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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바라보라 (마 14: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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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바라보라 (마 14:22~33)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복음성가 가운데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 분을 뵐 땐 나는 만족하였네
저기 빛나는 태양을 보라 또 저기 서있는 산을 보아라
천지 지으신 우리 여호와 나를 사랑하시니
나의 하나님 한분만으로 나는 만족하겠네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에 백합화 예수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사람과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습니다. 실망스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바라볼 땐 만족함이 있습니다. 이 찬양의 깊은 의미를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봉독한 본문 앞서 행하셨던 기적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나 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신비로운 기적을 행하신 후 제자들로 하여금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도록 하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혼자 산속으로 가셔서 밤이 깊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밤 4경(새벽 3시~6시)에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고난을 겪고 있는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깊은 밤에 바다 위로 사람이 걸어오는 것을 본 제자들은 유령인가 하여 모두가 놀랐습니다. 어부들에게는, 밤에 바다 위를 걸어오는 유령이 나타나면 그 배는 침몰한다는 속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말하기를“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마태복음 14:28)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불안해하는 베드로에게“오라”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물위를 걸어서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예수님처럼 물위를 걸어가던 베드로가 바람과 파도를 바라보자 그만 물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고함을 지르며 건져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즉시 건져주시며 말씀하시기를“믿음이 없는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태복음 14:31)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놀라운 사건은 단순한 베드로 한사람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一.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을 때가 언제입니까?

사람이 물위를 걷는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입니다. 사람이 물위를 걷는다는 인간 능력 밖의 일입니다. 사람이 물위를 걷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신 증거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베드로가 물위를 걸어갔습니다. 풍랑이 일고 있는 바다 위를 걸었습니다. 이처럼 바다 위를 걸었을 때가 어느 때였습니까? 물위로 걸어오라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나아갔을 때였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에 의해 나타난 기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나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백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아내 사라의 나이가 90세로서 경수가 끊어진지 오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자식을 낳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기적입니다. 기적은 인간의 이성적 상식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히브리서 11:11에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에 대해 기록하시기를“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성경 사무엘상 17장에는 블레셋 나라가 골리앗 장군을 앞세워 이스라엘을 침략한 전쟁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군대와 명장 골리앗을 바라본 사울 왕을 비롯한 모든 군인들은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전쟁터에 나간 형들을 면회하고자 찾아간 다윗이 이 광경을 보고 지켜보고 한 말을 사무엘상 17:46-47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너는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했습니다. 다윗의 말대로 골리앗은 소년 다윗이 던진 물매 돌에 맞아 죽었고 전쟁에 승리했습니다. 똑 같은 상황이었으나 사울 왕은 블레셋 군대를 보고 불안에 떨었습니다. 반면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보므로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구약성경 열왕기하 19장에는 이스라엘이 앗수르 대군 185천명의 침략을 받은 기사가 있습니다. 국운이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때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하룻밤 사이에 앗수르 대군 185천명을 전멸시킨 기사가 열왕기하 19:35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에서 군사 십 팔만 오천을 친지라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나라를 위기에서 건진 히스기야 왕의 승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므로 얻은 승리였습니다.

신약성경 마가복음 2장에는 예수님께서 네 사람이 매고 온 중풍병자를 고치신 기가가 있습니다. 네 사람에게 들려온 환자가 자기가 실려 온 들것을 들고 걸어갔습니다. 이 또한 주님의 능력을 바라본 믿음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오직“믿음”으로만 연결이 가능합니다.“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는 말씀처럼 믿음의 중계 없이는 하나님과 교통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이치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위에 서는 것입니다. 믿음은 합리적 생각에 기초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셨다는 것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로 탄생하신 성탄절이 곧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도 이성적으로 과학적으로 설명을 하려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것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위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과 물질을 초월한 창조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유명한 설교가 스펄전 목사는“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계산적인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믿음을 갖는 것이다. 계산은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철학자요. 수학자였던 파스칼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철학자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과학자의 하나님도 아니시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가르친 대로 믿는 자의 하나님이시다. 신앙은 이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합리적 생각 속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말씀 위에 서는 것입니다. 

