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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평화의 왕을 기다리며... (사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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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왕을 기다리며... (사 9:1~7) 


❚평화를 갈망하며

이스라엘은 고난의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의 역사는 온통 고난으로 얼룩져 있고 그야말로 수천 년 역사 상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평화를 누려보지 못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가 우리나라의 역사와 참 비슷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역사학자들은 우리나라가 자리 잡은 한반도가 북쪽인 위쪽으로는 중국과 러시아, 남쪽인 아래쪽으로는 일본이 자리 잡고 있어 이 열강들 틈에서 잠시도 전쟁과 침략이 그치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만 이스라엘도 우리나라처럼 위의 북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앗수르, 바벨론, 바사 왕국과 같은 강대국이 자리 잡고 있었고 아래쪽으로는 전통적인 강대국인 애굽이 자리 잡고 있어 이 두 나라 틈에 낀 이스라엘에게는 전쟁과 침략이 끊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 러시아, 일본이 번갈아가며 우리 땅에 침략하는 통에 전쟁이 그치고 평화로웠던 시절이 얼마 안 되는 것처럼 이스라엘도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항상 전쟁이 끊이지 않아 다윗, 솔로몬 시대처럼 아주 짧은 시절만 평화를 누리며 살았던 민족인 것입니다.

그래서 두 민족은 성격도 비슷합니다. 아주 억세고 생존본능이 뛰어납니다. 어디를 가든지 살아남습니다. 또 두 나라 사람들이 만나면 하는 인사조차도 비슷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나면 하는 인사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식사하셨습니까?”입니다. 아마 지지리도 못살던 시절 굶기를 밥 먹듯 했기에 사람들끼리 만나면 “식사는 했냐, 밥은 먹고 사느냐?”고 물었던 것 같습니다. 

또 하나의 대표적인 인사가 바로 “안녕(安寧)하십니까?”입니다. 특히 아침에 만나면 이 인사를 하는데 이 말은 밤사이 편안히 주무셨느냐, 어젯밤 별고 없이 잘 지내셨느냐는 뜻입니다. 하도 가난하고 전쟁이 많아서 밤새 안 맞아 죽고 안 굶어 죽고 살아 계셨냐는 뜻으로 그렇게 인사한 것입니다. 좀 나쁘게 이야기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좋게 말하자면 안녕하시라고, 평안하시라고, 잘 먹고 잘 살고 편하게 사시라고 서로 축복하는 의미에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인사 속에 늘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힘들고 어렵게 살아야만 했던 우리 조상들의 고난의 삶이 들어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나면 하는 인사, “샬롬”은 평화(平和) 혹은 평강(平康)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평화를 누려보지 못했기에 우리로 치면 아침에 만나 “살아 계셨군요” 하는 뜻으로 “당신에게 평강이 있기를!” 하고 인사한 것입니다.

이렇게 고난의 역사 속에서 평화를 갈망한 두 민족에게 종교는 엄청난 큰 힘을 주었습니다. 대개 이런 경우 신앙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강조합니다. 지금 현실은 어둡고 힘들지만 이 암담한 현실이 미래에 언젠가 바뀔 것이라는 미래 신앙이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통의 역사 속에서 불교를 믿으며 그 가운데도 미륵불(彌勒佛)이라는 미래의 부처를 기다렸습니다. 미륵불이란 도솔천(兜率天)에 살며 56억 7천만 년 후에 성불(成佛)하여 이 세상에 내려와 제2의 석가로서 모든 중생을 제도(濟度)한다는 보살입니다. 반면, 하나님을 섬긴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래에 나타나서 자신들을 구원해줄, 지금은 암담하지만 미래에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를 주고 우리 민족을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으로 바꾸어주실 ‘그 분’이 올 것이라고 믿고 살았습니다. ‘그 분’이 바로 구세주인 메시야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미륵불을 불교의 메시야 신앙이라고도 부르지만 이것은 잘못된 말이고 진정 이 땅에 오셔서 참된 평화와 구원을 주실 구세주 메시야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그 분이 바로 ‘평강의 왕’,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샬롬의 왕’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바로 이 평화의 왕으로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다림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절망이 희망으로

