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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야고보의 신앙 (행 1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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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의 신앙 (행 15:12~21)
 
   
서양 사람들은 사람의 이름을 지을 때 흔히 성경 인물들의 이름을 사용해 왔습니다. 성경 인물을 닮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영어권의 예를 들어보면 이런 이름들입니다. ‘다윗’을 뜻하는 “데이빗”(David), 베드로를 뜻하는 “피터”(Peter), 바울을 뜻하는 “폴”(Paul), 요한을 뜻하는 “존”(John) 등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뜻하는지 알기 쉽지 않은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제임스(James)입니다. 이 이름은 성경 원어가 라틴어를 거치면서 변형됐습니다. 그 이름은 성경의 ‘야고보’를 뜻합니다. 

이 “제임스”라는 이름은 영미권 사람이 아닌 우리에게도 익숙합니다. 예를 들어 영화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James Bond), 전설적인 영화배우 “제임스 딘”(James Dean), 과학자 “제임스 와트”(James Watt)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도시 이름에도 흔히 성경 인물들의 이름을 사용해 왔습니다. 성경의 인물을 그 도시의 수호성자로 섬기려는 마음에서입니다.

역시 누구를 뜻하는지 쉽게 알지 못하면서도 많은 도시에서 사용되는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산티아고”(Santiago)입니다. 대개 스페인 문화권의 나라에 이 이름의 도시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칠레의 수도가 이 “산티아고”이고, 쿠바에도 대도시 가운데 “산티아고”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리지널이라 할 수 있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있습니다. 이 이름이 영어권으로 넘어오면서 “샌디애고”(SanDiago)로 변형됐습니다. 이 도시는 미국의 캘리포니아에 있습니다.

이 이름은 “산토”(Santo)와 “이아고”(Iago)가 합해진 것입니다. “산토”는 성인을 뜻하는 말이고 “이아고”는 헬라어 “야고보”가 스페인어로 변형되면서 이루어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많은 도시가 야고보를 기리기 위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산티아고”라고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문화권에서 야고보는 대단히 추앙을 받고 존경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야고보는 어떤 인물로 등장하고 있을까요? 우선 야고보라는 이름은 신약적인 이름입니다. 즉 야고보라는 이름은 헬라어식 표기라는 말입니다. 구약에서는 이 이름이 야곱으로 나옵니다. 즉 야고보의 히브리어식 표기는 야곱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야고보라는 이름은 신구약 성경에 참 많이 나오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정말 흔한 이름이었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도 예수님과 긴밀한 연관이 있었던 사람 중에 야고보가 세 명이나 나옵니다. 우선 예수님의 12 제자 중에 두 사람이나 야고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사도 요한의 형이고 사도 중에 첫 번째 순교를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흔히 “대야고보”라고 부릅니다. 다른 하나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성경에 특별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흔히 “소야고보”라 부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예수님의 친 동생 야고보가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해 보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야고보를 주목해 보면 우리 신앙에 큰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야고보의 변화

막 6: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야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여기서 야고보는 예수님 바로 밑의 동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야고보는 어려서부터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아버지 요셉이 죽은 후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며 가장노릇을 성실히 담당하는 형 예수님을 마음으로 의지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진실하게 살아가는 형 예수님을 진심으로 존경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형 예수님이 메시야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이 집을 떠나셨습니다. 사생애 30년을 마감하고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야고보는 그런 형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가족을 돌보는 책임을 저버렸습니다. 객지를 떠돌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한다고 합니다. 사람이 갑자기 정신이 나간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이제 어머니는 누가 모실 것이며 가족들은 누가 돌볼 것인가?’ 걱정이 됐습니다. 형 예수님에게 화도 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설득해 보려고 찾아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깊은 배신감도 느끼게 됐을 것입니다. 그러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하게 됐다는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찾아가 볼만도 한데 매정하게 나타나질 않습니다. 그 시신이라도 수습하고 돌아볼 만도 한데 외면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던 야고보가 변했습니다. 고전 15:5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야고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이 만남이 야고보를 변하게 했습니다. 

행 1:14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예수님의 승천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이 성령을 받게 됐습니다. 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성령 체험이 야고보를 예수님의 위대한 종으로 변하게 했습니다. 

야고보는 약 1:1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 야고보는 자기가 이제 예수님의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자기는 더 이상 예수님의 동생이 아니라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와 보면 저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서 기둥처럼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야고보는 약 30년 뒤인 주후 62년경에 유대인들의 박해 속에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야고보는 변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혈연관계 속에서 형님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음의 관계 속에서 주님으로 믿고 따르게 됐습니다. 주님으로 섬기며 충성을 다하게 됐습니다.

야고보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뒤에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 심령 속에 임재하시면서 그 변화는 더욱 강렬해졌습니다. 이렇게 예수를 만난 사람들에게 그 속사람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미국 탈봇 신학교 학장인 마이클 윌킨스 박사가 쓴 [그분의 형상대로]라는 책에 솔직한 자기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나는 청소년 시절에 가게에서 도둑질을 하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그저 내 눈에 보이는 것을 갖고 싶어서 훔쳤다. 열세 살 때, 한번은 사탕 한 봉지를 슬쩍하다가 붙잡혀서 경찰에 넘겨졌다. 나는 경찰관에게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 뒤로 나는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결과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망만 칠 수 있다면, 여전히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고 싶어했다. 좀 더 나이가 들자 나는 내가 쓴 비용들에 대한 보고서를 마음대로 위조 작성했다. 회사용품을 개인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나는 밖으로는 변해 있었지만, 내적으로는 오랜 기간 동안 여전히 도둑이었다. 