종교는 사물을 신앙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은 이성의 눈으로 대상을 분석하고 그 현상을 논합니다. 하나님을 과학적 이성으로 분석해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신앙은 먼저 믿고 그 후 나타나는 결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인간의 이성은 먼저 분석하고 깨달아 안 후 그것을 보고 믿습니다. 이처럼 믿음과 이성은 정 반대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길에는 베드로처럼 물위를 걷는 기적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적을 나타내는 믿음을 얻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해답은 로마서 10장 17절입니다.“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면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면 약해진 믿음이 강해지게 됩니다. 이 믿음의 능력에 대해 에베소서 6:16에는 믿음에 대해“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믿음에 대해 말하기를 믿음은“금보다 더 귀하다(여)”(베드로전서 1:7)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이 험한 세파를 이기고 승리하는 비결인 믿음을 얻도록 하기 위해 말씀을 가까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신명기 6:6~9에“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도록 하기 위해 히브리서 10:25에 당부하시기를“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라(자)”라고 하셨습니다. 예배의 소중함을 강조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기게 되며,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약한 믿음이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물위를 걸었던 베드로처럼 세파를 이기고 승리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토마스 칼라일 이라는 사람은 세계적인 역사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7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 <불란서 대 혁명사>의 원고를 탈고했습니다. 칼라일은 더없이 기뻐하며 머리를 식힐 겸 잠시 외출을 했습니다. 칼라일이 잠시 외출한 사이 그 집의 하녀가 방 청소를 하고 난로 불을 피우려고 쏘시개를 찾다가 누렇게 퇴색된 원고뭉치를 못 쓰는 휴지로 착각하고 그것을 불쏘시개로 사용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칼라일이 7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불란서 대 혁명사>는 삽시간에 재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밖에서 돌아온 칼라일은 이 사실을 알고 기가 막혔습니다. 그는 일주일 동안 밥도 먹지 않고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칼라일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문득 이러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더 좋은 작품을 쓰라는 하나님의 뜻인지도 모른다. 다시 더 좋은 작품을 쓰자”이렇게 다짐한 그는 다시 7년이란 긴 시간을 전성을 들여 불후의 명 저작 <불란서 대 혁명사>를 쓰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칼 라일의 인간승리는 자신의 의지적 삶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믿고 하나님을 바라본 믿음의 열매였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려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바라보고 물위를 걸어간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二. 물위를 걷던 베드로가 물속에 빠진 원인은 무엇입니까?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본 제자들이 유령으로 착각하고 두려워했을 때 예수님께서“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주님께 말씀하기를“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를 걸어오라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고 믿었던 베드로는 물위를 뚜벅뚜벅 걸어갔습니다. 전무후무한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풍랑이 일고 있는 바다와 같습니다. 그래서“고해(苦海)와 같은 세상”이라 말합니다. 바다에 풍파가 없을 수 없듯, 이 세상 역시 고난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밀어닥치는 세상 풍파를 이기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 해답이 본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갈 때 베드로가 바다 위를 걸었던 것처럼 풍파를 밟고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 파도와 바람만 바라본다면 그 사람은 풍파에 빠져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군인들이 받는 유격 훈련 가운데, 깊은 계곡을 외줄 하나를 의지하여 건너는 과정이 있습니다. 수십 미터 계곡 아래에는 험한 바위와 깊은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본다면 누구나 현기증이 나서 강을 건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래가 아닌 건너편 언덕을 바라볼 때 무사히 건널 수 있습니다. 이처럼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환경을 이길 수도 있고, 그 환경에 짓밟힐 수도 있습니다. 

승리한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만 바라보았으며, 반면 실패한 사람들은 모두가 세상 풍파만을 바라보았습니다. 패하고 승하는 것이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시각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이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승과 패, 행복과 불행이 결정됩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에는 물위로 걸었던 베드로였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눈이 바람과 파도를 바라보았을 때 무서움과 함께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똑같은 바다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었으나, 바람을 바라보았을 때 바다 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같은 환경이지만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물위를 걷기도 하고 빠지기도 했습니다. 