오늘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6절에 나오는 한 아기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 더 이상의 흑암(고통)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암담한 역사 속에서 끝없는 침략과 전쟁으로 고통당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그리고 백성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그 아기가 태어나면 더 이상의 고통은 없어진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1절 뒷부분에 나오는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그리고 갈릴리 지역은 모두 같은 지역을 가리키는데 이곳은 당시 가장 고통과 멸시를 당하던 땅입니다. 갈릴리가 자리 잡고 있는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의 영토는 이스라엘의 가장 변두리 지역입니다. 그래서 항상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방 민족들로부터 끝없는 침략을 받으며 고통당했고 게다가 이방적인 색깔이 강하다는 이유 때문에 같은 유대인들로부터도 멸시와 천대를 받아왔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된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 메시야가 나사렛에서 오셨다고 하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1:46)고 묻는데 그 이유가 바로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이 자리 잡고 있는 갈릴리 땅에 대한 편견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당시 갈릴리는 고통당하던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도 가장 고통과 멸시를 많이 받건 최고로 고난당한 지역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바로 그 갈릴리 나사렛에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한 아기가 태어납니다. 바로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 말입니다. 바로 이 아기의 탄생으로 갈릴리는 더 이상 저주 받은 땅, 멸시 받는 땅이 아니라 희망의 땅이요 축복의 땅이 됩니다. 이와 같이 평강의 아기가 오심으로 오늘날 이 땅에서 고난 받고 멸시 당하는 모든 사람들이 희망을 되찾고 회복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섯 가지 이름

계속해서 4절부터 그 평강의 아기가 오셔서 일어날 일들이 약속됩니다. 4절과 5절을 읽읍시다.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던 모든 멍에와 그들을 때리던 채찍과 압제하던 막대기를 그 분께서 꺾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멍에나 채찍, 막대기는 모두 노예들을 다룰 때 사용하는 도구들입니다.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 노릇 할 때처럼 압제자들은 노예가 꼼짝 못하도록 멍에를 씌우고 조금만 게으르다 싶으면 사정없이 채찍으로 어깨를 내리치고 막대기로 두들겨 팼습니다. 

그런데 이런 압제자의 도구를 모두 그 분이 꺾으신다는 것은 그들을 억누르던 모든 고통과 아픔과 압제가 완전히 사라지고 참된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하신다는 뜻이지요. 나아가 마치 하나님이 그의 종 모세를 보내서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신 것처럼 죄의 종노릇을 하며 그 죄의 멍에와 채찍과 막대기에 신음하던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해방시켜 주겠다는 약속도 되는 것입니다. 군인들의 신발과 피 묻은 옷이 불살라지듯 모든 전쟁은 그치고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6절부터 나올 한 아기의 탄생으로 가능해집니다. 그가 바로 평강의 왕인 것입니다. 6절을 읽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 아기는 어깨에 정사를 메었습니다. 여기서 정사(government)란 정치, 즉 통치라는 뜻입니다. 즉 이 아기는 나면서부터 이 세상을 다스릴 통치자로 오신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 아기의 이름이 여러 가지로 나옵니다. 이 다섯 개의 이름이 모두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기묘자’입니다. “놀라운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놀라운 분입니다. 모든 것을 초월하는 놀라운 분, 기적을 일으키는 분입니다.

둘째가 ‘모사’입니다. 모사란 왕이 나라의 일을 의논하는 사람입니다. 영어로는 counselor입니다. ‘상담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고민이 있을 때 상담자를 찾아갑니다. 때로는 목사에게 상담하러 오기도 하고 전문적인 상담가를 찾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상담가도 사람들의 모든 고민을 다 듣고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가장 확실한 카운슬러, 완전한 상담자입니다. 우리가 고민하고 아파하는 것을 다 들어주시고 다 해결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셋째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넷째가 ‘영존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강조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분입니다. 영원 전부터 성부 하나님, 성령님과 더불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셨고 이 땅을 떠나 승천하신 후에도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가 언젠가 마지막 때에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신 후 영원히 다스리실 영원하신 분입니다.

다섯째가 ‘평강의 왕’입니다. 가장 중요한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어떤 위대한 통치자도, 그 어떤 사람도 줄 수 없는 진정한 평강, 샬롬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평강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저 높은 왕의 보좌에 앉아 백성들을 내려다보며 군림하고 착취하는 그런 세상의 왕들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는 백성들을 돌보고 책임지는 왕이며, 나아가 진정한 평강, 샬롬을 위해 스스로 종이 되고 그 자신을 기꺼이 죽이고 희생하는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낮아짐과 섬김과 희생을 통해 그가 다스리는 나라는 평화의 나라이며, 그의 다스림을 통해 이 땅에 진정한 평화와 평강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열심

