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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무엇을 구해야 하는가? (마 7: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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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구해야 하는가? (마 7:7~12)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께서 외딴 도시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교인들을 돌보느라 젊음을 바치셨습니다. 
그런데 몇 해 전에 그 목사님의 아들이 대학생 때 서울에 왔다가 그만 교통사고를 당해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슬픔과 아픔을 묵묵히 견디셔야 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교회 장로님이 목사님을 찾아와 따지셨다는 겁니다. 
“목사님은 항상 우리더러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설교하셨는데, 목사님 가정에 큰 비극이 생긴 걸 보면 목사님이 열심히 기도하지 않으셨군요” 하더랍니다. 

담임목사님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고 그 큰 슬픔을 위로하지는 못할망정, 목사님이 열심히 기도하지 않아서 그런 비극이 생겼다는 투로 말하는 장로님의 비난과 조롱을 듣고, 그 목사님은 또 한번 무너져 내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젊음을 바쳤던 그 교회에서 더 이상 목회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결국 그 교회를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구하라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열어주실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 장로님의 비난과 조롱의 근거가 된 말씀이기도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지금 한 해가 저물어 가는데, 우리 사회는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캄캄한 터널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현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지금의 경제위기가 과연 어디까지 갈 것이며, 과연 언제나 끝나게 될지를 알지 못한 채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 하루를 지내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벼랑끝으로 내몰리는 혹한의 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연말을 맞이하여 지난 한 해 동안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더 밝아지고 사랑으로 가득차게 되었는지, 얼마나 더 평화롭게 되었는지를 되돌아볼 여유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는 각박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1.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 그러나...

이처럼 우리의 삶의 현실이 아무리 각박하다 하더라도, “지성이면 감천이다”는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이 아침에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얼마나 열심히 구했는지,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찾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힘을 다해서 문을 두드렸는지를 되돌아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생명의 잔치자리에서, 요한복음 10:10의 말씀처럼, 우리가 얼마나 더욱 풍성한 생명을 얻어서 찬양하며 살고 있는지, 그래서 얼마나 서로간에 기쁨을 나누며 사랑으로 섬기면서 살고 있는지를 이 시간 되돌아보게 하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더 용서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우리가 우리를 싫어하는 사람들과 핍박하는 사람들, 심지어 원수처럼 생각되는 사람들을 위해서까지 얼마나 정성껏 기도하면서 살고 있는지를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되돌아보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주시며, 찾는 자에게 찾게 하시며,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주신다는 말씀을 잘못 오해하면, 소위 “적극적 사고방식”이나 “삼박자 축복”을 가르치는 목사님들처럼, 하나님을 순전히 개인적인 축복이나 물질적인 축복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위험성이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쉬운 말로 가르칩니다. 즉 율법서의 가르침처럼 하나님을 잘 섬기면 축복을 받고 하나님을 잘 섬기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쉽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뒤집어서, 축복을 받지 못한 사람들 곧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며, 아이들처럼 유치한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며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반드시 축복만 받고, 불행한 일들은 겪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온 정성을 다 기울였던 사업이 뜻밖에 부도가 나고, 가게문을 닫아야 하고, 구조조정으로 인해서 직장에서 퇴출당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이력서를 수십 군데나 넣어도 취직을 하지 못하거나,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면서 설움을 당하는 모습을 보게 될 때, 혹은 예상치 못한 병에 걸리거나 집안에 큰 비극을 겪게 될 때,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운명을 탓하거나, 사회를 탓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인생길에서 몹시 외롭고 힘들 때, 우리를 붙잡아주고 다시 세워 일으킨 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지요. 누군가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기 때문에, 그 어둠과 추위와 외로움을 견딜 수 있었지요. 가출한 아이가 부모의 사랑마저 느끼지 못한다면, 그 심정이 얼마나 처절할 것이며 또한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하늘 아버지께서도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고통 속에 있을 때, 우리 자신에 대해서 분노하거나 우리 자신이 조금 더 열심히 구하지 않아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고 자책하거나, 열심히 기도하지 않아서 그런 불행이 닥쳤다고 후회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먹고 살아가는 일조차 이토록 버겁고 힘이 드는데, 하늘 아버지의 사랑마저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불쌍하며, 하늘 아버지의 마음은 또한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우리가 빵을 달라고 했는데 마치 돌을 받은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으면, 우리가 영적으로 힘들어하는 것 때문에 더욱 마음 아파서 애태우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이 좀더 열심히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확실히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생선을 달라고 했는데 뱀을 받은 것처럼 생각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좀더 열심히 문을 두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온 것이라고 자책하거나 후회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고통을 겪더라도, 그 고통 속에 주님이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과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라 하시는 것은 마태복음 6:33의 말씀처럼,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지난 십 년 동안 예수님 당시의 사회와 예수님의 말씀을 연구한 바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는 오늘 우리 한국사회보다 훨씬 더 절망적이었습니다. 500년 가까이 계속해서 강대국들에게 차례로 정복되고 그들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으니 오죽 했겠습니까? 수없이 새롭게 품었던 희망과 기대가 번번이 물거품이 되어버리곤 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에 대한 희망이 컸던 만큼 좌절과 냉소도 깊어만 갔습니다. 특권층은 더욱 더 부유해지는 반면에, 대다수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가난해져서 끼니조차 잇기 어렵게 되던 때였습니다. 