참된 내적 변화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찾아왔다. 나는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서 중시하는 가치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소유를 존중하기 시작했다. 또한 하나님이 나를 위해 쓸 것을 공급해주실 것이며, 내가 원했던 것들이 결코 만족을 줄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기적인 욕망을 위해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것이다. 마음이 변화되자, 행동도 바꾸고 싶었다. 더 이상 누구의 것도 훔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외적인 품행은 내적인 확신과 나란히 가게 되었다. 참된 외적 변화는 내적인 변화와 함께 시작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매일 그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아름다운 변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의 기도
  
오늘 본문에 보면 최초의 기독교 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방교회의 대표인 바울과 바나바가 어머니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이방인 전도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회의에 의장 역할을 바로 야고보가 맡았습니다. 

당시 초대교회의 최고 지도자는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영적 지도자며 상징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실제 초대 교회를 이끌던 사람은 바로 야고보였습니다. 그래서 갈 2:9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해 보니까 야고보가 기둥처럼 든든하게 교회를 이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예수님의 12 제자도 아니었으면서 초대 교회에서 이렇게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그의 기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역사를 기록했던 유세비우스는 이 야고보를 “낙타 무릎”을 가진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야고보가 죽은 뒤 그 시신을 보니 무릎이 마치 낙타의 무릎처럼 되었기 때문입니다.

낙타 무릎은 무엇을 말해 줄까요? 한 마디로 기도의 양을 말합니다. 낙타 무릎은 사람의 무릎과는 생김새가 다릅니다. 무릎 관절이 크게 튀어나왔습니다. 야고보의 무릎이 낙타의 무릎처럼 변했다는 것은 그 무릎이 변형되었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무릎을 꿇고 있었기 때문에 변형된 것입니다. 이 낙타 무릎의 기도가 야고보를 기둥처럼 여김을 받게 했던 것입니다. 그의 남다른 기도가 큰 영향력을 미치게 했던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 인터넷에서 두 사람의 발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입니다. 발이 온통 굳은살 투성입니다. 추하고 기형적인 발입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외모에 천사 같은 춤을 추는 사람의 발이 저렇게 생겼을 줄이야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녀가 왜 세계 최고의 프리마 발레리나인가를 저 발이 말해줍니다. 그녀가 어떻게 나이 40이 넘어서도 무대에서 최고의 발레를 보여줄 수 있었는지 저 발이 말해 줍니다. 얼마나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을까요?

또 하나는 박지성의 발입니다. 온통 상처투성입니다. 평발이라서 축구 선수로는 적합하지 않은 발입니다. 그러나 발이 저렇게 되기까지 연습하고 또 연습했습니다. 그가 왜 하루에 천 만원씩 버는 세계적인 축구선수가 됐는지 저 발이 말해 줍니다. 그가 왜 사람들에게 그렇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저 발이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야고보의 낙타 무릎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발레에 강수진처름 굳은 살 박인 발이 있고, 축구에 상처투성이인 박지성의 발이 있다면 기도에는 낙타 무릎과 같은 기도의 사람들의 무릎이 있습니다. 바로 이 기도의 무릎이 영적인 영향력을 키워줍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사람을 세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겉으로 볼 때 말 잘하는 사람이 영향력이 있어 보입니다. 또한 실력 있는 사람이 영향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많은 업적을 낸 사람이 영향력이 있어 보입니다. 세상에서는 그럴지 모릅니다. 그러나 신앙공동체에서는 다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기도의 무릎이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세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기도 무릎은 어떻습니까? 난세일수록 기도의 무릎이 힘을 발휘합니다. 야고보처럼 더욱 기도에 힘을 쓰시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의 신앙

야고보는 어떻게 보면 두 얼굴을 가진 신앙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으로는 무릎이 낙타 무릎이 되도록 그토록 철저하게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믿음을 실천하려고 몸부림쳤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 두 모습을 하나로 통합해서 균형있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그가 쓴 야고보서에서 철저하게 믿음의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보기에 따라 바울과 다른 말씀이라고 오해 받을 정도로 믿음의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야고보는 약 2:17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그리고 약 2:22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의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야고보는 진정한 믿음은 행함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야고보가 이렇게 행함 곧 믿음의 실천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초대교회 성도들이 신앙생활한다고 하면서 믿음과 실천이 분리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고 믿음이 생겼는데 그 믿음대로 살지 않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약 1:22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야고보는 오랜 세월 가까이에서 지켜본 예수님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늘 말씀과 삶이 하나이셨습니다. 늘 믿는대로 실천하셨습니다. 언제나 믿음과 실천이 하나인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그 예수의 제자라는 사람들이 하는 말과 생활하는 모습이 다릅니다. 믿음과 실천이 분리되어갑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자신이 먼저 형님으로 가까이에서 보았던 예수님의 모습을 그대로 닮고자 힘썼습니다. 믿은 것은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믿음과 행함을 결코 분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신앙인이었던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세 가지 의문을 품고 살았답니다. 첫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둘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셋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질문에 자기 나름대로 답을 찾았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현재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가 마주치고 있는 사람이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오늘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 믿음으로 실천하려고 힘을 쓰며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추상적인 그 어떤 세계가 아닙니다. 오늘 내가 대하는 구체적인 삶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오늘 여기에서 그대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그 때 그 믿음은 하나님께 칭찬받는 믿음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실천적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믿음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었습니다. 그러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종인 야고보는 정말 철저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기도에 철저했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믿음대로 살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오늘의 야고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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