큼 만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야박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어디에서든지 겨우 채워주신 것이나, 모자라서 부족함을 느끼도록 허락하신 것이 없습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아이와 여자를 제외한 장정만 5천명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 도시락 한 개 정도인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십니다. 그리고는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습니까? 다같이 “다 배불리 먹고” 아멘? 

그리고 남은 것이 열 두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습니다. 먹고 남았습니다. 넘치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부족해 보이고, 모자라 보일뿐입니다. 실상은 후하게 주시는 분임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또 “누르어” 주십니다. “누른다”는 말씀은 꽉 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꽉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후히 되어 주신다는 말과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후히 되어 누르어 주시는 것일까요? 

성도에게 주시는 축복은 이 세상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에만 필요한 복이 결코 아닙니다. 영원히 누릴 수 있는 복 즉 “영생의 복”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보고 신령한 복이라고 말합니다. 이것까지 후히 주시고 눌러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할 때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는 영적인 복을 주셨습니다. 이런 믿음의 고백은 우리가 알아서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혈육이 주는 복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알게 하시는 복이고 성령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복입니다. 여러분에게 그렇게 채워지기를 축원합니다. 


2) “흔들어” 채워 주십니다.  

저는 “흔들어” 라는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제 할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저희 할아버지는 92세를 사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엄청난 구두쇠셨습니다. 
어릴 적에 할아버지가 늘 제게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애야! 10원을 벌면 2원만 쓰고 8원을 저축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할아버지가 일꾼들에게는 밥을 넘치도록 주셨습니다. 큰 밥그릇에 밥을 담아 주는데 한 그릇 분량을 더 올려 밥그릇이 산봉우리가 만들어지도록 퍼주셨답니다. 그때는 제가 어려서 잘 몰랐습니다. 나중에 동네 어르신들이 할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 그렇게 말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제 할아버지가 동네 사람을 일꾼을 쓸 때는 품삯 받으려고 오기보다는 배불리 주는 밥 때문에 일하러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일꾼에게는 넘치게 주셨고 흔들어 채워 주셨습니다. 그 복을 제가 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때도 모든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십니다. 그리고 가장 소중한 것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그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 입히게 합니다. 

그리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깁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아먹고 즐기게 합니다. 왜 이렇게 베푸는 것이지요? 아들의 행위를 본 것이 아닙니다. 돌아왔다는 그것, 죽었다가 살아왔고,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는 그것 때문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우리에게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이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은혜가 여러분에게도 있음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3) “넘치도록 하여” 안겨 주십니다.  

“넘치도록” 이라는 표현은 내게는 부족함이 없게 채워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받는 축복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보여주시겠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를 자신의 목자로 삼고 살아왔기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맨 마지막에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시편23:5절을 보세요.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중요한 것은 내 원수들의 목전에서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나를 대적하는 원수들에게 하나님께서 축복의 잔이 넘치는 복을 부어 주시는 것을 보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런 복이 여러분에게 채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이런 복은 누가 받을 수 있나요? 

먼저 주는 자가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실 복을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복을 아무에게나 무조건 주신다 하지 않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말씀의 앞뒤를 잘 살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산상수훈입니다. 8복을 언급하신 후 27절 이하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 하십니다.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 하십니다.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 하시고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하십니다. 

그리고 37절에서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38절에 “주라” 하십니다. 그러면 너희에게 넘치도록 주실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잘 깨달아야 합니다. 누구에게 주라는 것인지 무엇을 주라는 것이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핵심 메시지는 “주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주어야 하나요? 사람에게 주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요? 

1)살아갈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주라는 것입니다.  
2)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라는 것입니다.  
3)못된 짓을 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먼저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베풀어 줄 때, 하나님 아버지는 당신이 더 많은 것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판한다면 나도 비판을 받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그것도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안겨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누구를 정죄한다면 여러분도 정죄를 당할 것입니다. 그것도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당신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용서를 한다면 풍성한 용서가 당신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또 만일 사랑을 심으면 넘치도록 많은 사랑을 다시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기본 원리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주어야 할까요? 

1) 사람에게 용서와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 사랑하고, 내 원수를 축복하고, 내 것을 달라는 자에게 더 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있을 때 하나님은 감동을 받으십니다. 

