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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포스(빛) (요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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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빛)  (요 1:1~13)


12월이 시작되었습니다.  12월은 본격적인 겨울의 계절입니다.  요즘 매서운 한파가 몰려와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또 12월은 결산의 달이기도 합니다.  이제 또 한해가 저물어 갑니다.  세월이 이렇게 덧없이 흘러갑니다.  한해를 잘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해를 벅찬 꿈과 기대감으로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12월은 성탄의 계절입니다.  교회력에 의하면 지금 우리는 대강절이라는 절기를 보냅니다.  대강절은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보내는 절기입니다.  교회력은 대강절부터 시작됩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새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며, 탄생이 주는 의미를 묵상하며 다시 신앙과 삶의 새로운 도전을 받고 나가야 할 시점입니다.

이런 12월을 맞이하면서 사회에서는 사자성어를 통해 한해를 돌아보고 되새기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자에게도 기억할 만한 사자성어를 마음에 담을 필요가 있습니다.   

2년 전 이맘때에 신앙의 사자성어를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제 2008년을 마무리하면서, 또한 성탄의 계절을 보내면서 이제는 사자성어는 아니지만 신앙에 기억할 만한 소중한 단어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로 설교의 제목에 나온 것처럼 ‘포스’라는 말입니다. 

‘포스’가 무슨 말일까요?  기업이나 단체의 우두머리 ‘보스’도 아니고, 배구에서 스파이크를 위해 올려주는 ‘토스’도 아니고 포스입니다.  젊은이들은 종종 ‘포스가 느껴진다’는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거기서 말하는 포스는 영어단어입니다.  힘이나 영향력, 카리스마가 보일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비범한 능력을 가졌거나 인상이 강렬한 사람, 혹은 사물에 '포스가 강렬하다'는 표현으로 종종 사용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포스는 그런 의미의 단어가 아닙니다.  과연 무슨 뜻일까요?  그 의미를 우리는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많이 반복하는 단어입니다.  바로 ‘빛’이라는 말입니다.  

포스는 신약성경을 기록한 헬라어로 빛을 의미합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하면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과는 사뭇 다르게 예수님의 탄생에 접근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왜 이 땅에 오셨는가를 알려주기 위해 몇 가지 단어로 그것을 강조합니다.  그 가운데 우선적인 말이 바로 포스입니다.  주님이 포스, 곧 빛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빛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왜 빛으로 오셔야 했는지 이유를 알려줍니다.  왜 주님이 빛으로 세상에 오셨을까요?   오늘 여기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첫째는 세상이 더럽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소개하는 것으로 문을 엽니다.  예수님을 우선적으로 강조하는 말이 바로 ‘빛’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역시 세상도 어떠한가를 알려줍니다.  예수님이 세상이 오실 때 그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요?  먼저 세상이 몹시 더러워진 것을 강조합니다.  3절에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신 분임을 말씀하시면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할 때부터 계신 분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창세기에도 나오지만, 처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 그 만물이 어떠했을까요?  가장 완벽하고, 온전하고, 가장 깨끗한 세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한 이후, 세상은 더러워졌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수많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점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점점 더러워진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시대에 많이 더러워지고, 절정으로 더러워진 것입니다.  물론 지금 시대는 더 그렇지만 예수님이 탄생하실 그 세계는 그때로서는 가장 더러운 세상이었습니다.

당시 세상이 얼마나 더러웠을까요?  우리는 그것의 좋은 예를 예수님의 탄생에서 찾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구유에서 나셨습니다.  구유가 무엇일까요?  말이 좋아 구유이지, 구유는 짐승의 밥통입니다.  시골에 가면 돼지는 소가 먹는 밥통, 여물통을 보셨습니까?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고약한 냄새가 나고, 불결하고, 더러운 곳이어서 사람들의 접근도 쉽지 않은 곳입니다.  그저 짐승이니까 그러려니 생각할 뿐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곳에 세상의 첫발을 내디딘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의 모든 부모는 태어나는 아기를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맞이하려고 합니다.  

