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대림절] 손을 내밀어 주를 붙잡으라 (마 14:22~33)

  • 잡초 잡초
  • 398
  • 0

첨부 1


손을 내밀어 주를 붙잡으라 (마 14:22~33)


우리나라가 비록 지금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위상은 몇 십 년 사이에 엄청나게 높아진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세계적으로 그 영향력이 커지면서 외국의 귀빈들, 대통령이나 
장관급에 있는 사람들이 자주 우리나라를 방문합니다. 
그런데 신문이나 TV를 보면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공항에서부터 많은 준비가 되어 있음을 봅니다. 플랜카드나 꽃들로 장식되기도 하고, 외무장관이나 의전을 맡은 장관들이 공항까지 마중 나가며, 
어떤 때는 대통령이 직접 마중 나가서 그들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의장대까지 준비되어 존경을 표하는 예도 있습니다. 

비단 국가만이 아닙니다. 
가정에서도 손님이, 특히 귀한 손님이 오면 청소하느라 한바탕 법석을 떨어야 합니다. 대심방을 할 때면 심방받기로 한 날 전에는 온 집안이 난리가 납니다. 
요즈음은 좀 덜하지만, 제가 어릴 적만 해도 그날은 집안 대청소의 날이었습니다. 
이처럼 손님이 올 때에는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잘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며칠 있으면 너무나 중요한 손님! 한 분이 우리 곁으로 오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희망이신 , 구주이신 아기 예수님입니다. 손님을 맞을 때 정성스런 
준비가 필요하듯, 특히 귀한 손님일 때 더욱 그러하듯, 너무나 귀한 손님인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도 정성스런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탄절 앞에는 기다린다라는 뜻을 지닌 대림절, 혹은 대강절이 4주 동안 
있어서, 아기 예수를 그냥 맞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는 가운데 맞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3년 동안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그 많은 기적하나하나가 의미 없이 목적 없이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물 위를 걸어가신 것은 까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 전 배경을 먼저 살펴보도록 합시다.

바로직전의 사건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입니다. 
무리들을 먹이신 후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 보내셨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배에 태워 앞서 가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하게 
했다는 말은 이상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요한이 이 사건을 설명한 것을 보면 그 일의 정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 6장 15절에서 무리를 먹이신 후에 무리가 와서 억지로 저를 잡아 임금을 삼고자 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무리의 환호의 물결이 온 팔레스틴에 퍼지고 흥분상태가 되어, 이제라도 
폭동이 일어나기 시작할 것 같았습니다. 이런 위험스러운 상황에서 제자들이 여기에 있으면 한결 문제를 복잡하게 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 역시 아직까지 예수를 지상의 권력이란 문제에서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에서는 예수님 혼자 해결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며 제자들이 여기에 
뒤얽혀지지 않기 위해 먼저 보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남게 되자 기도하시기 위해 산에 오르셨습니다. 
때는 이미 밤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호수를 가로질러 귀로에 올랐습니다. 이때에 
돌연 이 호수의 유명한 돌풍이 휘몰아쳤습니다. 제자들은 바람과 파도와 싸우면서 거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예수님께서는 호수 건너편에 가시기 위해 호수를 돌아 걷고 있었습니다. 마태는 이미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먹이실 때 그들을 푸른 풀 위에 둘러앉게 하셨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때가 봄이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됩니다. 
아마 그 때는 4월 중순에 있는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습니다. 

그렇다면 달은 보름달이었을 것입니다. 
고대 시간으로는 밤을 4경으로 구분했는데 - 6시에서 9시까지, 9시에서 12시까지, 12시에서 3시까지, 3시에서 6시까지였습니다. 그래서 새벽 3시에 호수 북편 높은 지대를 거닐고 계시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파도와 싸우는 배를 보시고 그들을 도우기 위해 해변으로 내려가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셨을 때 당시 바다의 상태가 어떠하였나가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다가 평온할 때 걸으신 게 아니었습니다. 그 때 바다의 상태는 역풍이 불어대고, 파도가 크게 쳐서 배를 저어가기에 너무나 힘든 상태에 제자들이 빠져 있었습니다. 