6장 35절을 보세요. 
“35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우리의 나눔의 제일은 사람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과도 나누지 못하면 하나님과 나눔이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31절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2)하나님께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루 24시간 공평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가난한 자나 부요한자, 성공자나 실패자, 남녀노소 누구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시간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드릴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 시간으로 예배드리기를 원하고 주님의 날을 구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시간을 주신 분에게 너무 인색합니다. 바쁘다고 안 드립니다. 사람을 위해서는 그 시간을 쓰는데 하나님을 위해서는 아주 인색합니다. 

하나님이 하루 24시간 일주일 168시간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두 시간 드리는 것도 힘들어 합니다. 오후예배 수요예배 좀 시간 좀 내달라면 짜증을 냅니다. 텔레비전 앞에서의 한두 시간은 전혀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교회에서의 예배 시간은 인색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몰라서 그럴까요? 

바라기는 이 날을 드릴 때, 우리가 세상에서 천 날 동안 누릴 복보다 더 큰 복이 하늘나라에 있음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루의 첫 시간을 드립시다.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에 나가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처럼 새벽기도를 위해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전도, 봉사, 기도, 헌신하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시기 바랍니다. 


3)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고린도 전서 6:19~20절에서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것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내가 내 몸의 주인이 아닙니다. 주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기에 내 몸의 주인 되시는 주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거룩한 몸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합니다. 값으로 샀습니다. 그러기에 내 몸을 어디에 사용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의 병기로 쓰여 지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빛과 소금으로 이 세상을 썩지 않게 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또한 물질을 드려야 합니다. 물질은 성도의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이 있는 곳에 보물이 갑니다. 또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갑니다. 자신만을 위하여 쌓아둔 재물은 마치 고인 물과 같아서 냄새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작년에 펀드에 수많은 사람들이 돈을 투자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있을 것입니다. 왜죠? 수익이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지금은 쪽박을 찼다고 울상입니다. 

세상에서는 이자를 많이 주는 것에 사람들이 투자처를 찾고 있습니다. 다른 곳 보다 단 1%라도 더 받을 수만 있다면 그곳으로 돈이 몰리고 있습니다.  

만일 은행에서 100만원을 1년 동안 맡기면 1년 후에 2백만 원을 돌려준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일도 없겠지만 아마 그러면 세상의 돈은 그 곳으로 다 몰릴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그것보다 더 황당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예수님은 씨 부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좋은 씨앗이 옥토에 뿌려질 때 30배입의 결실을 주신다 했습니다. 3000%입니다. 60배는 6000%. 100배는 일만%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쓴 글에서 보니까 성경 안에 기도에 관한 구절이 500개 이상 있답니다. 또 믿음에 관한 구절도 거의 500개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돈과 소유에 대한 말씀은 2천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38개의 비유 중에서 16개는 돈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돈과 관련된 교훈을 살펴보면 이상합니다. 돈을 많이 번 사람은 복이 있다는 구절이 없습니다. 오히려 벌라는 말보다는 잘 쓰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잠언19:17에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딤전6:18~19에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잠11:24~25에는 
24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25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사도 바울이 교훈합니다. 
행20:35에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분명히 성경이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제학자가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가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세상에 오셨던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세계 경제가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세상이 지금 온통 불황이라고 난리입니다. 개인이 신용불량이 되고, 가정이 경제란으로 흩어져가고, 회사가 부도나고, 나라가 휘청거리고, 세계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정말 위기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 일수록 성경을 믿고 그 명령을 따르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난리이지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세상의 난리 속에서도 영원히 불변합니다. 그 말씀이 가르쳐 주시는 데로 살고,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우리 생활에 적용할 때 성경의 약속은 반드시 우리의 생활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엊그제 예결산 위원들이 모여서 예산안을 정했습니다. 저는 경제 사정을 생각해서 긴축재정을 운영하자 했는데 예결위원들이 만들어 보고 한 내용을 보니 결산 액보다 훨씬 많은 예산을 세웠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세웠나요? 그랬더니 위원들이 하시는 말씀이 “어려울 때일수록 더 헌신해야지요. 한번 힘써 해보려 합니다”하더군요. 예결위원들이 저보다 믿음이 큰 것을 보니 흐뭇했습니다. 제가 서제로 돌아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면 능히 될 줄 믿습니다. 성도들에게 복을 주옵소서” 

38절을 다 같이 한번 읽읍시다. 

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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