이제 결론이 되는 말씀이 마지막 7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습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영원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여기 참으로 인상적인 표현 하나가 나옵니다. 바로 맨 뒤에 나온 ‘여호와의 열심’이라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열심’이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열심’이라고 번역된 히브리말 ‘킨아’는 ‘열심, 열정, 질투’라는 뜻입니다. 누구를 아주 뜨겁게 사랑하지 않고는 질투할 수 없습니다. 질투가 난다는 말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너무 싫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질투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정말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이 열정과 질투를 품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출 20:5, 신 5:9)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아닌 다른 존재나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가장 싫어하고 질투하십니다. 더욱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의 종이 되어 마귀 사탄의 권세 아래 산다면 하나님이 가만 놔두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죄로 말미암아 고통당하고 오늘도 평강 없는 삶을 살며 힘들어하는 것을 그냥 보고 계시겠습니까?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열정이 바로 그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면서까지도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구원의 열정과 열심히 바로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바로 이 여호와의 열심, 하나님의 열심 때문에 하나님은 성탄절에 그 외아들인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스스로 낮아지게 하시고 죽게 하셔서 우리에게 참된 평강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옛날 인도네시아의 이리안 자야 족에게 전도한 리처드슨 선교사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때는 아직 자야 섬에 식인종이 있을 때였습니다. 그들은 부족 간의 싸움이 심했습니다. 서로 싸우다가 만일 화해를 청할 때는 자기 마을의 갓난아기 하나를 적군에게 제물로 주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 아기를 그들의 말로 ‘평화의 아기’라고 불렀습니다. 리처드슨 선교사가 이 섬에 도착한지 2년째 되던 해 다시 부족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리처드슨 선교사 부부가 아기를 안고 언덕에 나타났습니다. 대치하고 있던 그들은 놀란 눈으로 이 서양인들을 지켜보았습니다. 선교사 부부는 자신들의 갓난아기를 ‘평화의 아기’로 내놓은 것입니다. 쌍방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것은 공격의 외침이 아니라 평화의 도래를 가리키는 기쁨의 소리였습니다. 기독교를 전적으로 거부하고 있던 이리안 자야 족속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신 성탄절은 우리에게는 가장 행복한 날이지만 하나님께는 가장 슬픈 날이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에게 평강 주시려고 주님이 오신 그 기쁜 날이 사랑하는 외아들을 죽기 위해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에게는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는 고통의 날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아픔과 고통까지도 기꺼이 감수하게 하신 것이 바로 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열정’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탄절을 맞으며 신나고 즐거운 마음도 가져야 하겠지만 동시에 이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 여호와의 뜨거운 열정’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이런 고백까지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사도 바울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열정과 열심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도 하나님의 열심으로 사람들을 정결한 처녀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은 중매쟁이의 열심을 품었습니다. 어떻게든 한 사람이라도 전도해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드리려고 말입니다. 바로 영혼구원의 열정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열심을 품어야 합니다. 무엇을 해도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열심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은 어떤 일에 열심과 열정을 품고 있습니까?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출세입니까? 아니면 자녀들입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성취되는 그날 우리에게는 진정한 평화와 평강이 찾아올까요?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징정한 평화는 바로 이 땅에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만날 때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외아들을 아낌없이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열심을 이해하고 우리도 그 영혼구원 생명구원의 열심을 품을 때만 우리 마음속에 진정한 평강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특별히 남들은 다 즐겁게 맞이하는 성탄절인데 참 우울한 분들이 있습니다. 경제가 어려우니 우울합니다. 

요즘 성탄절이 다 되어 가는데 예년 같으면 이맘때면 거리에, 특히 백화점에 온갖 성탄장식을 하고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오고 성탄 분위기가 가득해야 정상인데 거리에도, 백화점에도 그 어디에도 이런 분위기를 찾아볼 수 없으니 정말 썰렁한 성탄절입니다. 경제가 사람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했기 때문입니다. 

또 경제뿐 아니라 우리 가운데 병들고 실패하고 힘들어서 우울한 분들이 참 많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이번 성탄절이 기쁠 수가 없겠지요. 하지만 오늘 말씀 들은 것처럼 이런 분들도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회복되고 더 이상 이런 아픔이나 고통이 없기를, 참된 평화와 기쁨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이 성탄절을 기다리는 대림절 셋째 주일 아침, 평강의 왕이 오시길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린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사야 선지자의 기다림의 마음을 여러분도 품으시고, 그 평강의 아기가 주시는 참된 평강과 생명구원의 열심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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