24절을 보면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라고 적고 있습니다. 바로 이 말 뒤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그냥 오신 게 아닙니다. 
심심해서 물 위를 걸은 게 아닙니다. 바로 고난을 당하는 제자들을 보시고, 제자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찾아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고난 중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25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4절에서 제자들은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그 단어는 “밤 사경”이라는 말입니다. 밤사경은 언제입니까? 새벽 3시부터 6시까지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깊은 밤을 말하는 새벽 4시쯤을 가리킵니다

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밤은 평안히 쉴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이면에는 밤은 어두움을 대표하며 고난과 범죄의 시간을 대표하는 단어입니다. 바로 오늘 24절의 말씀인 제자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었던 그 시기, 즉 제자들이 바람과 물결로 받았던 고난과 밤사경은 같은 의미의 단어입니다.

잠시 우리는 여기서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오실 때의 상황으로 우리의 시선을 옮겨보도록 합시다. 

여러분, 예수님이 하필이면 왜 2천 년 전에 유대 땅에서 태어나셨을까요? 
왜 좀 더 전에나, 후에, 또 다른 나라에서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 때, 
그 곳에서 태어나셨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필연적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오실 때의 유대의 상황을 아십니까? 
예수님이 오실 때에 유대는 로마의 지배를 받는 나라였습니다. 식민지로 살았습니다. 
식민지의 삶이 어떠합니까?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통해 식민지의 비참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2천 년 전 유대 땅이 바로 그런 상태에 있었습니다.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가난과 각종 질병으로 백성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진 상황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평화로웠지만, 그 평화는 로마에 의해 무력이라는 물리적 힘으로 
강제된 거짓된 평화였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해방을 기다리며 울분을 삼켜야만 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 그 상황에 비교되는 단어를 찾아본다면 “밤 사경”입니다. 

유대 땅이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기에, 예수님이 그 때, 그 곳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고통당할 때 모세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켰던 것처럼, 극도로 피폐해진 유대 백성과 그 땅을 구원코자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더 이상 힘들어 하루라도 살기 어려운 시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누군가를 기다렸습니다. 바로 그들이 기다린 것은 메시아였습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낮은 자인 인간의 모습으로 가장 천한 곳인 마구간의 말구유에서 말입니다.

다시 오늘 2008년 12월 14일의 오늘의 시대로 장면을 옮겨보도록 합시다. 

오늘의 시대는 어떤 시대입니까? 
세계적으로 경제적 어려움이 있습니다. 전쟁과 음란이 가득한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시면서, 어떤 이들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어떤 분들은 
죽지 못해 살아간다고 말씀 하십니다. 
행복할 때, 우리의 삶이 풍요로울 때!
여러분들은 살아계신 주님을 느끼며 살아가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안락하고 풍요로울 때 예수님을 잘 못 느낍니다. 
예수님께서 오셔도 온 줄도 모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렵고 힘들고, 괴롭고, 외로울 때, 예수님은 내게 다가오시며, 또 내게 와 있는 예수님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은 밤 사경에 있지는 않습니까? 
누구나 인생길에 밤 사경을 지나게 되어 있습니다. 물질의 고난이나 질병의 밤 사경, 가정의 밤 사경, 앞날의 캄캄 밤 사경,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고난당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오신 예수님께서, 2000년 전 고난당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찾아오셨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찾아오신 주님을 향한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기 틀립니다. 어떤 이들은 정말 대통령을 맞이하는 것보다 더 열광적으로 맞이합니다. 그러나 또 어떤 이들은 오신 주님을 오히려 피하고 도망가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은 고통 받고 있는 자신들을 향해 오신, 예수님에 대해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본문은 그 상황을 26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제자들이 그가 바다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유령이라는 헬라어의 의미는 실체가 없는 허상이라는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주님을 믿는다 하지만 오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할 때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영적 눈이 열리지 않을 때 우리는 바로 그러한 실수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 삶가운데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라는 고백이 늘 되길 원합니다. 우리의 영적 눈이 열리지 않고는 오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영적 눈이 열리지 않을 때 우리는 오시는 주님을 영접하기는커녕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 도망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예수님이라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말씀 하십니다.
“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용기를 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용기를 내라 라는 말은 두려움이나 어려움에 직면한 사람을 격려하는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을 향해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질책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주님의 아버지된 마음이 나타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어두움에 무서워 떨고 있을 때, 부모 된 여러분들이 찾아 갔을 때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하고, 소리치며 무서워 할 때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
이놈들이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나를 못 알아봐~ 하며 호통 치며 꾸짖으십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의 자녀들을 안심시키며 격려합니다. 
바로 지금 주님께서 제자들을 격려하며 위로하고 계십니다. 