2차 대전 때 유럽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군의관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병명이 있었습니다.“가시 철망 병”이란 것입니다. 이는 극도로 우울해지고, 먹어도 살이 안 되고, 전신이 쇠약해져 누워만 있으려는 증세였습니다. 원인도 모르고, 치료방법도 없는 병이었습니다. 철망 속에 갇혀있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온 병이라 하여“가시 철망 병”이라는 병명을 붙여 불렀습니다. 

이 환자들의 행동을 면밀히 정신 분석학적으로 분석해본 결과 그들은 모든 일에 하루 종일 불평과 불만과 원망으로 매일 매일을 보내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불평불만 증후군을 보이는 악질적인 정신병인 셈입니다. 이들은 날마다 자기를 가두고, 희망을 앗아가고, 감사할 여유를 박탈해간 수용소의 가시 철망만을 바라보며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수용소 안에 갇혀 있으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이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했습니다. 이들에 대하여 조사해본 결과, 그들은 같은 환경이지만 들국화도 바라보고, 푸른 하늘을 떠다니는 뭉게구름도 쳐다보고, 고향도 그려보고, 사랑하는 사람도 생각하고, 더욱이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송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이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절망적인 환경에 처했을 때 무엇을 바라보는가 하는 것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애굽에서 해방되어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민족의 경우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수많은 사람들이 불 뱀에 물려 죽는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던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한 방법을 말씀 하셨습니다. “구리 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매어 달고 이를 바라보게 하라 이 구리 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다 살리라”(민수기 21:8)고 하셨습니다.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살았으나 불 뱀을 바라보며 무서워하는 사람은 모두 죽었습니다. 이 구리 뱀은 저주의 상징으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적인 모형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그리스도를 바라본 사람들은 모두가 살았습니다. 역경을 만났습니까?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변함없이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역경을 이길 수 있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요단강 가에서 열두 정탐꾼들을 보내며 40일간 탐지하고 돌아오도록 했습니다. 같은 땅을 살펴보고 돌아왔는데 그 시각은 큰 차이를 나타냈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은 민수기 13:22-23에 말하기를“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도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를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정탐꾼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민수기 14:9에 말하기를“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같은 상황을 두고 한편은 우리는“그들 보기에 메뚜기”와 같다고 했으며, 한 편은“저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정 반대의 시각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보고 말을 한대로 되었습니다. 그들이 한 말을 하나님께서 낱낱이 다 듣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이 보고 말한 대로 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민수기 14:28에 말씀하시기를“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그들의 보기에 메뚜기와 같다.”고 말한 사람들은 모두 메뚜기처럼 아무 힘없이 광야에서 모두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말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신의 말처럼 그들을 밥 먹듯 삼켜 그 땅을 점령했습니다. 

이처럼 승하고 패한 원인은 무엇을 바라보는가에 달렸습니다. 광야에서 불 뱀을 만난 이스라엘 백성, 열두 정탐꾼의 결과, 그리고 사울 왕과 다윗의 경우는 모두 베드로가 물위를 걸어가기도 하고 물속에 빠지기도 한 경우와 같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들은 그 어려운 고난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바라본 사람들은 모두가 그 고난으로 인해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얼마 전 KBS“대한민국 길을 묻다.”라는 프로그램에 강사로 나온 서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인 송병락 교수는 말하기를“잘되는 집안은 장점을 살리고, 안 되는 집안은 단점을 살펴 싸운다.”라고 했습니다.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잘 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 한국의 미래에 대하여 미국 골드만삭스의 피터 드레커 박사의 견해를 인용해서 말하기를“앞으로 2050년이면 세계경제가 1위: 미국, 2위: 일본, 3위: 한국이 될 것이다.”라고 내다 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험한 세상 살아가는 동안 무엇을 바라보시겠습니까?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다 풍파는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곧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고난도 염려도 금심도 없는 곳이 있다면, 그 곳은 주검들이 있는 무덤입니다. 풍랑이 내 삶을 엄습해올 때 풍파를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베드로처럼 무서워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위를 맨 땅처럼 밟고 걸어오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주님께서 내 목자가 되심을 믿고, 주님을 바라며, 간절히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풍랑을 밟고 승리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십니다. 
풍랑을 밟고 승리할 수 있다는 소망을 주십니다. 
풍랑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풍랑을 밟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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