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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기다리는 사람들 (눅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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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사람들 (눅 1:5~25)


우리는 지금 대림절 기간을 맞고 있습니다. 대림절은 성탄절 전의 4주간을 말하며 메시야의 탄생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절기상의 기간은 4주간이지만 실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백 년을 자기 민족을 구원할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야와 관련된 예언들이 이사야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 때를 기점으로 본다면 그 7백여 년을 기다린 셈이 됩니다. 아브라함부터 그 기점을 잡으면 무려 2천 년입니다. 이스라엘의 메시야에 대한 기대는 바벨론 포로기와 연이은 식민 통치기의 불운의 시기를 거치며 더 강렬해졌습니다. 유태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가게 되면 감람산 쪽에 수많은 무덤과 묘비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유태인들은 죽으면 이곳에 묻히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이곳은 성전의 동쪽으로 메시야가 이 동쪽 문을 통하여 오시기 때문에 가장 먼저 부활하기 위해서 그곳에 무덤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 성전 동쪽 문은 금문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그 문은 두꺼운 돌로 막혀 있습니다. 중세에 이슬람교도들이 메시야가 와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렇게 막았다고 합니다.

저들이 저런 어리석은 싸움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이미 성탄절에 이 땅에 메시야로 오셨음을 믿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또한 여전히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님은 영광 중에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입니다. 초대교회의 예배의 마지막 기원은 “마라나타” 곧 “주여 오시옵소서.”(고전16:22)였다고 합니다. 그 이후 교회는 2천 년 동안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실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인생은 기다리는 인생입니다. 제가 살던 고향은 기차역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좀 떨어져 있었지만 조용한 밤에는 기차의 기적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면 누가 저 기차를 타고 우리 집에 찾아오지 않나 하며 막연히 기다리던 일이 생각납니다. 가뜩이나 친척이 온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 며칠은 더 심해집니다. 아이들은 빨리 어른이 되기를 기다립니다. 자기 짝을 기다리고, 자기 일의 성취를 기다립니다. 운동 선수는 영광의 자리에 오르길 기다립니다. 기다리는 순간은 답답하고 더디 가는 것 같지만 실상 기다리는 시간이 더 행복합니다. 오히려 완성되고 목표를 이루었을 때는 허탈하기조차 합니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리는 드라마입니다. 그런데 고도 씨는 연극이 끝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인물들은 기억상실증에 걸려 과거를 잊고 똑 같은 일과 대사들을 반복합니다. 그러다 마지막 대사는 “가자.” “갈 수 없어.” “왜?” “고도를 기다려야지.” “참 그렇지.”하는 식의 대화가 계속 반복됩니다. 

이 연극을 쓴 사뮤엘 베케트는 이를 통해서 인간이 오지 않을 희망을 붙잡고 사는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반대로 이를 통해서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습니다. 인간은 희망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기다림이 없는 인생은 불행합니다. 아무 것도 기다릴 것이 없을 때 인생은 무의미해 지고 허무해집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신앙인들은 허무와는 거리가 먼 존재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장차 주님을 만나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림절은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성탄절은 우리 인생에 수없이 다가왔지만 늘 처음 맞는 듯한 설렘이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내 안에 새로 태어나는 듯한 기대감입니다. 예수님이 멀리 느껴지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 것 같다면 이 대림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를 기다렸듯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메시야를 기다렸던 이스라엘에게 메시야가 오셨듯이, 예수를 간절히 사모하는 자에게는 주님은 예수님의 첫사랑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무자하고 나이가 많더라

누가복음은 메시야의 탄생을 기다렸던 한 나이 든 부부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사가랴라는 이름의 한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엘리사벳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의인이라 불릴 정도로 의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은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했다고 합니다. 이런 의인과 같은 삶을 살았다면 그 당연한 결론은 그들은 축복받은 삶을 살았다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와 반대입니다. 7절입니다.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 자식이 없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가장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자식을 낳지 못했다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인생과 같습니다.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잉태하고 첫 번째 한 고백이 무엇입니까? 

25절입니다.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자기 부끄러움 곧 수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수치인가? 사람들이 아들을 낳지 못한 여자를 향해서 ‘저 여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야’ 하고 욕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무엘을 낳기 전 그녀는 전혀 아이를 못났던 여자였습니다. 비록 남편의 사랑은 받지만 마음은 늘 괴로운 여자였습니다. 그 남편이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삼상1:8)하고 위로해도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엘리 제사장 앞에서 그녀는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고까지 고백합니다. 가난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자식이 없는 고통입니다. 무자하고 나이가 많았다는 것은 그들이 소망 없는 인생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이 소망 없는 인생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제사장 사가랴는 아마 유대 산중에 있는 시골에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제사장이었고 제사장들의 규칙대로 어느 날 성전에 직무를 수행하러 갔습니다. 당시 제사장의 숫자가 약 18,000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제사장들은 1년에 한 차례 정도 이런 의무를 해야 했습니다. 