그 아귀다툼 속에서 사람들의 심성은 더욱 거칠어지고, 서로 돕고 살던 이웃들마저 더욱 영악스럽게 되어 마을공동체가 산산조각 나던 때였습니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정치 지도자들도 종교 지도자들도 결코 믿을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무에게도 의지할 곳 없이 떠돌아다니던 사람들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이 떠돌아다니는 양떼들”이 불쌍하고 측은해서 견딜 수 없으셨던 만큼, 자신이 지닌 사랑을 남김없이 내어주셨으며, 하나님 나라를 더욱 열심히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가장 먼저 구할 것으로 가르친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는 어떤 것입니까?

1)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죽은 다음에 가는 저 세상으로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죽어서 영혼이 “가는 나라”에 초점을 맞추었던 셈입니다.

2) 그러나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오는 나라”로 생각하고 우리는 그 나라가 오는 것을 준비하기 위해 금식하면서 기다려야 하는 나라로 가르쳤습니다. 

3) 그러나 제 생각에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는 주기도문에 나오는 말씀처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가는 나라”나 세례요한처럼 “오는 나라”라기보다는, “만들어나가는 나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례요한이 가르친 하나님은 악한 원수들에게 복수하는 하나님입니다. 세례요한이 가르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강권적으로, 기적적으로, 이 땅 위에 올 것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는 결코 마술적으로, 혹은 강권적으로 오는 나라가 아니며, 초자연적인 기적을 통해서 오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스스로를 채우고 자기의 욕심을 비우고, 자기를 내어주어 만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7절에서 11절까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것은 우리들이며, 그에 응해서, 주시며, 찾게 하시며, 문을 열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12절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시며, 우리가 찾는 것을 찾게 하시며, 우리가 두드리는 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은 바로 우리들 자신들이 서로 대접하는 것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과 발이라는 말씀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는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말씀을 본래 당신의 제자들에게 지시한 말씀이라고 생각하면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0:9 이하에서 예수님께서는 전도여행 떠나는 제자들에게 지시하신 것처럼, 제자들은 돈지갑도, 옷 보따리도, 속옷 두 벌도, 신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식량도 슬리핑백도 지니지 않고 떠돌아다니면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 운동을 확장하러 다니면서 끼니를 굶게 되거나 잠잘 곳을 찾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끼니를 구하고 마실 물을 찾고 문을 두드리라는 말씀으로 가르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경제사정이 어려워지고 사는 게 힘들수록,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의 고통을 혼자 짊어지기 쉽습니다. 마음에 병이 들어 몸마저 병들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기 때문일 것입니다. 돈 문제 때문에 이웃들과는 물론 가족과 친척들 사이에서조차 갈등이 생기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힘들고 외로울수록 마음 문을 열어놓고 나의 고통을 나누며 서로의 고통에 귀기울이기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이 땅 위에 만들어가시는 방법이 우리의 손길을 통해서라는 사실을 우리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일수록 명심하기를 원하십니다.


3. 우리의 삶 속에 태어나는 아기 예수를 기다리며
마지막으로, 제가 요즘 구하는 것을 여러분과 함께 나눔으로써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우리에게 닥친 경제위기는 일반적으로 우리의 개인주의적이며 소비주의적인 생활방식을 회개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웃들과 특히 우리의 다음 세대들을 위해 우리의 현재 생활수준과 소비수준을 1/3 이상 낮추라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특히 앞으로 20년 뒤에 기후변화의 위기가 어떤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지를 생각할 때, 우리가 물과 전기, 석유 소비를 가능한 한 줄이고, 육류 섭취를 대폭 줄여야만 우리의 자녀들과 지구 생명체들이 함께 생존할 수 있습니다. 인류가 자발적으로 이 과제를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전지구적인 경제위기를 통해서 억지로라도 이 과제를 새롭게 깨닫도록 마지막 기회를 주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현실은 매우 어둡고 미래는 더욱 불안하지만, 그럴수록 지금은 어둠 속에서 빛을 간구하는 대림절기입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 가운데는 아기를 낳으면, 그 어머니가 별이 총총히 빛나는 밤에 어두운 들판에 서서, 별들을 향해 그 아기를 손에 들어 올리고, 별들에게 자기 아기의 심장을 가져가고 대신에 별의 심장을 돌려주기를 간구하는 의식을 치르는 부족이 있다고 합니다. 맹수들 앞에서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사냥꾼의 심장을 얻게 되기를 간절히 구하는 의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는 것을” 보셨는데,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마가 1:10-11) 

예수님은 평생동안 이 하늘의 소리를 심장에 새기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대림절 셋째 주일을 맞은 우리들 모두에게도 이 하늘의 소리를 통해, 우리의 돌같이 굳어진 심장을 가져가시고, 대신에 아기 예수의 뜨거운 심장을 우리에게 돌려주시기를 우리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간구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모두가 아기 예수처럼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서, 캄캄한 터널 속처럼 어둡고 절망적인 세상 한복판에 서서 “별의 심장”을 지닌 사냥꾼처럼, 예수의 뜨거운 심장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생명과 평화와 기쁨의 나라를 만들어나가는 은총을 우리 모두가 얻게 되기를 성령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시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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