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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람있고 행복한 신앙생활 (시 13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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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람있고 행복한 신앙생활 (시 132:1~18) 

   
올해 노벨 문학상은 프랑스 소설가인 르 클레지오가 받았습니다. 르 클레지오는 올 한 해의 대부분을 이화여대 해외 학술원에서 강의도 하고 글을 쓰면서 지냈답니다. 그가 최근에 출간한 ‘허기의 간주곡’이라는 작품도 이화여대 기숙사에서 쓴 작품이랍니다. 그는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 등을 유창하게 구사하면서 우리나라 말도 곧잘 한다고 합니다. 

클레지오가 한국어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한국어의 특징을 보여주는 단어로 두 단어를 꼽았는데 ‘보람’이라는 단어와 ‘정’이라는 단어입니다. 클레지오는 ‘보람’이라는 단어와 ‘정’이라는 단어를 영어와 프랑스어로는 합당하게 번역할 단어가 없다고 말합니다. 특히 그는 ‘보람’이라는 한국어는 용기를 불어 넣어주면서도 ‘헌신’을 요구하는 아주 독특한 단어라고 말합니다. 

저는 클레지오를 인터뷰한 글을 읽으면서 ‘보람’이라는 단어에 대한 그의 설명에 공감했습니다. 맞습니다. 보람이 있는 곳에는 자신의 헌신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자녀를 키우는데 자녀들이 성장해서 자신들의 삶의 자리를 하나씩 찾아 나가는 것을 보면서 부모들은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그 보람 안에는 자녀를 향한 부모의 끝없는 헌신이 있었습니다. 자녀를 향한 헌신과 희생이 없으면 그만큼 큰 보람을 느끼지 못합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보람을 느끼는 것은 그 직장에 그만큼 헌신적으로 임했기 때문에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헌신적으로 임하지 않은 직장을 통해서는 절대로 보람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교회 생활을 하면서 보람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그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위한 헌신과 희생함이 없으면 그 교회 생활을 통해 보람있는 신앙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마냥 교회가 좋고, 교회를 통해 보람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교회를 위해 그들의 헌신적인 섬김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자신의 헌신이 없는 곳에는 보람이 없습니다.  

일본에 그리스도인으로 사회 사업가였던 이시이 쥬지라는 유명한 분이 있습니다. 어느 날 시각장애인 한 사람이 그를 찾아와 자기의 우울증을 호소하며 어떻게 하면 밝고 보람있는 삶을 살 수 있는지 그 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이시이 선생은 그에게 ‘점자 성경을 읽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읽지 못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시이 선생이 ‘그러면 안마를 할 수 있느냐?’ 그러자 ‘안마는 할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교회는 나가냐’고 물었습니다. ‘나간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십일조를 드리냐’고 물었습니다. ‘못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시이 선생은 그 시각장애인을 향해 그러면 지금부터 두 가지를 실천해 보라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안마해서 얻은 수익에서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십일조를 드릴 것, 둘째로 두 번째 십일조로 당신보다 더 불쌍한 이웃들을 구제하고 섬겨 보라고 말했습니다. 

한 달 정도 시간이 지났습니다. 전에 찾아왔던 시각 장애인이 다시 이시이 선생을 찾아왔습니다. ‘선생님이 가르쳐 준대로 살아봤습니다. 그런데 제 일생에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행복감과 기쁨이 제 마음에 넘쳐납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시이 선생은 시각 장애인에게 그가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을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할 수 있도록 지도했을 뿐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헌신을 기꺼이 했을 때 바로 거기에서 행복과 삶의 보람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아름다운 헌신은 인생을 보람있게 만듭니다. 헌신이 있는 곳에 보람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132편의 말씀은 하나님을 위한 헌신이 얼마나 인생을 보람되고, 풍요롭게 만드는지를 우리에게 잘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는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성소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면서 불렀던 시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시는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의 고백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가 왕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언약궤는 블레셋 군대에게 빼앗겨 돌아오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안타까워 했습니다. 6절에 보면 ‘우리가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다 함을 들었더니 나무 밭에서 찾았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언약궤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스라엘의 모든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언약궤는 에브라다 지역의 나무 밭에 방치 되어 있었습니다. 소중하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3-5에서 ‘내가 실로 나의 거하는 장막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며 내 눈으로 잠들게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아니하기를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찾아 올때까지 자신은 장막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침상에 들지 아니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잠자는 것 조차도 거부하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찾아 오는 일에 전념하겠다고 말합니다. 정말로 다윗은 왕이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찾아 오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언약궤를 찾아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면서 덩실 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다윗은 너무 기뻐 춤을 추다가 자신의 옷이 벗겨지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들은 ‘주어’의 변화에 주목해 봐야 합니다. 1-6절까지의 다윗의 고백에 있어서는 주어가 ‘나’입니다. 그러나 6절에서부터는 ‘우리가’로 바뀝니다. 이것은 다윗의 꿈과 그의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꿈과 헌신으로 확산된 것을 말합니다. 다윗 한 사람에서부터 시작한 거룩한 꿈과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한 헌신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꿈과 헌신으로 된 것입니다. 아름다운 꿈과 헌신의 바이러스는 다른 사람을 전염시킵니다. 아름다운 꿈과 헌신의 바이러스가 전염되는 곳에는 감동과 보람이 있습니다. 다윗의 헌신은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감동을 주었고 함께 헌신에 동참케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헌신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보람으로 남았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 가장 먼저 하나님의 언약궤를 찾아오는 일을 했습니다. 다윗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일은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는 재료를 완벽하게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생애는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마쳤습니다. 그는 평생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헌신하며 살았습니다. 그런 다윗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평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산 다윗에게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 11-18절의 내용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다윗과 하나님은 서로를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사십니다. 2절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을 향한 헌신을 다짐하며 맹세합니다. 그런데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런 다윗을 위해 맹세하십니다. 그냥 맹세한 것이 아니라 성실히 맹세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신하고 하나님은 다윗은 위해 헌신하십니다. 이것이 귀하고 성숙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관계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다윗과 같은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서 골든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 작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부터 무력증에 시달렸습니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하루아침에 인생의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는 상당히 유명한 작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자살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몇 번의 자살을 생각하다가 마지막으로 그가 생각한 것은,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인 의사에게 찾아가기로 합니다. 의사인 친구에게 자기의 마음을 솔직하게 얘기했습니다. 그 친구는 정신과 의사이자 상담가였습니다. 그 친구 의사가 아서 골든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네가 어릴 때 가장 좋아했던 일이 무엇이었나?" 생각한 끝에 아서 골든이 대답합니다. 
"어릴 때 바닷가에 살았는데, 파도소리를 들으며 갈매기 소리 듣는 것을 참 좋아했지" 라고 말했습니다. 그 의사는 다음날 10시에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 다음날, 그 의사는 꼼꼼하게 적힌 네 가지 처방전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이 처방전은 너무 중요한 거니까, 약을 시간 맞춰서 먹듯이 꼭 그 시간에 펴 봐야 하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처방전을 아서 골든이 자란 그 바닷가에 가서 펴 보라고 했습니다. 