영적 눈이 어두워져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며 세상가운데에서 떨고 무서워하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세상의 사람들은 두려워 무서워하고 있을 때, 위로하고 격려하기 보다는 호통 치며 
함께 하지 않지만 우리 주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제자들이 무서워하고 있을 때 주님은 즉시 말씀으로 다가 오셨습니다. 이어 베드로가 무서워하고 있을 때 우리 주님은 즉시 행동으로 다가 오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때로는 우리가 기도 중에 혹은 성경말씀을 읽는 중에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또한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두려워하고 있을 때, 무서워하고 있을 때, 부모님의 따뜻한 손길로 자녀를 안아주듯이, 사랑하는 여인의 어깨를 살며시 안아주는 멋진 남자의 손길로 우리 주님은 우리를 터치하십니다. 

한편, 예수님임을 알아본 베드로는 물위로 걷다가 바람을 보고 그만 두려움에 휩싸여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 상황을 본문 3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30절에 “바람을 보고”라는 말씀은 충동적인 성격의 베드로가 예수님에게로 나아가는 동안 관심의 대상이 달라졌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믿었지만 폭풍의 위험에도 침착히 인내 할 수 있는 만큼의 큰 믿음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믿음의 수준의 문제입니다. 정녕 베드로는 예수님만, 앞만 바라봐야 함에도 불구하고 바람, 밑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을 삼킬 듯이 달려드는 풍랑에 대해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일어 날수 있습니다.
주님을 향해 달려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헛된 바람을 보고 우리는 포기하고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물질의 바, 관계에서 오는 상처의 바람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향한 발걸음을 멈출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은 오직 주님만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정녕 온전한 믿음의 눈은 결코 두 개의 초점 즉 예수님과 세상의 풍파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비록 베드로가 헛된 바람을 보고 물에 빠졌지만 어떻게 했습니까? 
30절에 보면 소리를 질렀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라고 말입니다. 그가 비록 바람을 보고 물에 빠지긴 했지만, 적어도 그에겐 소리칠 수 있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밖에 없다는,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그 긴말을 그 급한 상황 속에서도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뭐라고 베드로가 했을까요?
아마 ‘사람 살려’ 혹은 ‘날 살려’ 라고만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비록 믿음이 적긴 하지만, 그러나 적어도 급할 때 예수님을 부를 수 있는 믿음은 있어야 하겠습니다. 파도를 보고, 바람을 보고 두려워 한 베드로처럼, 우리도 세상을 보며 시험받고, 절망하며, 좌절하며 포기하고 싶고, 
믿음이 사라져가는 것을 느낄 때가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라도 우리는 예수님을 힘껏 찾을 수 있는 예수님께 외칠 수 있는 믿음은 있어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곤란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예수님은 나를 이끌어 주신다, 예수님은 나를 인도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어려운 상황도 하나님께서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좌절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이 때 주님을 찾으라고, 주님께 외치라고 하늘이 내려준 기회입니다.


베드로의 외침을 들은 예수님은 31절에 어떻게 하셨다고 기록되었습니까? 