매우 중요한 제사장의 임무중 하나는 번제단에서 향을 피워 성소 안의 분향단에 놓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은 아침과 저녁 제사 때 이루어졌습니다. 영광스러운 일이었지만 이 일을 할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제비를 뽑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평생 한번 있을까말까 한 기회이고, 흔하지 않기에 한 번 분향 직무를 행한 사람은 다시는 할 수 없도록 규정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영광스런 직무에 사가랴가 선택이 되었습니다.

사가랴가 성소에 분향하러 들어갔습니다. 모든 백성들은 그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사가랴는 매우 흥분하였을 것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분향단에 향을 사르고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보통 이때 기도는 민족을 위한 기도를 드립니다. 

1장 68절에서 79절에는 ‘사가랴의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의 주요 주제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내용입니다. 다윗의 집에서 구원의 뿔을 일으키사 이스라엘을 해치는 원수들로부터 구원해 주십시오. 어두움과 죽음의 길에서 평강으로 인도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사가랴는 아마 이런 기도들을 드렸을 것입니다. 민족 기도에 덧붙여서 아마 사가랴는 개인적인 소원을 간구하는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들의 유일한 기도제목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우리에게 자녀들 달라는 기도였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 기도했으며, 이제는 기다리다 지쳐서 습관적으로 드린 기도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무언가 다른 길로 인도해주시겠지 하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가 이런 기도를 드렸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통해서입니다. 

13절입니다.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요한에게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의 사자 가브리엘이 분향단 우편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상 자식을 주겠다는 약속을 막상 듣는 순간 사가랴는 의심을 합니다. 18절입니다.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기도해 놓고도 믿지 않는 것이 다만 사가랴 경우뿐이겠습니까?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까? 사가랴는 내가 늙고 아내는 나이 많은데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라며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보입니다. 

사가랴의 말을 보면 그가 참 지혜 있게 대답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는 늙었다고 하고 자기 아내는 그냥 나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야 하지요. 혹시 천사가 엘리사벳 보고 네 남편이 너보고 늙었다고 하더라 하면 그날로 반 죽었을 것입니다.(유머) 그래서 사가랴가 좀 에둘러 나이가 많습니다 한 것이지요. 사람들은 나이 먹는 것도 참 싫어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미국에 가면 꼭 들르는 곳이 있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입니다. 그들은 그 폭포 앞에 서서 그 이름을 이렇게 힘껏 부른답니다. “나이야. 가라!” 그렇게라도 해서 나이를 흘러 보내고 싶은 심정이겠지요. 여러분도 나이를 잊은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고목 나무과 같은 인생으로 꽃이 피게 하셨습니다. 이 축복의 예언대로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다음과 같이 찬양합니다. 25절입니다.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자기 부끄러움을 없애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머리를 들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얼마나 기뻤던지 5개월 숨어 있었다고 합니다. 혹시 유산되거나 조산할까봐 두려워 조심했던 것이지요. 성탄의 은혜는 누구보다 이처럼 가난한 심령에게 부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의로운 자는 반드시 복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확신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눈물을 받으셨습니다. 그들의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오랜 시간 응답받지 못했다면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주님께서 주실 축복의 그릇이 크기 때문에 그렇다고요. 이스라엘 백성이 오랫동안 기도하였기에 주님은 메시야을 주셨는데,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을 직접 메시야로 보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25년 동안 기도하여 이삭을 얻었습니다. 한나도 오랜 기도 끝에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을 얻었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을 낳았습니다. 대 신학자 어거스틴도 그의 어머니가 오랜 세월 동안 눈물의 기도 끝에 돌아온 탕자와 같은 아들이었지만 기독교의 한 획을 그은 위대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오랜 기도가 그런 그릇으로 빚은 것입니다. 자녀 문제로 속을 썩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너무 속 썩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이 많이 기도한 만큼 그 자녀는 하나님의 많은 축복받는 자녀가 될 것입니다. 1