아더 골든은 처방전을 가지고 자기의 고향에 갔습니다. 아침 9시에 첫 번째 처방전을 뜯었습니다. 그 처방전에는 <여보게, 자네가 이 처방전을 열어 볼 때쯤이면 자네는 바닷가에 가 있겠군. 그곳에 앉아서 파도소리와 갈매기 소리를 2시간 동안 조용히 들어보게> 하고 써 있었습니다. 

처방전에 신기한 것이 있을 줄 알았는데... 하여튼 시키는 대로 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파도소리와 갈매기 소리를 들었습니다. 왠지 마음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바다를 바라보고 어릴 때를 생각하고, 갈매기를 보는 동안 12시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처방전을 뜯어야 할 시간입니다. 

두 번째 처방전에는 <지금까지 살면서 행복했다고 생각되는 순간들을 생각해 보라>고 써 있었습니다. 그는 눈을 감고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의 인생 가운데 행복한 순간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살까지 마음 먹었던 의미 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과거에 행복했던 순간들이 많았음을 기억해 냅니다. 친구들과 바닷가에서 씨름하던 일, 수영하던 일, 저녁 늦게까지 놀고 있으면 어머니가 자기의 이름을 부르며 찾아와서 손을 잡고 집에 데리고 가서 씻겨 주시고 밥상을 차려 주시던 일, 참으로 행복한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의 마음이 점차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오후 3시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 처방전을 뜯을 차례입니다. 

<지금부터 자네의 마음속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그리고 자네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동기가 무엇인지, 의미가 무엇인지 곰곰히 되씹어 보게> 라고 써 있었습니다. 그는 몇 시간 동안 자기가 인생을 살아 온 동기와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나서 깜짝 놀랍니다. 아서 골든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당연히 자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바닷가에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본 그 순간,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글을 쓴다고 밥먹듯 얘기했지만,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왜 글을 썼는가? 자신의 명예를 위해, 수입을 위해 글을 썼던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 사실을 발견한 그는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울면서 하나님과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며 탄식합니다. 
"하나님, 내 마음에 하나님이 안 계시군요. 하나님이 어느새 내 가장자리에 존재합니다!"
울다 보니 어느덧 저녁 6시를 맞았습니다. 마지막 처방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보게, 이제 자네의 죄를 자백할 시간이네. 자네가 자백할 죄들을 모래사장에 모두 써 보게> 
그는 울면서 참으로 회개하며 모래사장에 글을 써내려 갔습니다. 올바르게 산 줄 알았는데 왜 그렇게도 잘못 산 것이 많았습니다. 아내와 자녀에게 잘못한 것,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못했던 것, 쾌락을 위해 산 것, 이 모든 죄를 모래사장에 써내려 갔습니다. 그 처방전에 있는 대로 모든 것을 다 써놓고 한 곁에 물러나 하나님께 이 죄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어느새 바다에는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고 있는 그 때에, 아서 골든이 일어났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가 많은 죄들을 기록해 놓은 모래사장이 밀물에 깨끗이 씻겨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바라본 그 순간,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죄들을 용서하셨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일어나 주님을 찬양하며 삶의 의미를 다시 찾고, 그리스도인 작가로서의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의 간증과 믿음의 글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감동을 주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아기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을 사모하며 대림절 셋째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이 진정 내 삶의 주인이 되시고 있는지 돌아보며 신앙의 바른 자리매김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시기 위해 마굿간 말구유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내 마음과 우리 가정, 그리고 우리의 삶의 자리와 교회 공동체에 주인으로 임하시기를 진정으로 사모하는 대림절이 셋째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이 동방박사와 목자들처럼 무릎 꿇고 경배하며 헌신을 다짐하는 그곳에 다윗에게 임하셨던 하나님의 은혜와 신앙생활의 보람됨이 가득하게 임하실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은혜가 모든 성도님에게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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