세상의 어떤 부모가 처음 태어나는 아기를 구유에서 맞이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곳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주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이라서 얼마든지 세상의 가장 좋은 곳을 선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왕의 왕으로서 화려한 궁궐에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궁궐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의 축복 속에 환영받는 따뜻한 집에서도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아니 당시 마리아와 요셉이 호적 하러 고향 땅 베들레헴에 내려왔을 때라서 마음만 먹으면 반듯한 여관에서라도 태어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구유에 오셨습니다.  왜 구유일까요?  왜 하나님은 그곳을 독생자가 첫 발을 내디딘 장소로 선택했을까요?  어떤 신학자는 이 물음에 대해 의미 있는 답을 내렸습니다.  주님이 구유를 선택한 것은 당시 세상에서 구유가 가장 깨끗한 곳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세상은 더러웠고, 그 어느 곳도 구유보다 낫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참 비극적인 일입니다.

당시 세상은 이처럼 더러웠는데, 그렇다면 성전은 어떠했을까요?  세상이 더러우면 성전은 달라야 했습니다.  세상은 더러워도 성전은 깨끗하게 유지되었어야 합니다.  성전은 그 자체가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성전은 어떠했을까요?  역시 더러웠습니다.  그곳을 우리는 예수님이 성전을 청결케 하신 사건을 보면 압니다.  주님은 사역 초기와 말기에 성전에서 거룩한 분노를 발하시며 정결케 하셨습니다.  주님은 성전에 들어가실 때 거기에서 매매하고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둘러엎으시면서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이것이 당시 성전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더러워도 마지막 보루처럼 남아 있어야 할 성전마저 강도의 굴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빛으로 오셔야만 했습니다.


둘째는 세상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빛으로 오셔야 하는 또 다른 이유였습니다.  세상이 험악하고 무서웠습니다.  누군가가 통제하고, 제동을 걸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입니다.  힘이 있으면 그 힘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어떤 왕이나 군주보다 높으신 왕의 왕이 있어야 하고, 인간이 가진 권위 중에 더 권위가 있는 존재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당시 세상이 얼마나 무서웠는가를 대표적으로 알려주는 말씀이 나옵니다.  바로 세례요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문 6절과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그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그보다 더 큰 이가 없다는 칭찬을 들을 정도로 뛰어난 사람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다른 복음서에는 당시 세례요한의 영향력이 대단했던 것을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요단강에 몰려왔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메시야로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만약 요한이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으면 사람들은 그를 메시야로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는 거침없이 회개를 선포하고, 종교지도자를 향해 독사의 자식이라고 말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결국 이런 세례요한이 희생을 당합니다.  당시 헤롯왕이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자기의 아내로 삼은 것에 대해 세례요한이 날카롭게 지적하자 그를 체포하여 감옥에 넣었습니다.  그러다가 헤롯의 생일잔치 때 딸을 시켜 세례요한의 목을 베어오게 합니다.  결국 세례요한은 목을 소반에 담아 전해지게 됩니다.  이런 끔찍한 일이 바로 예수님시대의 모습입니다.  참 무서운 세상입니다.  무서운 세상, 끔찍한 일이 서슴지 않고 행해지는 세상, 바른 소리를 하면 죽이는 세상, 사람이 멀쩡
하게 살지 못하는 세상, 서로를 감시하고 공격하여 편안하게 살수가 없는 세상입니다.  