즉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으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31절에 ‘의심하다’로 번역된 디스타조(distazo)라는 동사는 신약성경의 마태복음에서만 나옵니다. 마태는 이 낱말을 항상 믿는 자들에게 연관하여 사용하며,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절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즉 믿음에 의지 하지 못하는 자들을 꾸짖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비슷한 내용의 말씀이 요한복음에 나타납니다. 거기서는 믿는다는 것은 항상 동사이지 명사가 아닙니다. 신앙은 소유물이 아니라 활동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부르기를 멈출 때 사라져 버리는 노래와 같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은 그들의 믿음을 훈련해야 합니다. 믿는 기독교인들의 삶은 어쩌면 의심과 믿음이 하나로 혼합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고 했을 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베드로의 믿음의 분량이 아니라 베드로의 잘못입니다. 가장 작은 믿음이라도 올바른 대상을 향한 것이면 성공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믿음이 아니라 베드로 자신을 꾸짖으셨습니다. 
문제는 그의 믿음이 의심에게 자신을 내주었다는 것입니다. 

다섯 살 된 여자 아이가 수영장 가에 서 있습니다. 
아이의 아빠는 수영장 안에서 팔을 활짝 펴고 말합니다.
"얘야, 펄쩍 뛰어. 겁내지 마. 아빠가 있잖니. 아빠가 잡아줄게. 어서 뛰어들어"
그 순간 아이는 갈등합니다. 마음 한쪽에서는 가만히 있으라고 외칩니다.
물은 깊고 차갑고 위험하다. 전에 이런 일을 해본 적도 없다. 뭔가 잘못된다면 어쩌나? 나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빠가 물속에 계신다. 아빠는 그녀보다 크고 강하며 믿음직했다. 아빠는 자신 있어 보인다.

이것은 두려움과 신뢰 간의 싸움이다.
신뢰는 말합니다. "뛰어들어!"
두려움은 말합니다. "안돼!"
그러나 평생 수영장가에 서있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결정해야 합니다.
만일 뛰어 내리기로 결정한다면, 자신을 붙잡아 주는 아빠의 능력을 더욱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번에도 또 뛰어내릴 가능성이 커집니다. 
물이 덜 무서워 질것입니다. 결국 아이는 자신을 두려움 때문에 뒤로 물러서지 않는 사람으로 여길 것입니다. 
반면 뛰어내리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아빠를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기회를 잃습니다. 다음번에는 더욱더 안전을 원하게 될 것입니다. 미래의 두려움을 포함하는 결정들을 직면하는 것을 거부할 것입니다. 

두려움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세상을 향한 두려움보다 더 크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말씀 31절에 주님은 물에 빠져가는 베드로를 향해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았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신속한 구원 행위를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물에 빠지는 베드로를 건지기 위해서는 단 한마디의 명령으로 충분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친히 손을 내밀어 그의 몸을 붙잡으셨다고 하는 이 말은 특별히 주님의 ‘붙잡으시는 사랑’을 경험하게 하시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어떤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남자 아이가 길을 건너려고 합니다. 행단보도가 없는 사거리에 서있습니다. 이 아이는 그만 좌우를 살피지 않고 길을 건넜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주의하지 않았던 방향에서 차한다가 달려옵니다. 그 장면을 마침 집으로 가던 한 사람이 보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 아이의 어머니였습니다. 

여러분이 그때 길어가던 사람이라고 상상해보시고 답을 해 보세요!
아이에게 “애야 조심해” 라고 소리치겠습니까? 
아님 직접 달려가 그 아이를 안고 옆으로 피하시겠습니까?

바로 오늘 본문에서의 주님의 모습이, 직접 달려가 나의 사랑하는 아이를 안고 옆으로 피하는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이 거친 죄악의 세상 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즉시 붙잡아 주시는 
주님의 손길에 의해 저와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보존되고 유지될 수 있을 뿐입니다. 
오직 주님의 손길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을 향해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주님께 외치는 사람을 예수님은 외면치 않습니다. 고통 받고 죽어가는 백성을 예수님은 구원해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난과 분함과 괴로움과 깊은 좌절감 속에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손을 내밀어 구원해 주십니다. 
여러분! 물에 빠져 가는 베드로를 보고 예수님이 그 손을 붙잡으신 것처럼, 2천 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손을 내밀러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내 손을 붙잡고 다시 일어나라고, 이 역사 속에, 우리의 삶의 현장에, 그리고 나의 마음에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찾아오신 주님께서 본문 32절을 보면, 배에 함께 올랐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바로 그때 바람이 그쳤다라고 말합니다. 