5절에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이런 기도 끝에 태어난 아이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태에서 난 자 중에 세례 요한처럼 큰 자가 없다고 칭찬할 정도였습니다. 주님이 태어나시기 전에 세례 요한을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누가복음 3장 4절과 5절에서는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여 세례 요한의 사역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마을에 원님만 행차해도 그 길을 정비하고 정리하느라 야단이 납니다. 인간의 행차도 이러할 진대 하나님은 더하셔야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사야의 이 말씀은 바벨론 포로로부터 해방되어 돌아올 때의 모습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바벨론에서 이스라엘까지 오는 길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라 부릅니다. 마치 그 길이 초승달처럼 돌아서 가야 합니다. 그 가운데는 광활한 사막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오는 영광스러운 길이고, 또 급히 그곳으로 가야하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막에 대로, 곧 고속도로를 내는 일을 시작하라는 명령입니다. 주님 오시는 길에 골짜기가 있으면 메워야 합니다. 높은 산이나 작은 산이나 솟아 있는 것이 있으면 깎아서 평탄하게 해야 합니다. 굽은 것이 있으면 곧바로 펴서 직선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험한 길이 있으면 잘 다듬어 걸려 넘어지지 고르게 다져야 합니다. 

이것을 길을 닦는 이미지로 표현했지만은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 준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골짜기와 같이 낮은 곳에서 신음하던 가난하고 약한 자들은 좋은 옷을 입히고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산처럼 교만하게 솟아 있는 부분은 깎아서 겸손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굽은 마음은 펴주어야 합니다. 상처받은 심령은 다독이고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해야 할 사역이 오늘 말씀 16절과 17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세례 요한의 사역은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사명도 세례 요한의 사역과 같습니다.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돌이키게 하고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설교에서는 천국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만 갇혀 살기 때문입니다. 기적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합니다

. 우리가 이성과 현실에만 얽매여 살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모신 인생이 정말 행복하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물질을 신으로 모시며 마치 그것에 충성하면 행복해 질 것처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삶보다 사랑하며 나누는 삶을 가르칩니다. 높아지려 하기 보다는 낮아지고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합니다. 설교에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말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설교는 세상적인 것을 끊고 하나님에게로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하고 또 상처받은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영광과 위로를 선포합니다. 너무 낮거나 상처투성이 이면 또한 주님을 맞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를 기다리며

요 근래 맞는 성탄절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성탄절이 갈수록 썰렁해져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기대가 없어져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성탄절이 주는 기대나 설렘이 없습니다. 아파트 단지 입구마다 화려한 불빛으로 장식하고 있지만 그것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마음보다는 자기 아파트를 좋게 보이려는 이미지 전략일 뿐입니다. 

우리 어린 시절에는 새벽송이라 하여 새벽에 여기저기에서 아기 예수를 맞는 찬송소리가 요란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파트 단지에 살다보니 그런 풍습은 아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뉴스에서는 올해 경기 침체 때문에 성탄절은 더 없이 차분하게 진행될 거라 예보를 합니다. 세계적인 경기 침체로 올 해는 더할 것이라는 예보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뉴스는 해마다 들렸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도 성탄절은 하루 쉬거나 선물을 받는 날 정도로만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성탄 카드 대신 전자 메일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분위기는 더 썰렁해졌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축제와 기다림이 사라진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우리 인생이 물질 때문에 너무 각박해졌습니다. 온 사회나 가정마다 축제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함께 마음을 다하여 즐거워하는 축제가 우리 사회에 필요합니다. 

14절 보십시오.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세례 요한은 기쁨을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도 기쁨을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던 날 밤 이렇게 찬양하지 않습니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우리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존재로 선택을 받았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처음으로 저희 고향 벽골제 행사에서 불꽃 축제를 보았습니다. 정말 황홀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해부터는 그 장관을 볼 수 없었습니다. 에너지 절약 시책 때문이라나요. 축제를 없애면 안 됩니다. 가난해도 축제가 있기에 인생이 살맛이 나는 법입니다.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시대의 비극은 기다림, 곧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하루 하루 먹고 살 뿐이지 자기 인생의 변화나 꿈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매우 현실적인 사람들이 다 되었습니다. 기다림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입니다. 변화하지 않고 안주하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다리는 사람에게 기다린 대로 이루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이스라엘의 위로 곧 구원을 기다리다 아기 예수를 보게 되었고 그는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 했습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2:29-32) 

또 과부된 지 84년이나 된 안나라는 여선지자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아마 이 기도의 내용도 메시야에 대한 기다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8일째 할례 받으러 성전으로 올라온 아기 예수를 보게 되었습니다.

대림절 기간 동안 아기 예수가 베들레헴 마구간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다시 태어나길 기도하고 기다리십시오. 그런 인생에게 주님은 아기 예수를 축복으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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