결국 그들의 모함에 의해 예수님도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처형당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가장 완벽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창조주요,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그분은 영원하신 분이요 인간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분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신 분이요, 인간은 상대적인 힘만 있을 뿐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생명이고, 그분의 계획이 확실합니다.  그분의 소속은 하늘이고, 인간으로 하여금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분은 친히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죄를 해결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말할 수 없는 수난과 조롱과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그 거룩하신 분께 침 뱉고, 고통을 가하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시게 하고 처참하게 죽였습니다.  십자가는 분명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지만, 무서운 세상을 대변하는 처참한 현장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다는 사람들의 오만이 극치에 달한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처럼 세상이 무섭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말을 못합니다.  누구도 기를 펴지 못합니다.  누구도 바른 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누구도 자기 뜻대로는 살수가 없습니다.  이런 세상은 결코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닙니다.  이런 치우침으로는 어느 것도 온전히 세워지지 못합니다.  바로 이런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주님이 오셨습니다.  영원한 진리의 참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셋째는 세상이 캄캄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더러운 세상, 무서운 세상과 함께 캄캄한 세상을 배웁니다.  본문은 바로 그것을 강조합니다.  이런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5절에 “빛이 어두움에 비추되 깨닫지 못하더라”  10절에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또 11절에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라고 말합니다.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세상이 캄캄함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세상이 캄캄하기에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양심이 있지만 양심을 저버리고 삽니다.  법이 있지만 지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선포되지만 무시하고, 깨달음이 없습니다.  시대가 마지막으로 갈수록 사람들이 점점 그렇게 캄캄하여 갑니다.  이게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사탄은 늘 인간 곁에서 깨달음의 통로와 길목을 막아놓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와 말씀을 통해 깊은 깨달음을 갖는 것만큼 축복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깨달음이 있습니까?  깨달음이 옵니까?  뭔가 여러분의 영혼 깊은 곳에서 나를 향한 소리가 들려옵니까?  그것은 정말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것은 변화의 큰 조짐입니다.  결국 인생은 다 깨닫게 됩니다.  언젠가는 철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단지 시간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지금이냐 나중이냐, 건강할 때냐 아플 때냐, 성공할 때냐 실패할 때냐, 살았을 때냐 아니면 죽는 순간이냐, 여기서냐 아니면 저기에서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반드시 천국과 지옥으로 갑니다.  천국에서도 깨닫고, 물론 지옥에서도 깨닫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그것을 알려줍니다.  분명 지옥에서도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은 것입니다.  그때 깨달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캄캄한 세상이기에 주님을 주님으로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고, 성경을 진리로 알지 못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성경은 진리입니다.  분명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세상은 그래서 점점 무지해 갑니다.  이제 점점 세상에는 절대적인 것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봅니다.  기독교도, 성경도, 하나님도 그냥 여러 종교중의 하나로만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진리로 믿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자들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셨고, 그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구원자로 믿는 자들입니다.  주님을 주님으로 아는 것만큼 축복이 없습니다.  내가 죄인 것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을 확신하는 것만큼 은혜가 없습니다.  바로 우리가 그런 사람이기에 이 자리에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고백합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주님이 누구인지 알기에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참 빛이신 주님을 아는 것이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캄캄한 세상이기에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놀라우신 주님을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캄캄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주님을 영접하는 자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영접하는 것은 그야말로 가장 큰 은혜입니다.  이것은 사람으로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13절에서 이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니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은혜위에 은혜입니다.  이것은 축복중의 축복입니다.  그 은혜와 축복을 지금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자요, 주님을 영접한 자요, 단 하루도 주님 없이는 살수 없음을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캄캄한 세상에서 우리에게 이런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주님은 빛, 포스로 오셨습니다.  바로 그 주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는 빛으로 오신 주님을 믿고 영접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이 더러운 세상에서, 무서운 세상에서, 캄캄한 세상에서 빛이 되어야 합니다.  일어나서 빛을 발해야 합니다.  날마다 깨끗이 살아야 하고, 주님과 더불어 무섭지 말아야 하고, 그리고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성탄의 계절에 먼저 ‘포스’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빛이신 주님과 함께 우리도 세상의 빛이 되기를 다짐하며 한주간도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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