세상가운데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의 삶속에 많은 바람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단의 유혹이 있습니다. 많은 고난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우리의 경험으로 우리의 
지식으로 우리의 물질로 이겨낼 수는 없습니다. 이 모든 것으로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바람을 잠재울 수는 없습니다.
바로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와 함께 인생의 배에 타실 때 가능합니다. 
오직 우리 예수님이 우리가 함께 할 때, 우리는 바람 많은 세상가운데에서 주님을 
향한 항해를 멋지게 계속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5장 24절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여기서 동행은 “하나님과 함께 걷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 걸을 때 세상의 모든 바람은 그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에 대한 마태의 결론은 마가의 것과 철저하게 다릅니다. 마가는 이 이야기의 결미부에서 예수님께서 물위를 걷는 것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깜짝 놀람으로 인한 당혹감입니다. 마가복음 6:5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었더라” 

그러나 오늘 본문 마지막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였더라”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기적을 베풀기 위함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복받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빛으로 이땅에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코자 이땅에 오셨습니다.

33절의 말씀에서 나타는 예수께 절하며 라는 이 말에 우리의 시선을 주목합시다.
영어성경에는 절을 worship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배하는 것입니다. 
“주님1 당신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신앙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빛으로 이땅에 오신 주님을 우리를 구원코자 오신 주님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제자들이, 주님을 최초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 마태복음 16장 16절의 베드로의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27장 54절에서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오시는 주님을 우리가 만날 때 우리가 진심으로 예배할 때 우리의 고백이 바뀝니다. 우리의 인생이 바뀝니다. 영적소경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버려진 우리의 인생이 비전의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저기 길에 뒹구는 쇠파이프를 주어다가 팔면 1000원의 값어치지만, 그것을 가공하여 필요한 공예품이 되면 10만원 100만원의 가치 있는 인생이 됩니다. 
우리는 연약한 질 그릇 이지만 내안에 보배이신 주님을 모시면 우리는 보배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한 골동품 수집가가 시골의 장터를 지나는데 상점에 고양이가 진귀한 백자항아리를 밥그릇으로 그냥 땅에 뒹구는 것을 보고 꾀를 내어 주인에게 제안을 합니다. 
여보시오! 저 고양이를 나에게 팔수 있소? 했더니 싫다는 것입니다. 
아니 내가 값을 후하게 쳐서 30만원 주리다 아니 100만원 주리다 … 
결국 이 주인은 고양이를 100만원에 팔았습니다. 그러자 이 골동품 수집가는 
고양이를 샀으니 저 밥그릇은 필요 없으니 저 밥그릇도 마저 주구려 했더니 
주인 왈… 
“ 예끼 여보시오… 내가 저 밥그릇 때문에 고양이를 몇 마리나 팔았는데 
저 밥그릇을 준단 말이요…” 하며 방안으로 들어갔답니다. 

우리는 아무 가치 없는 인생이지만 주님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보배로운 인생이 되었습니다. 
바로 우리는 하나님의 보배로운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보배로운 자녀로서 여러분께 손을 내밀며 오시는 주님을 어떻게 맞이하시겠습니까?

이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힘들지만 괴롭지만 혹은 즐겁고 행복하지만 우리의 마음과 영혼은 오직 주님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내 인생에 있어 마지막 대림절을 보낸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에 최고의 것들로 최선의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이야 말로 손을 내밀며 오시는 주님을 반갑게 맞이하는 모습입니다.

항해와 같은 인생항로에서 우리는 밤 사경에 고난을 만나게 됩니다. 
가장 처절한 생 가운데에 우리는 창조자를 찾게 되어 있는 피조물입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오직 주님을 예배하고 주님 안에 진리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